2009년 9월 18일 남자배구 국가대표 박철우가 코칭스태프에게 폭행당해 얼굴과 복부에 상해를 입었다는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박철우의 기자회견은 엄청난 후폭풍을 불러 일으켰다. 폭행의 가해자인 이상열 코치는 당시 배구협회 관계자에게 “선수가 반항하는 느낌을 줘 감정적으로 대응했다”고 설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코치는 대한체육회로부터 무기한 자격정지 징계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2년 만에 ‘2011-2012 V리그’ 경기운영위원을 맡아 배구계로 복귀했고 지금은 KB손해보험 감독을 맡고 있다.
#박철우 “가해자 사과 못 받아”
박철우는 최근 기자와 만나 2009년 기자회견을 열었던 이유로 “제2의 박철우가 나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고 회상했다. 후배들이 자신과 같은 일을 당해선 안 된다는 생각에 용기를 냈다는 말도 덧붙였다. 박철우는 이번 시즌부터 이상열 KB손해보험 감독을 상대팀 감독으로 만난다. 박철우는 지금까지 이 감독에게 당시 폭행에 대해 직접적인 사과를 받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남자 역도 금메달리스트인 사재혁은 2015년 12월 31일 후배 황우만을 불러낸 후 자신에게 맞은 일을 소문내고 다닌다는 이유로 주먹과 발로 얼굴 등을 수차례 때려 광대뼈 부근이 함몰되는 등 전치 6주의 부상을 입혔다. 사재혁은 이후 대한역도연맹의 자격정지 10년이라는 중징계를 받으면서 사실상 선수생활을 마감했고 폭행 혐의로 불구속 기소되면서 벌금 1000만 원을 선고받았다. 수차례 수술을 받고도 재기에 성공하면서 올림픽 금메달까지 목에 건 ‘오뚝이 역사’의 폭행 사실은 큰 충격을 안겨줬다.
폭행과 구타만 있는 게 아니다. 여자선수들을 이끄는 감독이 소속팀 선수를 성폭행하려다 미수 혐의로 구속된 사례도 있다. 2007년 5월 여자프로농구 우리은행의 박명수 전 감독은 돌연 사의를 발표하고 팀을 떠났다. 우리은행에서 19년 동안 코치와 감독으로 네 차례나 팀을 정상으로 이끌었던 박 감독의 깜짝 사퇴는 팬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당시 우리은행 관계자는 감독의 사퇴를 일산상의 이유라고만 밝혔다.
하지만 박 전 감독의 사퇴 이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에 알려졌다. 박 전 감독이 해외 전지훈련지에서 자신의 방을 청소하고 나가려던 A 선수를 불러 강제로 옷을 벗긴 뒤 성폭행하려다 미수에 그치는 등 모두 2차례에 걸쳐 이 같은 짓을 저지르려 한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성추행한 혐의로 구속기소됐던 박 전 감독은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 사회봉사명령 200시간 판결을 받았다. 당시 재판부는 선고 공판에서 “여자농구단 감독으로서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감수성이 예민한 나이의 어린 선수를 추행해 평생 씻어내기 어려운 고통을 준 점에서 엄벌에 처함이 마땅하다”고 밝혔다. 그러나 박 전 감독이 만취 상태에서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던 점, 전과가 없는 점, 과거 10여 년간 국가대표 여자농구팀의 코치 또는 감독으로 농구계 발전을 위해 노력한 점, 합의금으로 5000만 원을 공탁한 점 등을 감안해 사회봉사명령을 성실히 이행하는 것을 조건으로 집행유예를 선고했다고 밝혔다.
#최숙현 희생 헛되지 않아야
박 전 감독은 법원의 결정이 내려진 뒤 한국여자농구연맹(WKBL)으로부터 영구 제명당했지만 피해 농구선수와 같은 팀 동료 선수들은 박 전 감독의 범행이 우발적이고 일회적인 성추행이 아니었다며 다시는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엄벌에 처해 달라고 법원에 탄원서까지 제출한 바 있었다. 박 전 감독 사건 이후 여자배구, 여자농구 팀을 이끄는 지도자들은 선수들과 면담 등을 할 때 방문을 활짝 열어두는 걸 기본으로 했고, 감독과 코치들은 선수단 숙소 접근이 금지되는 등 생활면에서 변화가 이뤄졌다.
고 최숙현 선수 사망 사건과 관련해 지난 6일 오후 서울 송파구 올림픽파크텔에서 열린 대한철인3종협회 스포츠공정위원회에서 가해자로 지목된 고 최 선수의 선배 장 아무개 씨가 회의장으로 들어서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여자 선수들의 숙소 생활의 이유를 묻는 질문에 한 농구팀 관계자는 “선수들이 오히려 숙소 생활하는 걸 편하게 생각한다”며 선수들 핑계를 댔다. 선수들을 좀 더 쉽게 통제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라는 건 쉽게 알 수 있는 부분인데도 말이다.
2014년 올림픽 유도 메달리스트인 왕기춘은 SNS에 올라온 용인대 유도부 훈련단의 체벌 문화 비판 글을 보고 자신의 개인 SNS에다 자신도 후배 시절 많이 맞았다면서 “요즘 후배들은 행복한 줄 알아야 한다. 이유 없이 폭력을 가했다면 안타깝겠지만 맞을 짓을 했으면 맞아야 한다”는 글을 올려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그는 최근 미성년자 성폭행 혐의로 구속된 상태다.
고 최숙현 선수를 가장 괴롭힌 선배로 지목된 장 아무개 선수는 평소 폭행과 폭언을 일삼았다는 사실이 동료 선수들의 증언을 통해 알려졌지만 여전히 자신은 아무 잘못이 없다고 항변하고 있다. 선수들의 인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세상은 변했다. 선수들은 맞으면서 운동하는 걸 참지 못한다. 지도자들도 이런 변화를 잘 인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포츠 인권 사각지대에서는 여전히 폭력에 멍든 선수들이 신음하고 있다. 사건사고가 발생하면 협회 관계자들은 재발 방지를 약속하며 고개를 숙이지만 그때뿐이다. 고 최숙현 선수의 희생이 헛되지 않기를 바란다.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