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다르다. 역사가 쌓이면서 프런트의 역량 차가 커졌다. 경기 운영 전반에 프런트가 많은 영향을 미치는 21세기 KBO 리그에서는 더 그렇다. 확실한 기반을 쌓아 올려 진짜 프로다운 운영을 하는 구단이 있는 반면 여전히 끊임없이 시행착오만 거듭하는 구단도 있다. 우량 프런트와 불량 프런트의 차이가 한 팀의 10년 역사를 가르기 일쑤다.
#KBO 초창기 프런트 세계
프로야구 초창기에는 사실상 실업야구와 같은 방식으로 구단을 운영했다. 프로구단 운영 방식을 제대로 아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대부분 선수단을 통제하는 감독이 최종 결정권을 쥐었다. 자연스럽게 프런트를 대표하는 사장과 선수단을 지휘하는 감독 사이에 알력싸움이 자주 벌어졌다.
야구단의 모기업에서 일명 낙하산을 타고 내려온 사장들은 현장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권위부터 앞세우곤 했다. 웃지 못 할 에피소드들도 쏟아졌다. 1980년대 후반 A 구단 사장은 자신에게 인사를 하지 않는 감독을 해고해 물의를 빚었다. 성적이 안 좋다는 이유로 매일 감독을 사무실로 불러 무릎을 꿇게 한 B 구단 사장 얘기도 유명하다.
야구를 모르면서 현장을 통제하려고 하니 어이없는 지시도 많이 내렸다. C 구단 사장은 한 선수의 빗맞은 타구가 행운의 안타로 연결되는 모습을 보고 “다들 힘들게 치지 말고 모든 선수에게 저렇게 쉽게 치라고 하면 안 되느냐”고 말해 비웃음을 샀다.
D 구단 사장은 “투수 9명이 매일 1이닝씩 던지면 된다”는 상식 밖 논리로 투수 수를 줄이라고 지시했다. 일반 기업체에서 생산성을 높이는 일을 담당했던 사장들 눈에는 계산대로 결과가 나오지 않는 야구는 이해 불가의 영역이었다. 모기업에서 여러 차례 경영진단을 나왔지만 야구단을 감사했던 엘리트 직원들도 해답을 얻지 못한 채 고개만 흔들었다.
한국 프로야구에 프런트 야구의 새 방향을 제시한 팀은 1990년의 LG 트윈스였다. 이광환 감독과 손잡은 LG는 본격적으로 구단과 선수단 업무를 분리하기 시작했다. 2017년 4월 시구자로 나선 이광환 전 감독. 사진=연합뉴스
그런 한국 프로야구에 프런트 야구의 새 방향을 제시한 팀은 1990년 LG 트윈스였다. 이광환 감독과 손잡은 LG는 본격적으로 구단과 선수단 업무를 분리하기 시작했다. 한국시리즈 우승과 함께 LG 야구의 황금시대가 시작된 시기다. 1994년에는 프런트가 공들여 스카우트 해온 서용빈 유지현 김재현 신인 3총사가 ‘신바람 야구’ 돌풍을 일으키면서 최고 인기 구단으로 발돋움했다.
LG가 만든 기틀은 현대 유니콘스가 더 발전시켰다. 현대 전성기를 이끈 김재박 감독은 더그아웃에서 선수기용을 비롯한 경기 내적인 부분만 지휘했다. 트레이드, 외국인 선수와 신인 선발, 2군 운영 등은 구단이 총괄했다. 프런트와 현장의 호흡도 잘 맞았다. 현대 프런트는 적재적소에 과감한 투자를 했고, 선수의 기량을 세밀하게 분석해 숱한 트레이드 성공 사례도 남겼다. 현대 왕국의 기반을 그렇게 다졌다.
다만, 한때 모범사례를 제시했던 LG는 2000년대 들어 급격한 하향세를 탔다. 선수들 인기가 하늘을 찌르고 팀 성적도 좋아진 게 오히려 독이 됐다. 2군에 잘 모아 놓았던 유망주들은 좀처럼 성장하지 못하다가 다른 팀으로 이적한 뒤 친정팀에 비수를 꽂았다. 갓 입단한 신인들은 훈련장에 고급 차를 몰고 나타났고, 경기 후엔 유흥을 즐기다 몇 년 안 돼 유니폼을 벗었다. 전성기에 구단을 이끌던 인사들이 물러난 뒤에는 팀을 이끌던 구심점마저 사라졌다.
오너 일가의 지극한 야구 사랑도 가끔은 역효과를 냈다. 눈앞의 성적에 급급해 수시로 감독을 바꾸고 단장을 교체하던 LG는 서울 연고지팀이라는 이점을 갖고도 2003~2011년 포스트시즌 무대를 밟지 못했다.
#프런트의 업무와 역할
현대 야구에서 프런트의 비중은 더 커지고 있다. 2017년 넥센 히어로즈(현 키움 히어로즈)와 올해 삼성 라이온즈가 각각 운영팀장 출신인 장정석 전 감독과 허삼영 감독을 새 사령탑으로 선임했을 정도다. 2019년 조아제약 프로야구대상 시상식에 참석한 장정석 전 키움 감독(왼쪽). 사진=일요신문DB
하지만 프런트의 역할과 책임이 커진 만큼 구단을 잘 운영하기는 더 어려워졌다. 우선 검증된 인재가 드물고, 검증 방법도 많지 않다. 야구단 업무를 경험했다고 모두 유능한 프런트는 아니기 때문이다. 프로야구단은 다른 프로스포츠에 비해 조직이 매우 크고 세밀하다. 국내 구단들도 30~40명의 직원을 보유하고 있다. 같은 프로 종목인 농구, 배구, 축구 프런트와 비교가 되지 않는 대규모 인원이다.
게다가 야구단 프런트 한 명을 만들기 위해서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 짧게는 5년, 길게는 10년까지 지나야 비로소 진짜 노하우가 생긴다. 프런트는 시야가 넓어야 하고, 먼 미래까지 내다봐야 한다. 피할 수 없는 현장과 갈등도 매끄럽게 봉합해야 한다. “신생구단에서는 감독보다 프런트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는 의견까지 나오는 이유다.
야구단 운영의 목표는 당연히 팀을 포스트시즌에 올려놓는 것이다. 한정된 선수 자원과 구단 예산은 프런트에 주어진 시험지와 같다. 어떻게 계산하고 분배해 어떤 답을 도출하느냐에 따라 팀 성적과 프런트의 능력이 갈린다.
무엇보다 선수들을 정확하게 평가하는 게 가장 중요한 과제다. 군 입대와 세대교체, 부상자 발생, 외부 전력 영입, 기존 자원 방출 등 다양한 시뮬레이션을 통해 늘 대안을 마련해 놓아야 한다. 수십 명의 선수들을 하나하나 파악하지 못하면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십상이다. 과거의 LG와 현재의 한화 이글스가 연례행사처럼 리빌딩을 입에 올리는 이유, 전성기의 해태 타이거즈(현 KIA 타이거즈)와 현대가 리빌딩에 성공하면서도 꾸준히 성적을 냈던 비결이 결국은 이런 능력과 일맥상통한다.
프런트와 선수단은 사실 공동운명체다. 결국은 팀 성적에 따라 울고 웃는다. 상위권 팀 프런트들은 겨울이 행복하다. 한국시리즈 우승이라도 하면 주머니까지 두둑해진다. 똑같이 고된 일을 해도 훨씬 즐겁다. 하위권 팀은 반대다. 팀 성적을 개선하기 위한 아이디어를 짜내느라 휴식기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른다.
물론 성적은 결정적으로 선수들의 손과 발에 달려 있다. 프런트가 아무리 잘해도 더 나아가 감독의 리더십이 아무리 출중해도 선수가 야구를 못 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구단 직원은 말 그대로 자신의 업무에 최선을 다한 뒤 좋은 성적이 나길 기도하는 수밖에 없다.
다만 프런트 수뇌부의 잘못된 판단으로 팀을 망가뜨리는 일은 충분히 가능하다. 투자가 정말 필요할 때는 돈을 아끼다가 성적이 떨어져서 급해지면 뒤늦게 안 써도 될 돈까지 쓴다. 기량이 하락세로 접어든 선수를 큰돈 들여 영입하고, 한눈에도 재능이 출중한 유망주를 헐값에 다른 팀으로 보내버린 프런트가 허다하다. 그래서 야구단 생활을 오래 한 관계자들은 한결같이 “좋은 프런트 아래 나쁜 선수단은 나올 수 있지만 나쁜 프런트 아래 좋은 선수단은 절대 나올 수 없다”고 입을 모은다.
#리빌딩과 세대교체, 관건은?
KBO 리그는 최근 메이저리그(MLB)의 새로운 문화를 적극적으로 흡수하고 있다. 올 시즌은 특히 그런 경향이 더 두드러진다. 롯데 자이언츠는 메이저리그 스카우트 출신인 1982년생 성민규 단장에게 구단 운영을 진두지휘하게 했고, KIA는 메이저리그 스타플레이어 출신인 맷 윌리엄스 감독을 새 사령탑으로 영입해 팀 컬러를 바꿨다.
모든 구단 프런트의 가장 큰 고민이자 가장 중요한 과제인 세대교체와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다. 메이저리그의 탱킹을 모방한 전면 리빌딩이 화두로 떠오르기도 했다. 탱킹은 포스트시즌 진출이 어려워진 구단이 다음해 신인 드래프트에서 더 높은 순위 선수를 뽑기 위해 일부러 팀 전력을 약화시키는 전략이다. ‘매 경기 최선을 다한다’는 프로스포츠 기본 정신에 위배되지만 팀 전력을 냉정하게 분석하고 더 나은 미래를 도모하는 돌파구로 여겨지기도 한다. 당연히 장점만큼 단점도 많다. 기본적으로 ‘모로 가도 이겨야 제 맛’이라는 프로야구의 재미를 떨어뜨리는 역효과가 있다.
올 시즌 18연패로 KBO 리그 역대 최다 연패 타이기록을 세운 한화도 그랬다. 한용덕 전 감독이 14연패 끝에 지휘봉을 놓고 물러나자 최원호 퓨처스(2군) 감독을 감독대행으로 앉히면서 1군 엔트리 10명을 한꺼번에 교체했다. 그중 9명이 30대 베테랑 선수였고, 대부분 주전급이어서 더 파격적이었다. 물론 올 시즌 성적을 포기한다는 탱킹의 원론적 의미와는 의도가 달랐다. 패배 의식에 젖은 팀 분위기를 빠르게 전환하고, 2군의 유망주들이 1군에서 얼마나 기량을 발휘할 수 있을지 확인해보겠다는 시도였다.
결과는 절반의 성공이었다. 한화는 이후 4경기를 더 진 뒤 가까스로 긴 연패를 탈출했다. 이후에도 여전히 승보다 패가 많고, 올 시즌 10개 구단 중 처음으로 40패를 당했다. 하지만 당시 출전 기회를 얻은 유망주 가운데 일부는 1군에 살아남아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18연패를 끊는 끝내기 안타도 지난해까지 1군 기록이 없는 무명 내야수 노태형의 배트에서 나왔다.
최원호 감독대행은 “기량이 비슷하다면 젊은 선수를 뛰게 해 미래를 도모하는 게 맞다. 그러나 프로는 더 잘하는 선수가 경기에 나설 수밖에 없는 곳”이라며 “베테랑들이 유망주들보다 더 좋은 성적을 낸다면 당연히 나이에 상관없이 기용한다”는 원칙을 천명했다.
실제로 대부분 야구 관계자들이 “탱킹은 한국 프로야구의 상황과 잘 맞지 않는다”고 말한다. 현직에 있는 E 감독은 “메이저리그와 우리는 문화와 시스템 자체가 다르다”며 “인위적으로 베테랑을 배제하고 젊은 선수들만 기용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단언했다.
기본적으로 한국은 선수층이 얇고 특급 유망주 수가 메이저리그나 일본에 비해 훨씬 적다. 무엇보다 2022년 신인을 뽑는 내년 시즌 신인 드래프트까지는 1차 지명 제도가 유지된다. 올해는 고의 꼴찌 효과도 그리 크지 않다는 얘기다. 어차피 많지 않은 특급 유망주 가운데 대부분은 전년도 최하위 팀이 아닌 연고지역 구단으로 간다.
서울지역 고교에 좋은 자원이 많이 몰려 있다 해도 서울 세 팀이 먼저 1~3순위 선수를 데려간 뒤 2차 드래프트가 시작되기 때문에 다른 지역 구단들은 그 다음 기회를 노릴 수밖에 없다. 해당 시즌 최고 선수가 학창시절 전학이나 유급 등의 이유로 1차 지명 대상에서 제외됐을 때만 의미가 있다. 2018년 신인 2차 드래프트 전체 1순위로 KT 위즈에 입단한 서울고 출신 강백호, 올해 신인 2차 드래프트에서 가장 강력한 전체 1순위 지명 후보로 꼽히는 강릉고 김진욱이 그런 드문 사례다.
#프런트 능력이 더 중요한 까닭
포스트시즌 제도의 차이도 원인이 된다. 메이저리그는 양대 리그 8개 팀이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는 순간 모두 디비전 시리즈→리그 챔피언십 시리즈라는 같은 단계를 거쳐야 월드시리즈 진출을 바라볼 수 있다. 와일드카드로 가을야구 티켓을 딴 팀이 최종 우승을 차지하는 사례도 비일비재하다.
반면 단일 리그제인 KBO는 포스트시즌 경기 방식도 순위에 따른 계단식이다. 정규시즌 1위 팀이 절대적으로 유리하고, 와일드카드전부터 출발해야 하는 4위나 5위 팀은 사실상 한국시리즈 우승을 넘보기 어렵다. 포스트시즌 진출 팀과 하위권 팀이 과감한 트레이드를 단행하기에는 감수해야 할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
따라서 완벽하게 새 판을 짜는 리빌딩은 여전히 요원하다. “성적과 리빌딩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겠다”는 이상적 구호는 강팀에만 유효하다. 그마저도 두 마리를 다 잡으려다 둘 다 놓치는 일이 다반사다. 당장 성적에 따라 감독이 자주 바뀌는 KBO 리그 문화에서는 더 그렇다. 수년에 걸친 프런트의 철저한 준비와 치밀한 계획, 무엇보다 그 청사진을 실행에 옮기는 추진력 없이는 불가능하다.
성적에 따라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열성팬들의 여론 역시 팀의 리빌딩 플랜에 방해가 된다. F 감독은 “한번 가을야구를 하고 나면 팬들의 눈높이는 다시 낮아지지 않는다. 그 다음 해에도 포스트시즌에 진출해야 박수를 받을 수 있다”며 “리빌딩은 장기적이고 거시적으로 진행돼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쉽지 않다”고 토로했다. 실제로 수년 전 G 감독은 구단의 전폭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 최대한 유망주를 많이 기용하는 대대적인 리빌딩을 진행했다. 그러나 성적이 나지 않자 팬들의 원성과 구단의 의심이 고개를 들었다. 끝내 계약 기간을 다 채우지 못하고 경질됐다.
올해 팀이 상위권을 달리고 있는 H 감독은 “한국형 리빌딩은 승리가 뒷받침돼야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현재 성적이 좋은 베테랑들이 주축을 이루면서 앞으로 성장해야 하는 신인급 선수를 2~3명 적절하게 끼워 넣는 게 가장 바람직한 과정”이라며 “이겨 본 사람이 이기는 법을 안다. 리빌딩도 승리하면서 해야 리빌딩이지 계속 지기만 하면 젊은 선수들이 성장동력을 얻을 수 없다”고 전했다.
팀 상황에 따라 꼭 필요한 유형의 선수를 잘 뽑고, 적절한 방식으로 성장 계획을 세워 팀의 미래를 도모하는 프런트의 능력이 그래서 더 중요하다. 리빌딩의 기둥은 감독이 세울지라도 지반을 다지고 자재를 제공하는 임무는 프런트의 몫이다.
배영은 중앙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