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삼영 삼성 라이온즈 감독은 올 시즌 첫 60경기에서 59가지 선발 라인업을 들고 나왔다. 사진=연합뉴스
타순을 짜는 일은 승리를 위해 최선의 조합을 찾는 작업이다. 선수들은 경기 전 선발 라인업이 확정된 순간부터 자신의 역할을 파악하고 긴장감을 높인다. 각 타순에 배치된 선수들의 임무 수행 여부에 따라 감독의 전술이 달라지고, 경기 흐름이 바뀌기 때문이다. 단순해 보이지만 사실은 복잡하기 그지없는 타순의 세계. 그 안을 들여다봤다.
#1~9번 타순의 의미와 기능
타순은 보통 상위타선과 중심타선, 하위타선으로 구분한다. 테이블세터는 상위타선인 1번과 2번 타자를 표현하는 단어. 중심타선 앞에 득점하기 위한 ‘밥상’을 차린다는 의미로 붙은 이름이다. 타석에 가장 많이 나서는 1번 타자는 대부분 발이 빠르고 출루율 높은 타자가 맡는다. 어떻게든 1루를 밟기 위해 좋은 콘택트 능력이 기본적으로 필요하다.
매 경기 가장 먼저 타석에 서기 때문에 상대 선발투수가 최대한 많은 공을 던지게 유도해야 하는 것도 숨은 임무다. 그래야 뒤에서 기다리는 다음 타자들에게 그 투수의 당일 컨디션이나 상대 배터리의 볼배합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1회 1번 타자가 초구를 때려 아웃되는 것만큼 허무한 상황도 없다. 2번 타자도 1번과 비슷한 능력을 필요로 한다. 다만 전통적으로 번트를 비롯한 작전수행능력과 주자를 한 베이스 더 보내기 위한 팀배팅 능력을 좀 더 중요하게 고려한다.
중심타선인 3~5번은 ‘클린업 트리오’로 불린다. 루상의 주자들을 깨끗하게 ‘청소’해 홈으로 불러들인다는 의미다. 당연히 타점을 많이 올리는 게 주요 임무다. 3번은 장타력만큼 정확도도 중요해 중장거리형 타자들이 많이 배치된다. 4번과 5번은 확실한 한 방이 있는 타자로 주로 구성된다. 투수 출신인 한 현직 감독은 “투수들은 실점 위기 상황에서 4할을 치는 단타형 타자보다 1할을 쳐도 제대로 걸리면 담장을 넘기는 파워 히터들을 더 껄끄러워 한다”고 했다. 중심타선의 연장선인 6번 역시 장타력이 가장 중요한 자리다.
하위 타선인 7~9번 타순은 수비 면에서 체력적·정신적 부담이 큰 포수나 유격수가 주로 맡는다. 상대적으로 타격 압박감이 덜한 타순이라서다. 맨 마지막 타순인 9번은 다음 공격이 상위 타선으로 연결되는 자리다. 따라서 타격이 가장 약한 타자는 9번보다 8번에 고정적으로 배치되는 편이다. NC 다이노스 양의지처럼 공격력까지 팀 내 정상급인 포수를 제외하면, 대부분 8번에는 수비형 포수들이 자주 이름을 올린다.
공격을 리드해야 하는 1번 타자와 공격의 핵심인 4번 타자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한 야구 해설위원은 “한 팀에 확실한 에이스와 마무리 투수, 1번 타자와 4번 타자가 존재한다면, 감독이 경기 전 해야 하는 고민의 절반 이상이 줄어든다”고 했다. 이 때문에 수년간 붙박이로 활약하던 1번 타자와 4번 타자가 여러 이유로 팀을 떠나면, 새 선수들이 그 빈자리를 메우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다른 타순에서 잘 치던 타자들을 1번이나 4번 자리로 옮겨 놓았을 때, 갑자기 큰 부담을 느껴 슬럼프에 빠지는 현상도 종종 벌어진다.
이럴 때 감독들은 전략적인 선택을 해야 한다. 예를 들어 A 감독은 1번 타자로 키우고 싶은 유망주를 일단 부담이 덜한 2번 타순에 고정적으로 기용하면서 적당한 때를 기다린다. 반대로 B 감독은 초반에 선수가 부진하더라도 계속해서 1번 타순에 밀어 넣고 자신의 자리에 익숙해질 시간을 준다. 어느 쪽이든 감독의 의도대로 될 확률은 반반이다. 결국은 성공하는 쪽이 정답이 되는 셈이다.
‘강한 2번’ 기용을 선호하는 류중일 LG 감독은 김현수를 2번에 배치해 효과를 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점점 더 중요해지는 2·6·9번의 역할
현대 야구는 모든 면에서 갈수록 더 세밀해진다. 1번과 4번 못지않게 중요한 타순도 그만큼 더 많아졌다. 2번, 6번, 9번이 대표적이다. 특히 9번 타자는 최근 1번 못지않은 능력을 갖춰야 하는 타순으로 떠오르고 있다.
9번이 기대 이상으로 활약해 준다면, 그 팀은 경기 초중반부터 9번-1번-2번으로 이어지는 ‘3중 테이블 세터’를 장착할 수 있다. C 투수는 “개인적으로 주자가 없을 때는 오히려 중심타선보다 9번 타자를 만날 때 더 집중한다. 중심타선은 ‘이 타자만 막으면 끝’이라고 생각하게 되지만, 9번은 ‘이 타자를 내보내면 상위타선으로 연결된다’는 부담감이 크기 때문”이라며 “두산 베어스 정수빈처럼 1번 못지않게 발 빠르고 잘 맞히는 유형의 선수가 9번으로 나오면 아무래도 상대하기 더 어렵다”고 귀띔했다.
무엇보다 7~9번 하위타순이 일제히 약하면 상대 투수에게 큰 힘을 준다. D 감독은 “아무리 하위 타선이라도 전혀 경쟁력 없는 선수들이 3명 연속 들어서면, 9이닝 가운데 3이닝은 사실상 ‘접어주고’ 싸운다는 의미와 같다”며 “타순의 역할과 별개로 일명 ‘쉬어가는 이닝’이 없도록 배치를 잘하는 것도 감독의 역할”이라고 했다.
2번 타자는 1번 타자와 중심타자의 기능을 번갈아가며 수행해야 하는 포지션이라 어렵다. 한 점이 꼭 필요할 때 가장 할 일이 많은 자리기도 하다. 발이 빠르고 출루에 능하면서 번트도 잘 대야 하고, 여차하면 직접 장타를 터트려 타점을 올릴 수 있다면 금상첨화다. 최근에는 2번까지 중심타선의 연장으로 간주해 타점 생산 능력이 있는 ‘강한 2번 타자’를 자주 기용하는 추세다. 2번 타순에서 번트를 위해 아웃카운트 하나를 소모하면 팀 득점력을 극대화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실제로 키움 히어로즈는 지난 시즌 초반 붙박이 4번 타자 박병호를 2번에 기용하는 모험을 시도했다. 박병호 카드가 실패로 돌아간 뒤에는 20홈런-20도루가 가능한 중장거리포 유격수 김하성을 2번 타순에 기용해 결국 성공을 거뒀다. 올해는 LG 트윈스가 주로 3번이나 6번을 맡던 김현수를 2번 타자로 내보내면서 득점력 강화 효과를 봤다. 김현수를 2번에 쓴 류중일 LG 감독은 삼성 사령탑 시절 박한이를 2번에 기용하면서 가장 먼저 ‘강한 2번 타자’ 트렌드를 실제 경기에 적용한 지도자다.
이 외에도 올 시즌 두산(호세 미구엘 페르난데스), 삼성(김동엽), 롯데 자이언츠(전준우) 등이 전통적 고정관념을 깨고 중장거리 타자들을 2번 타자로 꾸준히 기용했다.
6번 타자는 중심타선과 하위타선의 연결고리다. 김성근 감독은 SK 와이번스 시절 “6번 타자는 또 다른 5번 타자이자 또 다른 1번 타자”라는 지론을 펼쳤다. “6번이 강하면 단 한 번의 찬스로 타자일순하면서 한 이닝에 대량 득점을 하는 사례가 많다. 두산이 강할 때는 6번부터 공격을 시작해 3번 김현수가 해결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또 중심타선이 강력한 팀은 6번을 넘어 7번까지 타점 기회가 자주 돌아오기도 한다. 앞서 하위타선의 효율적 배치를 강조한 D 감독은 “7번은 철저하게 클러치 능력에 초점을 맞춘 선수를 주로 쓰고, 경기 중 대타를 가장 많이 기용하는 자리”라고 설명했다.
#감독 성향에 따라 달라지는 타순
타순에는 감독의 전략과 전술이 씨줄과 날줄처럼 얽혀 있다. 기본적으로 라인업을 구성하는 원칙은 대개 비슷하다. 첫째는 팀과 투수별 상대 성적 분석, 둘째는 타자의 컨디션 파악, 셋째는 상대 선발투수를 무너뜨릴 전략, 넷째는 흐름과 직감이다. 이 과정에서 감독의 성향에 따라 타순의 색깔도 달라진다. KBO 리그 역대 최다승 감독 2위인 김성근 전 한화 이글스 감독(1388승)과 3위인 김인식 전 한화 감독(978승)이 그 차이를 보여준다.
김성근 감독은 최대한 타순에 많은 변화를 주는 스타일이다. 한 경기가 끝나면 곧바로 다음 경기 타순을 구상하고, 때로는 7~8개의 선발 오더를 만든 뒤 직감이나 미리 정한 원칙에 따라 하나를 고르기도 했다. 김 감독은 “타순을 짤 때 고려해야 할 부분이 정말 많다. 예를 들어 타구 하나에 한 베이스를 더 가는 타자들이 많은 팀을 만나면 외야진도 수비 위주로 짰다”며 “반면 장타력이 있지만 기동력이 약한 팀을 만나면, 우리 수비진 역시 발은 느리더라도 공격력이 강한 타자로 구성했다”고 설명했다. 그만큼 세밀하게 많은 요소를 고려했다. SK 감독 시절에는 같은 라인업으로 치른 경기를 거의 찾기 힘든 시즌도 있었을 정도다.
반면 김인식 감독은 경기 전 타격코치가 쓴 타순을 받아본 뒤 꼭 필요할 때만 일부 변화를 줬다. 무엇보다 특정 타자의 부상이나 슬럼프 같은 불가피한 변수가 없다면, 시즌 내내 고정타순이 유지되는 것이 좋다는 지론을 갖고 있었다. “타자마다 타순에 대한 역할을 인식하고 적응력과 면역력이 생겨야 전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다”는 까닭에서다. 김인식 감독을 대표하는 단어인 ‘믿음의 야구’도 이런 성향의 연장선상이다.
다른 감독들도 나름의 원칙과 소신에 따라 타순을 정한다. 사령탑 통산 629승을 해낸 조범현 전 KT 위즈 감독은 “상대 선발투수가 에이스급이면, 좌완이냐 우완이냐에 따라 달라질 뿐 기본적으로 6이닝 이상 바꾸지 않고 상대할 수 있는 타순을 구성한다”며 “반대로 상대 투수가 약하면 불펜이 일찍 가동될 경우를 대비해 대타와 대수비, 대주자 기용 등을 미리 생각하고 타순을 짠다”고 했다. 김시진 전 롯데 감독은 “투수 출신 감독은 대개 좌-우-좌-우 지그재그 타선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승부처에서 상대 핵심 불펜 왼손투수가 한 타자만 상대하고 내려가도록 하기 위해서다”라고 말했다.
그런가 하면 미국 메이저리그(MLB) 워싱턴 내셔널스 감독으로서 2년간 179승을 올린 맷 윌리엄스 KIA 타이거즈 감독은 상대 투수보다 타자의 타격 스타일을 최우선으로 고려해 라인업을 구성한다. 부상 전까지 타격 1위였던 김선빈을 2번 타순에 고정적으로 기용하면서 “김선빈은 외야 전 방향으로 자유롭게 타구를 보내는 ‘부챗살 타격’을 한다. 2번 타순에 가장 적합한 타격 방식”이라며 “최형우와 프레스턴 터커는 반대로 자기 스윙을 해야 좋은 타격을 할 수 있는 선수들이라 중심타선이 어울린다. 2번 같은 타순에 (변칙적으로) 기용하면 활용도에 제한이 생길 수 있다”는 지론을 펼쳤다.
확실한 주전선수가 부진의 늪에서 빠져 나오지 못할 때는 감독들도 갈림길에 선다. 다시 감을 찾을 때까지 계속 믿고 경기에 내보내느냐 아니면 잠시 선발 라인업에서 제외해 휴식을 주느냐를 두고 고민한다. 빙그레 이글스 시절 김영덕 감독은 최고의 4번 타자 장종훈이 슬럼프에 빠지자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해결책을 쓰기도 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한 타석이라도 더 나가서 공 하나라도 더 보라”는 의미로 ‘홈런왕’ 장종훈을 1번 타순에 배치한 것이다. 장종훈은 얼마 지나지 않아 감을 되찾았고, 다시 4번 타자로 복귀했다.
물론 감독의 성향과 별개로 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다. 많은 감독들은 “상위 팀들은 타순의 변화가 심하지 않고, 바뀌더라도 한두 자리 정도에 그친다. 그러나 하위 팀들은 시즌 중 선발 라인업은 물론 엔트리 변화도 많다”고 입을 모았다. 확실한 주전 선수들이 많다는 것은 곧 경기가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흐를 변수가 적고, 한 시즌 성적의 기복 또한 크지 않다는 의미다.
배영은 중앙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