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식구는 차에 탄 뒤 미리 주문해둔 피자 10판을 찾으러 갔다. 아들 석현 씨 복귀 때 두 손 가득 들려줄 피자였다. 아버지 기문 씨는 아내와 피자 값을 계산하러 들어갔고, 형은 부모님과 있으면서 참았던 흡연 욕구를 해소하러 잠시 자리를 비웠다. 차에 돌아왔을 때 석현 씨는 자리에 없었다. 가족들은 석현 씨의 행방을 알지 못했다. 세 식구는 얼마 뒤 경찰의 연락을 받고 석현 씨의 소재를 알 수 있었지만, 이미 석현 씨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석현 씨는 혼자 남겨진 틈에 근처 아파트 15층에 올랐고 오후 7시 20분쯤 스스로 마지막을 맞았다.
홍석현 상병 아버지 홍기문 씨. 2009년 아들을 잃은 뒤, 아들 이야기를 꺼내는 건 금기시 됐다. 같은 아픔을 가진 부모가 이 인터뷰를 보고 용기 내 진상규명 진정을 내길 바란다고 전했다. 사진=이종현 기자
“‘이제 이 정도는 너 스스로 이겨낼 수 있잖아. 언제까지 가족들이 왔다 갔다 할 순 없잖아. 인마, 이제 1년 했으니까 금방이야’ 그놈한테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에요. 의가사 제대하면 아무래도 편견이 있으니까 정상적으로 끝내길 바랐어요. 우리 아들은 이겨낼 거라 믿었던 거죠. 그게 한이 맺혀요. 장례 치를 때 큰아들이 와서 날 꼭 안으면서 ‘아빠, 잘못 아녜요. 아빤 아빠로서 최선을 다했어요’라고 말해주더라고요. 그때 눈물을 펑펑 쏟았어요.”
조현병이었다. 정신분열증의 다른 이름이었다. 누구보다 순수하고 감수성이 컸던 석현 씨는 군대에서 마음의 병을 얻었다. 이 마음의 병은 석현 씨의 정신을 갉아먹고 육체까지 잠식했다. 1988년생으로 당시 22세였다.
홍석현 상병은 2008년 4월 입대했다. 보름 내내 컴퓨터를 지켜보던 석현 씨는 입대 4일 전에 누군가가 입대를 미루면서 생긴 공석을 낚아챘다. 석현 씨에게 입대가 급했던 건 2년 뒤 아버지와 미국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아버지는 당시 미국에 본사를 둔 국내 배관 업계 1위 회사의 부사장이었다. 2년 뒤 미국에 주재원으로 가게 되면서 석현 씨를 데려갈 참이었다. 아버지는 석현 씨에게 얼른 군대를 마치고 오라고 권유했다. 석현 씨는 아버지를 따라가 미국을 경험하고 싶어 했다.
금요일에 입영 신청해서 월요일에 훈련소를 찾은 석현 씨는 다급한 입대에도 우울한 기색 없이 웃으면서 들어갔다. 늘 웃음기 띈 얼굴에 쾌활하고 말도 많던 석현 씨였다. 그의 고등학교 생활기록부엔 “명랑하고 인정이 많고, 급우가 많으며 자신의 행동에 책임 질 줄 아는 학생”이라고 돼 있다.
석현 씨는 같은 해 5월 경상북도 안동에 자대 배치됐다. 첫 면회 때 아버지 홍기문 씨가 본 둘째 아들 석현 씨는 여전히 밝고 말도 많았다. 군대 가더니 남부럽지 않은 환경에서 키워준 부모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기도 하는 기특한 아들이었다. 물론 아들은 자신의 군대에서 당한 일을 부모에게 상세히 말하지 않았다.
“첫 면회 때 가니까 그래요. ‘아빠, 나는 혜택을 받고 자랐던 것 같아.’ 자기가 해외여행 했던 얘기를 하고 그러니까 ‘갈굼’을 당하기도 했다면서요. 그러면서 또 ‘군대에선 말조심해야겠더라’ 그래요. 얘가 자기 생각을 그냥 편하게 직설적으로 얘기하던 자유분방한 애였거든요. 그때만 해도 ‘그래, 군대는 다 그런 데야, 조심해야지’라고 말해주고 말았거든요. 다리를 절고 올 때 눈치를 채야 했는데….”
석현 씨는 부대 내에서 폭언과 폭행, 성추행에 시달렸다. 생활관 ‘왕고(왕고참, 사병 가운데 가장 선임 병사)’는 “네가 잘못하니까 이렇게 당한다”며 석현 씨의 성기를 만졌다. 이를 본 동기가 석현 씨에게 괜찮으냐고 물으면 본인의 잘못이니 괜찮다고 돌렸다고 한다.
왕고는 석현 씨를 무자비하게 구타하기도 했다. 하루는 왕고가 석현 씨에게 이종격투기를 제안했다. 석현 씨는 내키지 않았지만 이에 응했고, 이겼다. 키 183cm에 몸무게 100kg이 넘는 거구인 데다 석현 씨는 평소 농구나 축구 등에 운동신경도 있었다. 그러자 왕고는 주먹과 발로 무자비하게 석현 씨를 구타했다. 이를 본 동료는 “장난이 아니라 진짜로 누군가와 싸울 때처럼 욕하면서 때렸다. 사회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면 경찰을 부를 일”이라고 증언했다. 이때의 구타가 석현 씨가 첫 면회 때 다리를 절면서 가족을 만난 이유였다.
홍석현 상병이 가족들과 찍은 생전 사진. 키 183cm, 몸무게 100kg 거구였던 홍 상병은 항상 웃는 얼굴에 쾌활한 사람이었다. 군대에서 성추행과 폭행 등을 겪고 난 뒤 조현병을 얻었다. 사진=이종현 기자
2008년 11월, 안동의 부대가 통폐합되면서 석현 씨는 부산의 부대로 전속됐다. 전속 6일 만에 바로 해안 소초에 투입됐다. 근무 환경이 급작스럽게 바뀌면서 스트레스가 심했다. 저녁 7시에 근무를 나가 다음 날 6시까지 겨울 바닷바람과 싸워야 했다. 소초에 바로 투입되면서 예정됐던 가족 면회도 밀렸다. 외박이나 휴가도 제한됐다.
그래도 잘 버텨내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부산으로 온 지 딱 50여 일이 지난 시점에서 석현 씨는 이상 증세를 보였다. 증상은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로 뚜렷했다. 2009년 1월 16일 석현 씨는 대대장 면담에서 “소초에서 성추행이 있었다”거나 “권 일병(당시 휴가 중)을 소초에서 봤다”는 등의 말을 하고, “나오라는 형의 목소리가 들린다”며 생활관 2층에서 뛰어내리려고 했다. 함께 있던 동료가 석현 씨를 붙들어 사고를 면할 수 있었다.
석현 씨는 당시 갈굼과 폭행을 관심으로 인식하기도 했다. 석현 씨는 소초장 면담에서 “내가 실수해도 화를 내거나 욕해주는 사람이 없는 걸 보면 나를 따돌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석현 씨를 정신 감정한 조서은 가천대 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임상 조교수는 성추행, 폭행, 폭언 등 내재해 있던 석현 씨의 트라우마가 급격한 환경 변화를 맞아 조현병 증상으로 표출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대대장에게 연락이 와서 석현이를 만나러 갔어요. 석현이가 대대장실로 들어오는데 벌써 눈이 다 풀렸더라고. 애가 대대장한테 경례도 안 하고. 불러도 대답도 안 하고. 눈이 갔더라고. 참, 말도 잘하고 자유분방하던 애인데… 그때 대대장이 했던 말이 있어요. ‘아버님, 병원에 데려가 보세요. 근데 전역하고 싶어서 저렇게 꾀부리는 애들도 있으니 잘 한번 살펴보세요’라고. 자존심이 확 상하더라고요.”
홍기문 씨는 휴가를 받아 데려 나온 아들을 삼성서울병원 정신과에서 세 차례 진료 받게 했다. 진단명은 조현양상장애였다. 조현병 진단은 증상이 6개월 이상 지속해야 내릴 수 있다. 6개월 전까진 조현양상장애 진단을 받는다. 홍기문 씨는 아들이 집중 치료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휴가를 연장해달라고 부대에 요청했다. 아들은 일주일 휴가를 받아온 상태였다. 일주일 더 연장됐지만 그 이상은 규정상 어렵다고 했다. 그렇게 석현 씨는 적절한 약물치료를 받지 못하고 부대로 복귀했다.
부대에선 석현 씨에게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상급 병원에 보내기는커녕 ‘영창’을 보냈다. 복귀한 뒤 석현 씨의 조현병 증세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부대에선 석현 씨를 환자가 아닌 관심병사 취급했다. 각 부대의 관심병사들이 모이는 ‘비전캠프’에 17일 동안 보내기도 했다. 그러던 2009년 4월, 석현 씨는 부대원 가운데 유일하게 절친하게 지내던 동료를 폭행했다. 코를 두 대 가격했다. 갈등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TV프로그램 이야기, 연예인 이야기 등 시시콜콜한 얘기를 하던 중이었다. 조현병 증상이었다. 부대에선 석현 씨를 두고 영창 15일 조처했다.
영창에서 복귀한 석현 씨는 1대대에서 6대대로 전속됐다. 이후 석현 씨를 위로하러 가족들이 부산으로 내려간 것이 2009년 4월 25일 토요일이었다. 사고는 다음 날 발생했다. 1박 2일 외박을 나온 둘째 아들은 그럭저럭 가족들과 대화를 이어갔다. 그때만 해도 아들이 점점 회복되고 있는 것 같아 반색했다. 그래서 했던 말이 ‘잘 이겨내라’는 충고였다.
“돌이켜보면 후회되는 지점이 참 많죠. 제가 군대를 일찍 가라고만 안 했어도…. 마음의 병이었는데 몰라줬어요.” 아들 석현 씨 얘기를 하며 눈시울을 붉히는 아버지 홍기문 씨. 사진=박현광 기자
“돌이켜보면 후회되는 지점이 참 많죠. 제가 군대를 일찍 가라고만 안 했어도…. 마음의 병이었는데 몰라줬어요. 10년 넘게 석현이는 우리 가족 대화에서 금기어처럼 됐었어요. 다들 자기 탓을 하면서 속을 끙끙 앓는 거예요. 큰 애는 자리를 비운 자기 탓하고, 석현이 엄마는 오죽하겠어요. 아내는 아직까지 정신과 치료 다니면서 약을 먹어야 잠을 자요.”
홍기문 씨는 사건 현장에서 최대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유방암 수술을 받은 직후였던 아내 걱정도 앞섰다. 스스로 목숨을 저버린 아들이었다. 아들 석현 씨 책임이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부대에 귀책사유를 묻지 않겠다는 확인서를 쓰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뒤론 부산과 관련된 일은 일절 손대지 않았다. 무엇이 아들을 죽음으로 몰고 갔는지 문득 궁금하기도 했지만 최대한 바쁘게 살았다.
“그러다가 2년 전에 우연히 라디오를 듣는데,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 얘기가 나오더라고요. 고상만 사무국장이 나와서 얘기를 하는데 자해사망도 부대 귀책사유가 있다면 순직이 된다고 하는 소리를 듣고, 아내 몰래 위원회에 진정을 넣었어요. 우편물도 다 형님 집으로 오게 하고. 그래서 나온 게 이번 결정이에요. 정말 감사하죠. 사실 아들 얘기를 어느 모임엘 가도 못 했는데, 이젠 군대에서 사고가 나서 현충원에 있다고 얘기할 수 있죠. 아내도 얘길 듣더니 참 감사하다고 울더라고요.”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는 입대 전 정신적으로 건강했고 정신질환 관련 가족력이 전혀 없던 석현 씨가 입대 후 구타·가혹행위·성추행 트라우마와 소초 경계 등의 정신적·육체적으로 힘든 직무 수행을 하며 직접적으로 병을 얻었고, 적절한 부대 관리를 받지 못해 결국 사망해 이르렀다고 판단했다. 위원회는 석현 씨의 사망구분을 ‘순직’으로 변경하길 국방부에 권고했고, 국방부는 이를 받아들였다.
홍석현 사건을 담당한 손민균 조사관은 “망인이 심각한 정신적 문제가 있는 것을 알면서도 부대에선 망인을 병원 치료를 받게 하는 것이 아닌 영창을 보낸 것이 안타깝다. 조현병은 약물 치료가 굉장히 중요한데, 적절한 치료만 병행됐더라도 호전됐을 가능성이 크다”며 “군 의료 서비스, 특히 정신질환에 대한 서비스가 개선됐으면 한다”고 전했다.
1950년 군 창설 이래 비순직 처리된 사망군인은 3만 9000여 명에 달한다. ‘개인적 사유’에 의한 자해 사망인 경우가 상당하다. 이들은 국립묘지에 묻힐 수 없었다. 대통령 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이인람)는 2018년부터 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부대 내 구조적 원인을 찾아내 순직 처리로 이끄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는 2019년 9월 13건의 의문사를 진상규명한 뒤 매월 성과를 내고 있다. 일요신문에서 진상규명된 사연을 연재한다. |
박현광 기자 mua12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