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은 살인누명을 쓰고 21년 5개월을 복역한 ‘낙동강변 2인조’ 장동익, 최인철 씨만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시간이 세 평 남짓한 교도소에 갇혔을 때, 이들을 남편과 아들로 둔 사람들의 시간도 멈춰 섰다. 7월 16일, 낙동강변 살인사건 재심(형사1부 이흥구 부장판사) 세 번째 증인신문에 2인조의 가족들이 증인으로 출석했다.
이번 낙동강변 2인조 스물여섯 번째 이야기는, 기자가 낙동강변 2인조를 처음 만난 2016년부터 최근까지 그들을 만나고 인터뷰하며 쓴 기록과 재심 증인신문을 종합해 재구성했다.
낙동강변 2인조 살인사건 수사기록. 사진=진실탐사그룹 셜록 제공
#사랑하는 당신께
동익 씨의 아내 박성희(가명) 씨는 남편을 처음 봤던 ‘123다방’을 아직도 또렷이 기억한다. 직장 동료들과 늘 함께 다녔던 다방이었지만 그날은 혼자 앉아있었다. 같은 곳에서 일하고 있었어도 제대로 얼굴 한 번 보지 못했던 남자를 소개 받기로 한 날이었다. 어색하고 긴장도 됐지만 자꾸 설렌 웃음이 나왔다.
그때 동익 씨가 들어왔다. 주변을 한참 두리번거리더니 구석 자리에 앉았다. “나를 못 본 걸까.” 멀리서 그를 응시하며 눈치를 줬는데도 반응이 없었다. 성희 씨는 직접 그에게 다가가 팔을 끌어 자리로 데려왔다.
통성명을 하고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지만 동익 씨는 좀처럼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소리가 들리는 쪽을 열심히 바라보는 것 같은데, 눈동자는 자꾸만 다른 곳을 향했다. 성희 씨는 모른 체했지만 그때 알았다. “이 남자, 눈이 잘 안 보이는구나.”
동익 씨를 만나는 날이 많아지면서 그의 눈 상태가 생각보다 더 심각하단 걸 알았다. 정확히 알게 된 건 동익 씨 친구들과 함께 계곡에 놀러갔을 때였다. 돌무더기 위를 걷는데 동익 씨만 자꾸 넘어졌다. 다리에 파란 멍이 들고 피가 나는데도 그는 웃기만 했다. 넘어지면 괜히 물을 떠 마시면서 “아 시원하다” 하거나 손을 씻는 척했다. 그러면서도 성희 씨를 보고 “괜찮냐, 젖지 않았냐”고 했다.
성희 씨는 그런 그가 싫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아 하고, 그래서 잘 보이고 싶어 하는 게 눈에 보였지만 귀여웠다. 불편한 자신보다 나를 먼저 챙기는 모습이 좋았다. 성희 씨도 동익 씨 옆을 지켜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1989년, 둘은 결혼했고 딸을 낳았다. 넉넉하지 않은 살림이었지만 둘은 사랑하고 있었고 또 사랑받고 있었다. 성희 씨는 이만하면 행복하다 했다.
그러나 그 행복은 정확히 2년 만에 허공에 흩어졌다. 1991년 11월 8일 밤, 저녁밥을 짓고 있는데 누군가 바깥에서 남편의 이름을 불렀다. “여보, 나 잠깐 다녀올게.” 그게 마지막 말이었다. 어디로 갔는지도 모를 남편은 밥이 식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가로등도 없는 시골집 바람 소리가 그날따라 더 무섭게 들렸다. 성희 씨는 딸을 업고 문고리를 붙든 채 새벽을 맞았다. 그 시간 남편이 부산사하경찰서에서 1년 전 발생한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몰려, 거꾸로 매달린 채 물고문을 당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 건 나중 일이다.
성희 씨가 장동익 씨에게 보낸 편지. 코 앞에까지 종이를 가져와야만 글을 읽을 수 있는 남편을 위해 큰 글씨로 편지를 썼다. 편지 마지막은 “여보, 사랑해요. 영원히.”로 끝난다. 사진=장동익 씨 제공
경찰 조사 과정에선 남편을 딱 한 번밖에 보지 못했다. 조사 중이라는 이유로 그를 보여주지 않았다. 성희 씨가 남편을 볼 수 있게 된 건 경찰 수사가 마무리되고 검찰에 송치된 이후였다. 검찰 조사를 마치고 포승줄에 줄줄이 묶여 호송차에 오르는 짧은 순간, 사람들 틈에 섞여 까치발을 들고 남편의 얼굴을 찾아야만 했다. 그마저도 둘은 서로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동익 씨는 앞이 잘 보이지 않았고, 성희 씨는 남편을 발견하기만 하면 등을 돌렸다. 그녀는 업고 있는 딸을 보여주며 안부를 묻는 대신 같은 말만 반복했다. “여보 우리 딸 여깄어! 우리 딸 여깄어! 제발…”
동익 씨에게 무기징역 확정 판결이 내려지고, 면회도 자유로워졌지만 성희 씨는 그때도 남편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고 말한다. 눈물이 쏟아져 내려 앞이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5년 뒤, 동익 씨는 성희 씨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좋은 사람 찾아봐.” 언제 나갈 수 있을지 모르니 조금이라도 젊고 예쁠 때 얼른 다른 사람 찾아 가라는 뜻이었다.
짧은 말을 마친 동익 씨는 유리벽 너머 아내를 바라보기만 했다. 눈동자는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성희 씨는 이날 가장 많이 울었다. 동익 씨가 교도소에서 이혼 서류를 받아들고 봉투가 젖어 찢어질 때까지 놓지 않았다는 말을 들은 것 역시, 나중 일이다.
#어머니의 유품
기자가 낙동강변 2인조를 처음 만난 날, 두 사람은 분홍색 보따리를 건넸다. 때 묻은 매듭을 푸니 수백 장에 달하는 두툼한 서류 뭉치가 나왔다. 노랗게 물들어 잘못 만지면 금방 부서질 것만 같았다. 한 장 한 장 넘길수록 진한 피냄새가 났다. 낙동강변 살인사건 수사기록과 공판기록이었다. 동익 씨는 “엄마가 남겨주셨다”고 말했다.
엄마의 이야기는 동익 씨의 동생 성익 씨가 했다. 엄마가 하루아침에 살인자가 된 동익 씨를 바라볼 때, 성익 씨는 엄마 뒤를 지켰다. 형이 교도소에 있을 때 분홍색 보따리를 맡아둔 것도 성익 씨였다. 동익 씨는 출소할 때까지 이 기록들이 남아있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과거 수사기관의 조작과 위법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엄마가 남긴 분홍색 보따리는 낙동강변 2인조 재심이 개시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장동익 씨 어머니가 남긴 분홍색 보따리. 낙동강변 사건 수사기록과 공판기록이 들어있다. 사진=진실탐사그룹 셜록 제공
엄마가 동익 씨 시력에 대해 알게 된 건 그가 초등학교 4학년에 올라갔을 때다. 선생님의 말을 듣고 엄마는 깜짝 놀랐다. 동익 씨 눈이 잘 보이지 않는 것 같단 말이었다. 동익 씨는 글자가 점점 흐릿하게 보인다고 했다. 자리를 한 칸씩 앞으로 옮겨봤지만 소용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혼자 학교 가는 일도 버겁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6학년 교과서를 받아둔 날, 엄마는 동익 씨를 학교에 보내지 않기로 했다.
엄마는 동익 씨를 데리고 부산 전역의 안과와 한의원을 다녔다. 점을 보기도 했고, 유명한 뜸쟁이가 있다고 해서 서울까지 올라가 쑥뜸을 받기도 했다. 그래도 시력은 점점 나빠져 가기만 했다. 원인은 시신경 위축이었다. 2020년 현재도 치료가 불가능 한 일종의 유전병이다.
동익 씨 외삼촌, 이모, 외사촌, 그리고 성익 씨까지 모두 시력이 좋지 않았다. 엄마 쪽 유전이었다. 엄마는 괴로워했다. 당신 때문에 아들의 앞날이 어두워졌다며 자책했다. 엄마가 짙은 한숨과 함께 담배연기를 뿜어낸 건 유전이란 사실을 알게 된 이후부터다.
동익 씨가 스무 살이 되던 해, 오랜만에 엄마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부산에 최초로 ‘안은행’이 있는 병원이 들어섰다. 엄마는 동익 씨와 성익 씨 손을 붙잡고 병원에 달려갔다. 안구를 이식하면 될 것 같았다. 병원이 처음 생겼으니, 혹시 동익 씨에게 ‘맞는 눈’이 없으면 엄마 걸 주겠다고 했다. “엄마는 좋은 거 많이 보고 살았으니까, 이제 안 봐도 괜찮아.” 이렇게 말하면서도 엄마는 기뻐했다.
장동익 씨와 어머니, 아버지. 동익 씨는 유리에 얼굴을 가까이 해야만 엄마 얼굴을 볼 수 있다. 사진=진실탐사그룹 셜록 제공
병원을 나온 엄마는 다시 속 깊은 곳에서 연기를 뿜어냈다. 뇌와 눈을 연결하는 신경에 문제가 있어 안구를 교체해서 해결되는 일이 아니라는 설명을 들었다. 버스를 타지 않고 집까지 걸었다. 엄마가 앞장섰고 그 뒤엔 동익 씨와 성익 씨가 따라 걸었다. 성익 씨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동익 씨와 성익 씨는 그날 엄마가 뿜어내는 연기의 냄새를 ‘사람 속 타들어가는 냄새’라고 표현한다.
결혼을 하고 손녀를 낳아 분가한 아들이 살인범이 됐다는 건 뉴스를 보고 알았다. 엄마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경찰서로 달려갔지만 아들을 볼 수 없었다. 며느리와 함께 검찰 호송차에 오르는 아들을 보며 “엄마 여기 있다”만 외치는 일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우리 아들은 그런 짓을 할 수가 없다”고 외쳤지만 경찰관도, 검사도, 판사도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엄마가 탄원서를 쓰면 성익 씨가 법원과 다른 국가기관, 방송사, 신문사에 보냈다. 수십 장을 써냈지만 돌아오는 답은 모두 같았다. “재판이 진행 중이라서 도와드리기 어렵겠습니다.” “확정 판결이 내려져서 불가능합니다.”
엄마가 수사기록을 모으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다. 변호사 사무실과 검찰청, 법원을 오가며 한 장, 한 장 모으기 시작했다. 기록을 줄 수 없다는 답변을 받으면 호통도 치고 소란을 피우기도 했다. 엄마가 서류를 받아오면 성익 씨가 복사를 해왔고, 엄마는 그걸 분홍색 보따리에 묶어 전국을 다니면서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호소했다. 그 기간만 10년이다.
엄마는 세상을 떠나면서 눈을 감지 않았다. 마지막 날까지 동익 씨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성익 씨는 엄마가 분홍색 보따리를 들고 늘 해왔던 말을 떠올렸다. “기록 꼭 남겨놔야 한다. 동익이 억울한 거 풀어줘야 하니까. 지금은 아무도 몰라줘도 나중엔 알아주는 사람이 있을 거다.”
성익 씨는 이사를 다닐 때도, 다른 지역으로 일을 하러 갈 때도 보따리는 꼭 챙겨뒀다. 전국을 떠돌았던 엄마의 유산 분홍색 보따리는, 마지막으로 현재 재심을 진행 중인 박준영 변호사에게 전달됐다. 엄마는 아들에게 눈을 주진 못했지만 꼬인 삶을 새롭게 살 수 있는 기회를 남겼다.
낙동강변 살인사건 수사기록. 사진=진실탐사그룹 셜록 제공
#가족을 지킨 아내
“니는 살인자 마누라다. 니 이런 데서 마이(많이) 굴러먹었나.” 최인철 씨의 아내 정숙기 씨는 1991년 검찰청에서의 일을 잊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그때의 기억이 너무나도 또렷이 남아 다른 기억들을 지웠다.
검찰은 숙기 씨에게 부산 엄궁동 낙동강변 도로에서 한 여성이 살해된 1990년 1월 4일 새벽에 남편이 어디에 있었는지, 피 묻은 옷을 입고 오지 않았는지 캐물었다. 숙기 씨는 그날 남편과 함께 대구 친정집에 갔다고 했고, 옷에 피를 묻히고 들어올 일도 없다고 말했지만, 돌아온 건 욕설과 호통뿐이었다.
아침 일찍 검찰청에 들어섰지만 점심이 지나가도 도돌이표 같은 말은 반복됐다. 수사관이 “배 안고프나. 짜장면 하나 무라(먹어라)”며 그릇을 건넸지만 숙기 씨는 젓가락에 손이 가지 않았다. 그런데 옆에 있던 세 살 딸이 그 짜장면을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숙기 씨는 그날 그 황망한 장면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정숙기 씨. 사진=진실탐사그룹 셜록 제공
그날 오후, 검찰은 숙기 씨 손에 수갑을 채웠다. 검사 앞에서 거짓말을 했다는 이유였다. 숙기 씨는 함께 있던 딸이 어디로 갔는지, 집에 남아있던 큰아들은 어떻게 됐는지 모른 채 부산 구치소에서 6개월을 보냈다. 최인철 씨는 같은 구치소 남자사동, 숙기 씨는 여자사동에 수감됐다.
출소 이후 친척집에서 맡아두고 있던 두 아이를 찾아왔다. 막막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다. 숙기 씨는 그때부터 악착같이 일을 했다. 부산 명지동에서 일당을 받으며 밭일을 했고, 품앗이를 하면서 밥을 먹었다. 김 양식장과 항구에 나가 바닷일도 했고 공장에도 다녔다. 평일엔 일을 하고 쉬는 날이면 왕복 8시간 거리에 있는 최인철 씨를 면회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숙기 씨의 몸은 점점 작아졌다. 뼈가 삭고 염증이 생겼다. 살이 빠지고 살짝만 부딪혀도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는 멍이 들었다. 병원 응급실에 실려가는 일은 이제 연례행사다. 숙기 씨는 이제 막 예순이 지났지만, 신체 나이는 그보다 더 약해졌다.
숙기 씨는 7월 16일 재심 재판부가 증인 신문을 마치고 “더 할 이야기가 있느냐”는 질문에 별다른 답을 하지 못했다. 그는 “속에 꽉 메어있어서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제는 눈물도 말라서 나오질 않는다. 누가 작은 소리로 불러도 깜짝 놀라고, 무슨 일이 생기면 늘 불안에 떤다”고 말했다. 21년 동안 가족을 지켜왔던 숙기 씨를 이제는 최인철 씨가 정성스레 돌보고 있다.
성희 씨는 딸 결혼을 계기로 만나게 된 동익 씨와 다시 함께하고 있다. 증인 신문 내내 눈물을 보였던 그는 “딸을 생각하면 너무나도 억울하다”고 했다. 당시 두 살이었던 딸이 지금은 서른한 살이 됐다며 너무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성희 씨는 남편 대신 시어머니가 키운 딸을 보기 위해 몰래 학교에 찾아 가거나 살며시 다가가 1000원 한 장을 건네주곤 했던 일을 떠올렸다. 성희 씨는 재판부를 향해 “우리 딸한테 따뜻한 아빠가 되는 걸 보고 싶다”며 “우리 남편 구해주세요”라고 말했다.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던 성익 씨는 변호사가 갑작스레 꺼낸 분홍색 보따리를 보고 큰 소리를 내고 울었다. 보따리가 엄마라는 생각에 말을 잇지 못했다고 했다. 그는 “과거의 수사기관, 법원과 다르게 이 수사기록을 제발 한 번만이라도 꼼꼼히 봐달라”고 말했다.
가족 증인신문을 모두 마친 박준영 변호사는 재판부에게 인사했다. 박 변호사는 “재심 재판은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일 외에도 청구인들과 그 가족들에게 치유의 시간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가족들이 그동안의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줘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