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이창 하사의 사촌형 곽상복 씨의 말이다. 곽 하사는 사건 발생 직전 휴가를 나와 사촌형 집을 찾아와 이틀을 묵고 갔다. 당시 동원 예비군 훈련을 받고 있었던 상복 씨는 곽 하사가 다녀간 사실을 집에 와서야 알았다. 휴대전화가 없어 서로 소식을 곧장 주고받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형수, 다음엔 맛있는 거 사 올게요”라며 웃으며 복귀했다는 곽 하사는 그 길로 돌아오지 않았다. 상복 씨는 사촌동생의 마지막을 배웅하지 못한 게 못내 마음에 걸렸다. 그렇게 40년이 흘렀다.
곽이창 하사 사촌 형 곽상복 씨는 곽 하사의 마지막을 배웅하지 못한 게 40년 내내 마음에 걸렸다. 곽 하사는 헌병대 조사를 견디다 못해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사진=박현광 기자
“내가 친형 매한가지지. 이창이가 친형님이 있는데, 그때 그 형님이랑 집안 사정으로 한 20년 떨어져 있었어요. 그니까 내하고 더 가깝지 이창이가. 이창이 어머니, 그러니까 나한테는 큰어머니지, 내가 가면 꼭 ‘상복아 니밖에 없다. 우리 불쌍한 이창이 제발 원혼을 풀어 좋은 데로 보내줘라’라고 손 꼭 잡고 얘기하고 그랬지, 울면서. 자기 아들한테도, 남편한테도 말 안해. 아무한테도 얘기 안 하고 꼭 내한테만 말했거든.”
휴가를 마치고 부대에 복귀한 곽이창 하사는 1980년 8월 27일 M16 소총을 목에 들이댄 뒤 스스로 방아쇠를 당겼다. 사단 헌병대에서 부대원을 폭행했다는 혐의로 조사받던 중이었다. 조사 8일째 되던 날이었다.
곽 하사는 애초 병사로 입대했다. 1978년 7월 입대해 1년 뒤인 1979년 9월 부대의 추천과 자신의 지원으로 하사로 임관했다. 곽 하사는 곧바로 최전방인 GP(비무장지대 감시초소) 분대장으로 배치됐다. 당시 중대장에 따르면 곽 하사는 평소 “성격이 괄괄하면서 급하고 욱한 성격”이면서 동시에 “책임감도 강하고 임무를 주면 앞장서서 솔선수범하고 병사들을 잘 다스리는 모범적인 분대장”이었다.
휴가를 다녀온 뒤 1980년 8월 15일 광복절이었다. 당시 부대원이 경계 근무를 마친 뒤 안전검사를 하지 않고 생활관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곽 하사는 해당 부대원을 폭행했다. 경계 근무 때 실탄을 지니고 다니는 GP에선 총기 안전검사가 필수다. 민감한 사안이었다. 해당 부대원은 곽 하사에게 말대꾸하며 반항했고, 이를 본 같은 부대 소대장이 역기봉으로 엉덩이를 때리는 등 해당 부대원에게 다시 물리력을 가하기도 했다.
해당 부대원 신고로 곽 하사와 부대 소대장은 보안부대에 끌려가 폭행 사실에 관한 조사를 받았다. 이후 곽 하사와 소대장은 1980년 8월 20일 사단 헌병대로 이첩됐다. 조사는 쉽게 끝나지 않았다. 구금 8일째 되던 1980년 8월 27일 아침 9시, 헌병대 당직 책상 옆 임시보호실에서 조사를 받던 곽 하사는 당직 하사가 근무 교대 과정에서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당직 책상 서랍에서 탄창을 빼냈다. 실탄 15발이 들어있었다. 그 길로 눈에 보이는 생활관이나 들어가 M16 소총을 꺼내 들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탄창을 결합하고선 방아쇠를 당겼다.
“‘2기 군의문사위원회’가 꾸려졌다 하대예. 인터넷을 할 줄을 몰라 가지고, 손으로 내가 다 써서 우편으로 올려보냈다 아닙니까. 주변에선 친동생도 아니고 사촌동생인데 뭐 하러 그렇게까지 하느냐고 하고, 우리 아들도 속 시끄럽게 이런 거 하지 말라고 하길래 그 뒤론 가족 중에 아무한테도 말 안 했어요. 혼자 서울도 가고요. 아직 이창이 친형한테도 말 안 했어요.”
상복 씨가 지칭한 2기 군의문사위원회는 대통령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였다. 사촌형의 진정을 접수한 위원회 역시 장기간 구금의 불법성 여부와 조사 과정의 폭언·폭행·가혹행위를 중점을 두고 이 사건을 조사했다.
보안부대의 체포 과정과 헌병대의 구금 절차는 위법했다. 곽 하사 앞으로 발부된 체포 영장과 구속 영장은 없었다. 당시 군인에 관한 형사적 절차를 정하고 있던 법률인 군법회의법의 247조 “현행범인은 누구든지 영장 없이 체포할 수 있다”고 정하고 있다. 하지만 같은 법에선 현행범인을 “범인으로 호칭되어 추적되고 있는 자, 장물이나 범죄에 사용되었다고 인정함에 충분한 흉기 기타의 물건을 소지하고 있는 자, 신체 또는 의복류에 현저한 증적이 있는 자, 누구임을 물음에 도망하려 한 자”라고 정의하고 있는데, 곽 하사가 보안부대에 체포될 당시 현행범인으로 보기는 어려웠다. 현행범으로 판단해 긴급체포했다고 하더라도 같은 법 243조에 따라 구속을 연장하기 위해선 구속한 때로부터 최대 72시간 이내에 구속 영장을 발부받아야 했다. 곽 하사는 구속 영장 없이 8일 동안 불법 구금된 셈이다.
친동생처럼 여기던 사촌동생 곽 하사를 40년 동안 가슴에 품고 살던 곽상복 씨는 대통령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가 발족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필로 곽 하사의 사연을 써서 진정했다. 사진=박현광 기자
“물론 이창이가 폭행은 했지만, 부대원을 때렸다고 해서 8일 동안이나 조사를 받았다는 게 이상하다 아닙니까. 이창이는 농고를 나와서 바로 부모님 농사일 도왔기 때문에 대학에서 데모나 학생운동 이런 것도 안 했는데예. 안타깝지요. 휴가 나오면 노가다 해서 엄마한테 용돈 주고 들어가던 앤데…. 아휴, 그 시절엔 헌병대 끌려가면 맞으면서 조사받고 하는 게 왜 없었겠어요.”
위원회는 위 같은 사실 등을 미뤄 불법 구금과 가혹행위가 곽 하사의 직접적인 사망 원인이라고 결론지었다. 위원회는 “곽 하사가 불법적으로 구금되어 수사 받던 가운데 구타와 가혹행위를 당했다고 보이고, 폐쇄된 공간에서 24시간 감시를 받음으로 인해 상당한 공포와 절망감을 느꼈을 것이라 보인다. 장시간 구금상태가 지속돼 극도의 육체적, 정신적 고통과 더불어 수사 과정에서의 인격적인 모독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결국 자해사망에 이르렀다고 보인다”고 판단했다. 이에 위원회는 국방부에 곽이창 하사의 순직을 권고했고, 현재 국방부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
“결정을 받아보고선 눈물이 나대예. 큰어머니 생각도 나고요. 지난해에 돌아가셨거든요. 돈 보고 한 거 아니라예. 직계존속이 없어서 보상이 없다는 말을 듣고 시작한 겁니다. 고작 몇 푼 때문에 분란 일으키면 곤란하다 아닙니까. 이제 현충원에 이창이 비석 하나 놨으면 싶습니더.”
1950년 군 창설 이래 비순직 처리된 사망군인은 3만 9000여 명에 달한다. ‘개인적 사유’에 의한 자해 사망인 경우가 상당하다. 이들은 국립묘지에 묻힐 수 없었다. 대통령 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이인람)는 2018년부터 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부대 내 구조적 원인을 찾아내 순직 처리로 이끄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는 2019년 9월 13건의 의문사를 진상규명한 뒤 매월 성과를 내고 있다. 일요신문에서 진상규명된 사연을 연재한다. |
박현광 기자 mu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