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기 대선 ‘예비고사’인 내년 4월 서울·부산 시장 보궐선거가 여전사들 맞대결로 치러질 공산이 커졌다. ‘미투(나도 당했다)’ 파동이 이번 보선을 잡아당긴 만큼, 여당도 야당도 ‘여성 후보를 내세워야 한다’는 물밑 기류가 강하다. 위세 당당한 여풍 움직임에 ‘박주민 변수’도 사라졌다. 당권파 친문(친문재인) 박주민 의원조차 여성 후보 공천론이 일자, 당권 도전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러나 여전사 맞대결이 현실화할지는 미지수다. 여당 무공천 논란을 비롯해 야권발 정계개편 등 넘어야 할 산도 많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7월 22일 국회에서 열린 정치·외교·통일·안보에 관한 대정부 질문에서 답변하고 있다. 사진=박은숙 기자
여권의 여성 후보 공천론은 ‘위기 돌파용 승부수’다. 현재 더불어민주당 전략 카드인 여성 공천 후보자(서울시장)의 양대 축은 추미애 법무부 장관(5선)과 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 장관(4선)이다. 더불어민주당 시절부터 대표적인 매파(강경파)였던 추미애·박영선 장관은 일찌감치 차기 서울시장 유력한 후보군으로 꼽혔다. 다만 선택지 범위에선 차이가 난다. 추 장관은 차기 대선 직행 등 운신의 폭이 비교적 넓다. 반면 박 장관의 차기 행로는 오는 2022년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출마 이외에 마땅치 않다. 바꿔 말하면, 박원순 유고 변수 이후 ‘추미애 카드’가 급부상했다는 얘기다.
추 장관이 정치적 입지 확대를 노리는 정황은 곳곳에서 포착됐다. 매개물은 ‘훈수 정치’다. 윤석열 검찰총장과 사즉생 대결을 펼치던 추 장관은 부동산 대란 정국이 한창인 7월 18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부동산과 금융을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정청이 일주일 동안 오락가락한 개발제한구역(그린벨트)에 대해서도 “해제에 반대한다”고 했다. 추 장관은 그린벨트 논란의 종지부를 찍은 7월 20일 주례회동 다음 날에도 “부동산이 서민의 인생을 저당 잡는 경제시스템은 일찍이 토건 세력이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비판했다. 사실상 함구령을 내린 정세균 총리 시그널에도 추다르크(추미애+잔다르크)는 거침없이 진격했다.
당 안팎에선 추 장관 행보를 놓고 ‘법무부 장관 이후’를 염두에 둔 사전 포석이라는 분석이 제기됐다. 민주당 한 중진 의원도 “법무부 장관이 왜 그린벨트를 논하느냐”라고 우려감을 감추지 못했다. 당 내부 분위기도 “나가도 너무 나갔다”는 반응이 주를 이뤘다. 앞서 추 장관이 취임 직후 인사권을 고리로 윤 총장을 압박했을 때도 당 일각에선 차기 서울시장을 노리는 행보라는 말이 끊이지 않았다. 진보 논객인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는 추 장관의 부동산 발언 후 “서울시장에 나올 모양”이라고 비꼬았다. 보수진영에서도 폭격을 가했다. 서울시장 하마평에 오른 권영세 통합당 의원은 “참 한심한 분”이라고 힐난했다. 재출마 가능성이 제기된 오세훈 전 서울시장도 “금부 분리? 참으로 희한한 ‘듣보잡 이론’”이라고 비난했다.
추 장관이 최전선에서 이슈를 전방위로 훑고 있다면, 박 장관은 튀는 행보 없이 중소벤처기업부 수장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부동산 정국에서 박 장관이 관련 발언을 한 것은 7월 16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대한민국 동행세일 브리핑 직후 기자들의 ‘다주택 처분’ 질문에 “팔아야겠죠”라고 말한 게 전부다. 박 장관은 거주 중인 서울 서대문구 단독주택 이외에 배우자 명의의 종로구 오피스텔과 일본 도쿄 아파트를 보유하고 있다. 이 중 오피스텔에는 시부모가, 도쿄 아파트에는 배우자가 각각 거주하고 있다.
로우키 행보를 이어가는 박 장관도 여성 후보 공천 카드를 마다할 이유는 없다. 그는 2011년 10·26 보선에 이어 2018년 6·13 지방선거 때도 서울시장에 도전장을 낸 바 있다. 최근에는 박 장관이 물밑에서 보폭을 넓히고 있다는 말도 들린다. 박 장관의 전 보좌관은 “박영선의 서울시장 플랜은 오래전부터 구상됐다”라고 귀띔했다. 박 장관 역시 서울시장에 대한 권력 의지가 강하다는 의미다.
문제는 당내 반발이다. 여권의 여성 후보 공천 전제조건은 ‘전략 공천’에 대한 합의다. 민주당 역사상 차기 대권의 급행열차인 ‘서울시장’ 후보자를 전략 공천을 한 사례는 없다. 앞서 민주당은 4·15 총선 때도 ‘여성 후보자 30% 공천’을 공언했지만, 끝내 목표 달성에 실패했다. 7월 14일에는 당 최고위원 여성 30% 할당제를 도입하지 않기로 전격 결정했다. 한 여성 의원은 “전당대회준비위원회 내 견해차가 컸다”며 “특히 일부 남성 의원들이 반대 의견을 강하게 표출했다”고 했다. 이해찬 대표도 여성 30% 할당제에 대해 ‘당 운신의 폭이 좁아진다’는 이유로 부정적인 의견을 제시한 것으로 전해졌다. 박원순 유고 이후 ‘여성 후보자를 내자’는 아이디어는 이해찬 지도부에도 공유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내년 4월 보선에서 현실화할지 물음표인 이유도 이 때문이다.
대권 행보의 날개를 단 이재명 경기도 지사가 불 지핀 ‘무공천 압박’도 넘어야 할 산이다. 이 지사가 야권이 공세를 펴는 무공천을 건드리자, 최대 경쟁자인 이낙연 민주당 의원은 “왜 벌써 끄집어내느냐”라며 정면충돌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추미애·박영선 장관이 최상의 카드인지도 불분명하다. 매파 성향 두 의원은 극렬 지지층과 함께 안티 세력도 많은 정치인이다. 문 대통령 지지도가 이른바 ‘조국 사태’ 이후 최저 수준으로 떨어진 상황에선 강성 후보만으로 외연 확장을 꾀할 수 없다. 더불어 86(80년대 학번·60년대 생)그룹 핵심인 우상호 민주당 의원과 임종석 대통령 외교안보 특보 등 남성 서울시장 후보군도 언제든지 새로운 카드로 부상할 수 있다.
나경원 전 의원. 사진=임준선 기자
민주당과는 달리, 통합당의 숨통은 트여 있다. 서울시장 후보자로는 4선의 나경원 전 의원과 3선의 이혜훈 전 의원 등이 거론된다. 나경원 이혜훈 전 의원은 4·15 총선 때 서울 동작을과 동대문을에 출마, 45.0%와 43.8%의 득표율로 낙선했다. 이들이 여성 후보 공천의 혜택을 입는다면, 박원순·오거돈의 미투 의혹을 적극적으로 활용, 여권의 아킬레스건을 집요하게 파고들 것으로 보인다.
20대 국회에서 보수의 여전사 대표 격으로 불렸던 나 전 의원은 최근 동작구 남성역 인근 ‘즐거운 정치·법률 교실’ 사무소를 개소했다. 이곳은 통합당 동작구 의원의 합동사무실과 같은 장소다. 정치적 퇴장에 명확히 선을 긋고 재기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한 셈이다. 나 전 의원은 법무법인 ‘일호’의 고문변호사에도 이름을 올렸다. 일호는 김용남 전 통합당 의원이 대표로 있는 법무법인이다. 나 전 의원이 정치적 재개를 위한 발판을 마련함에 따라 ‘나경원 카드’에 대한 보수진영 러브콜은 계속될 전망이다.
부동산 정국에서 이혜훈 전 의원은 각종 인터뷰에 얼굴을 내밀며 ‘경제통 강점’을 십분 활용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한 이 전 의원은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 로스앤젤레스캠퍼스(UCLA)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전 의원은 한 라디오에 출연,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에 대해 “집 없는 사람은 사지 말라는 얘기”라고 비판했다. 보수진영에선 나경원 이혜훈 전 의원 외에 민선 7기 구청장 중 유일한 통합당 소속인 조은희 서초구청장도 서울시장 후보군에 포함됐다.
통합당의 변수는 문 대통령 레임덕(권력누수) 가속화와 야권발 정계개편이다. 보선 정국에서 문 대통령 지지도의 심리적 마지노선(40%)이 무너진다면, ‘통합당 독자 노선론’이 부상할 수밖에 없다. 이 경우 보수 정계개편 핵인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의 등판 가능성은 사라질 가능성이 크다. 동시에 여성 후보 공천도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다. 미투 아킬레스건을 건들지 않아도 이길 수 있어서다. 오세훈 전 시장부터 김용태 홍정욱 전 의원,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등으로 서울시장 후보군이 이동할 수 있다는 관측도 이 지점과 맞물려 있다.
서울시장과는 달리, 부산시장은 통합당 소속인 이언주 전 의원을 제외하고는 유력한 후보군이 없는 상태다. 국회 한 보좌관은 “부산은 여성 정치인의 무덤”이라고 말했다. 실제 21대 총선 직전까지 부산 지역구 국회의원은 김희정 전 새누리당 의원이 유일했다. 지난 4·15 총선에서도 부산 지역 18명 중 여성 당선자는 통합당 소속인 김미애(해운대을) 황보승희(중구영도) 의원 등 두 명에 불과했다. 민주당에선 친문계인 배재정 전 의원과 최지은 외신대변인 등이 줄줄이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이런 이유로 민주당에선 김영춘(국회 사무총장) 카드가, 통합당에선 김세연(전 의원) 카드가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윤지상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