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수들의 회동은 정의선 수석부회장의 ‘배터리 투어’가 중심이었다. 정 부회장은 지난 5월 삼성SDI 천안 사업장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의 만남을 시작으로 LG화학 오창공장에서 구광모 LG그룹 회장, SK이노베이션 서산 배터리 공장에서 최태원 SK그룹 회장을 잇따라 만났다. 각 총수들은 각종 행사 등 공식석상에서 정 부회장과 만난 적이 있지만, 그룹 내 배터리 ‘생산 기지’에서 단독으로 회동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수석부회장이 삼성, SK, LG그룹 총수들을 각각 만나 전기차 배터리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오른쪽부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수석부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사진=연합뉴스
#무르익는 동맹 분위기 속 깔린 치밀한 계산
4대 그룹이 의기투합해 하나의 ‘작품’이 탄생할 것이란 기대감이 높다. 그러나 재계에선 회동의 배경엔 각자의 치밀한 계산이 깔려 있다고 분석한다. 먼저 현대차의 경우 최근 2025년까지 전기차 판매량 100만 대, 글로벌 시장점유율 10% 이상 달성이라는 공격적인 목표를 세웠다. 정의선 부회장이 총수들과의 만남을 주도한 것은 앞서의 계획대로 사업이 진행될 경우, 내년부터 큰 폭으로 늘어날 수밖에 없는 배터리 물량에 대비해서다.
현대차그룹은 현대모비스와 LG화학의 합작사인 HL그린파워를 통해 배터리팩을 생산하고 있다. 그러나 물량을 대폭 늘릴 현대차가 앞으로도 LG화학에만 의존할 경우 큰 틀에서 두 가지 불안요소를 배제할 수 없게 된다. 배터리 확보 과정에서 공급 차질이 생길 경우 전기차 생산 라인 전체가 흔들릴 수 있고, 관련 사업 주도권도 세계 점유율 1위인 LG화학 쪽으로 쏠리게 된다는 점이다. 최근 현대차는 차세대 전기차용 플랫폼 E-GMP 1차 물량에 SK이노베이션 배터리를, 2차 물량에는 LG화학 배터리를 각각 탑재하기로 했지만 앞서의 불안요소가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다. 현대차 입장에선 안정적인 외부 공급을 위해선 거래처를 늘려야 한다.
현대차그룹은 또 배터리 3사 외에 다른 대기업 그룹사들과도 협력관계를 맺고 있다. 한화그룹과 현대중공업그룹, 두산퓨얼셀, 이마트 등과 배터리 분야부터 넓게는 미래 모빌리티를 아우르는 MOU(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이번 배터리 협력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면 현대차그룹이 연결고리가 돼 미래 모빌리티 분야 협력 관계가 배터리 3사를 넘어 더욱 확대될 수 있다. 그만큼 재계에서 현대차그룹의 역할과 비중이 커진다.
배터리 공급사들 입장에선 현대차그룹과의 협력이 절실한 상황이다. 판매량 기준, 현대차는 현재 전기차 시장에서 세계 5위 수준이고 향후 3위 수준까지는 끌어 올리겠다고 선언한 만큼 손을 잡지 않을 이유가 없다.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은 일본, 중국, 유럽 등 해외 기업들과도 시장 주도권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아직까지 배터리 시장 점유율이 후순위인 후발주자 삼성SDI에게도 우량 고객인 현대차그룹과의 협력은 더할 나위 없는 기회다.
정부가 추진하는 ‘한국판 그린 뉴딜’ 정책도 각 그룹사 협력의 핵심 배경으로 통한다. 복수의 정부 및 재계 관계자에 따르면, 지난해 말부터 배터리 협력 방안을 두고 정부와 4대 그룹 간의 교감이 있었다. 정부 핵심 관계자가 4대 그룹 고위 임원을 따로 불러 “공동으로 차세대 배터리 개발을 해달라”며 구체적인 요청을 했다. 이와 관련, 재계 관계자는 “그린 뉴딜 정책에 4대 그룹이 협력하는 모습을 보이면 정부도 전폭적인 지원 ‘보따리’로 화답하게 될 것”이라며 “그러나 반대로 협력이 원할하지 않을 경우 적지 않은 압박을 받게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 7월 14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한국판 그린 뉴딜 종합대책’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배터리는 그린 뉴딜 3대 정책 가운데 두 번째인 그린에너지의 핵심 분야다. 사진=연합뉴스
#기술유출 우려, 불편한 이해관계 해소돼야
그룹 총수들이 직접 협력 방안을 논의한 만큼 큰 틀에서 사업은 원활히 진행될 전망이다. 다만 세부적으로 풀어야 할 숙제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현재 거론되는 협력 방안은 크게 두 가지다. 각 그룹사가 동등한 위치에서 하나의 ‘작품’을 만드는 방안과 함께 현대차와 배터리 3사가 각각 협력하는 방안이다.
현대차는 어떤 형태로든 배터리만 안정적으로 공급받으면 되는 ‘갑’의 위치에 있지만, ‘을’이 될 수밖에 없는 배터리 3사들의 선택은 조심스럽다. 개별적으로 현대차와 협력하게 되면 경쟁을 벌여야 하고, 협력사를 설립하면 배터리 시장의 생명인 기술 유출을 우려해야 한다. 배터리 업계 한 관계자는 “세계적으로도 완성차 업체와 배터리 업체가 합작사를 설립할 때는 기술 유출을 원천 차단하는 방안을 심도 있게 고민한다”며 “현재 4대그룹이 아무리 좋은 취지로 협력한다고 해도 이 문제에선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고 말했다.
특히 기술 유출 문제에서 가장 불편한 건 LG화학이다. 지난해 4월 영업비밀 및 특허 침해로 SK이노베이션을 미국 ITC에 제소했다. 기술력과 지적재산권을 지키려는 취지라는 것이 LG화학 입장이다. 지난 2월 SK이노베이션의 증거인멸 정황 등을 이유로 조기패소 예비 판결이 내려져 승기를 잡았다.
배터리 동맹 분위기가 무르익으면서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있는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의 배터리갈등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오는 10월로 예정된 ITC의 최종 판결이 내려지면 SK이노베이션은 배터리 관련 부품소재에 대한 미국 내 수입이 금지되는 등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된다. 그 전에 합의를 하면 최악의 상황까지는 막을 수 있다.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은 지난 4월부터 극소수의 관계자들만 참여해 협상을 벌이고 있지만 현재까지 접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배상액 규모가 걸림돌이다. LG화학은 ‘책임 있는 수준’을 요구하고 있는데, 업계에선 그 수준이 조 단위에 달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SK이노베이션은 ‘톱다운’ 형식으로 화해를 하고 배상액은 추후에 논의하자는 입장이지만 이 제안에 대해 LG화학은 시큰둥한 것으로 전해진다. 오히려 LG화학은 지난 7월 14일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 SK이노베이션을 상대로 산업기술유출 방지 및 보호에 관한 법률,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에 관한 법률 등 위반 혐의로 고소장을 냈다. LG화학 관계자는 “신속히 사실관계를 규명해달라는 취지”라고 말했다.
공교롭게도 LG화학이 고소장을 접수한 날은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 영빈관에서 ‘한국판 그린 뉴딜 종합계획’을 발표한 날이다. 이 때문에 각 그룹사들의 세부적인 ‘이해관계’ 문제가 풀리지 않을 경우 4대그룹의 ‘동맹’은 쉽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배터리 업계에선 현대차그룹이 일단 배터리 3사와 각각 협력하는 방식을 추진할 것으로 보고 있다. LG화학과는 공동으로 지분을 투자해 인도네시아에 배터리 합작사 설립을 추진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SK그룹과는 배터리 외에 SK하이닉스와 SK텔레콤의 차량용 반도체, 5G 이동통신 등 분야에서 자율주행차 기술 공동개발 가능성이 높다. 삼성SDI는 전기차 산업의 ‘게임체인저’로 불리는 전고체 배터리 기술을 갖고 있지만 상용화까진 시간이 더 필요하다. 때문에 전장, 반도체, 디스플레이 분야 등에서 먼저 협력할 것으로 점쳐진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