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감형이지 40개월 형량을 포함해 2년 보호관찰, 2만 달러(약 2400만 원) 벌금형 등 모든 형을 감면했기 때문에 사실상 사면과 다를 바 없었다. 이에 민주당은 물론이요, 공화당 내부에서도 비난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대통령이 직접 사법권에 개입한 사례라고 비난하고 있는 정치권 인사들은 미국 역사상 최악의 부패 행위라며 맹공을 퍼붓고 있다.
그렇다면 트럼프가 이런 비난을 무릅쓰고 스톤의 족쇄를 풀어준 이유는 과연 뭘까. 이에 대해 미국 언론들은 재선을 코앞에 둔 트럼프의 다급함이 깔려 있다고 보도하면서 오는 11월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스톤의 정치 전략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트럼프의 남자’ 로저 스톤의 사면을 두고 워싱턴 정가가 시끄럽다. 지난해 11월 7일 연방법원에 출석한 로저 스톤. 사진=AP/연합뉴스
트럼프의 40년 지기 측근인 스톤이 뮬러 특검팀에 체포된 이유는 지난 2016년 대선 당시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 후보와 민주당 전국위원회(DNC)의 이메일 해킹 사건과 연관이 있다. 이는 클린턴과 DNC의 이메일 수천 건이 해킹돼 폭로 전문 사이트인 위키리크스를 통해 공개된 사건으로, 국무장관 시절 개인 이메일을 사용했다는 의혹을 받은 클린턴에게는 상당한 악재로 작용했다.
이와 관련, 미 정보당국은 이메일을 해킹하고 이렇게 해킹한 자료를 위키리크스에 넘긴 배후에 러시아 정보기관이 있다고 믿고 있었고, 뮬러 특검팀은 여기에 트럼프 대통령과 그의 비선 참모인 스톤이 연루됐는지, 그리고 이들이 위키리크스의 계획을 사전에 알았는지 등을 추적해 왔다. 스톤이 러시아 정보요원들과 접촉하고 위키리크스와도 연락을 주고받았다는 게 검찰의 주장이었다.
실제 스톤은 대선 당시 위키리크스의 폭로를 미리 예측하는 트윗을 연달아 올렸기 때문에 이런 의혹을 사기에 충분했다. 가령 “줄리안 어산지는 적당한 시점에 클린턴에게 치명적인 내용을 폭로할 것”이라고 말했는가 하면, “내 예측이 분명 맞을 것이다”라고 재차 확신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위키리크스와 스톤 모두 서로 접촉한 적이 없다고 부인했지만 ‘디애틀랜틱’에서 입수한 트위터 메시지는 그렇지 않았다. 또한 스톤은 트럼프 캠프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인 샘 넌버그에게도 “어산지와 저녁 식사를 함께 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스톤은 후에 농담이었다고 주장하면서 발을 뺐다.
결국 스톤은 트럼프 캠프의 러시아 스캔들과 관련된 조사 과정에서 위증한 혐의로 기소됐으며, 지난 2월 징역 3년 4월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당시 판결에 대해서도 한차례 논란이 일었다. 본래 검찰은 징역 7~9년의 중형을 구형했지만 트럼프가 트위터로 “매우 끔찍하다”고 불만을 표출하자 이를 의식한 듯 담당 판사가 검사의 구형은 지나치다고 말하면서며 40개월 징역형을 선고해 버린 것이다. 이에 담당 검사들이 집단 사임하고 1000여 명의 법무부 전직 관리가 법무부 장관의 사퇴를 요구하면서 한바탕 소동이 빚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수감 직전 트럼프가 스톤을 자유의 몸으로 풀어주면서 스톤을 둘러싼 특혜 논란은 또 다시 불거진 상태다. 지난 7월 10일, 백악관은 성명을 통해 “스톤은 좌파와 언론이 수년간 합세해서 만들어온 ‘러시아 사기극’의 희생양이다. 스톤은 이제 자유인이다”라고 발표했다.
그가 갑자기 이렇게 풀려나자 여기저기서 비난이 쇄도했다. ‘뉴욕타임스’는 논평을 통해 “리처드 닉슨도 감히 못했던 일을 트럼프가 했다!”고 비꼬았는가 하면, 민주당 대선 후보인 조 바이든 전 부통령은 트위터를 통해 “트럼프는 미국 현대 역사상 가장 부패한 대통령이 됐다”라고 비난했다. 그런가 하면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은 “충격적인 부패행위”라는 성명을 발표했으며, 공화당 내 반트럼프파로 분류되는 미트 롬니 상원의원은 “전례 없는 역사적인 부패”라는 내용의 트위터를 올렸다.
그렇다면 트럼프가 이렇게 비난과 만류에도 불구하고 무리수를 둔 이유는 뭘까. 이에 대해 미국 언론들은 “재선을 앞둔 트럼프가 선거운동 경험이 많은 스톤의 전술과 지도가 간절히 필요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이와 관련, 한 측근은 ‘폴리티코’를 통해 “트럼프는 강해 보이길 원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코로나19 대응 실패로 지지율이 하락하고 있는 상황에서 핵심 지지층을 결집시키려는 의도라는 것이다. 실제 스톤은 사면 후 가진 언론 인터뷰에서 “앞으로 트럼프의 재선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하겠다”라는 의지를 밝히기도 했다.
트럼프와 스톤의 막역한 관계는 40년 동안 지속돼왔다. 1980년대 중반부터 트럼프의 개인 정치고문 역할을 해왔던 스톤은 스스로 ‘스톤의 법칙’이라고 부르는 룰에 따라 트럼프의 정치 전략을 구체화했다. 가령 “(잘못을) 인정하지 말 것, 모든 것을 부정할 것, (공격을 당하면) 반격할 것” 등과 같은 전술이 대표적이다. 또한 ‘무명보다는 차라리 악명 높은 게 낫다’는 말은 그의 정치철학을 관통하는 신념 가운데 하나다.
스톤이 트럼프를 처음 만난 것은 1980년이었다. 당시 로널드 레이건 대선후보 캠프에서 뛰었던 스톤은 레이건 고문이었던 로이 콘을 통해 트럼프를 소개 받았다. 둘은 여러 면에서 궁합이 잘 맞았다. 이에 스톤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당시 30대의 젊은 개인 사업가였던 트럼프는 레이건 캠프에 막대한 금액을 후원하기도 했다.
레이건이 당선된 후 정치 컨설턴트로 더욱 광폭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던 스톤은 그때 알게 된 젊은 공화당원인 폴 매너포트와 찰스 블랙과 함께 정치 컨설팅 및 로비 업체인 ‘블랙, 매너포트 앤 스톤’사를 설립했다. 정치 스타일이 비슷했던 셋은 이기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공격적인 로비 활동을 펼치기로 유명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막대한 부를 쌓았고, 곧 워싱턴 정가의 거물로 자리매김했다.
로저 스톤은 1988년부터 끊임없이 도널드 트럼프에게 대선 출마를 권유했다. 1999년 트럼프와 스톤의 모습.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겟 미 로저 스톤’에 따르면, 그저 부동산 갑부였을 뿐 정치와는 무관한 아웃사이더였던 트럼프를 워싱턴으로 이끌었던 인물이 바로 스톤이었다. 스톤은 “트럼프를 처음 봤을 때 나는 말을 찾아 헤매는 기수가 명마를 발견한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그의 눈에 트럼프는 타고난 대중 선동가였으며, 이미 준비된 대선 후보였다.
이에 스톤은 1988년부터 끊임없이 트럼프에게 대선 출마를 권유했다. 하지만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했던 트럼프는 10년 넘게 고민만 거듭했다. 그리고 1998년, 마침내 트럼프는 구체적인 행동을 취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이에 트럼프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스톤에게 자신의 전기를 대신 써줄 ‘미국에서 가장 훌륭한 글쟁이’를 찾아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99년, 트럼프는 개혁당으로 당적을 옮긴 후 대통령 출마를 모색했고, 스톤을 대선출마 준비위원회 위원장으로 발탁했다. 하지만 트럼프가 레이스 도중 사퇴하면서 첫 번째 대선 도전은 그렇게 마무리됐다.
둘의 관계가 항상 좋았던 것은 아니다. 마치 부부싸움을 했다가 화해하길 되풀이하는 부부처럼 둘은 40년 동안 수없이 가까워졌다 멀어지기를 반복했다. 가령 트럼프는 2008년 ‘뉴요커’ 인터뷰에서 “스톤은 항상 자신이 하지도 않은 일에 대해 공로를 인정받으려고 한다”면서 그의 역할을 경시하기도 했다.
트럼프가 다시 대선에 도전한다는 소문이 돌았던 2011년에도 그랬다. 당시 워싱턴에 떠도는 출마 소문에 대해 스톤은 ‘폴리티코’를 통해 “트럼프가 다시 대선에 출마하려고 한다는 내부 정보를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트럼프는 이를 부인하면서 “스톤은 나를 대변하는 사람이 아니며, 공식적인 선거운동 고문도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그러면서 “스톤의 아첨성 발언을 대단히 고맙게 생각하긴 한다”고 덧붙였다. 실제 트럼프는 당시 공화당에 재입당하면서 결국 대선에 출마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2015년, 트럼프가 다시 대선 출마를 고려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고, 이를 증명하듯 스톤도 트럼프의 선거캠프에 합류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트럼프는 얼마 안 가 다시 스톤을 해고해버렸다. 스톤을 가리켜 ‘관종(Publicity Seeker)’이라고 부르면서 내친 것이다. 하지만 늘 그랬듯 둘은 얼마 안 가 다시 화해했다. 비록 공식 참모는 아니었지만 스톤은 배후에서 계속 트럼프의 선거운동을 도우면서 킹메이커로서의 역할을 다했고, 트럼프는 수시로 스톤에게 전화를 걸어 조언을 구했다.
스톤은 선거 기간 동안 링 밖에서 벌이는 풀뿌리 운동을 통해 비공식적으로 트럼프를 도왔다. 가령 개인 이메일로 중요한 안보 사항을 주고받아 국가안보를 위험에 빠뜨렸다는 이유로 클린턴을 감옥에 보내야 한다는 ‘힐러리를 가둬라(Lock Her Up)’ 캠페인을 앞장서 주도하기도 했다.
이에 화답하듯 트럼프는 당시 한 인터뷰에서 스톤을 향해 “매우 충성스럽고 멋진, 좋은 사람”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그리고 스톤이 캠프를 떠난 지 몇 달 만에 트럼프는 스톤의 측근인 매너포트를 선대본부장으로 영입했다. 일부 보도에 따르면 이는 스톤의 적극적인 추천에 따른 것이었다.
당시 스톤은 트럼프를 대통령에 당선시키기 위해 평생 갈고 닦아온 정치적 책략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트럼프 승리의 견인차 역할을 했던 ‘러스트벨트’ 지역의 백인 표심을 얻어야 한다는 판단하에 선거 전략을 짠 것도 그였으며, ‘더러운 사기꾼’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공격적이고 저돌적인 방법을 내세워 캠프를 진두지휘했다. 이를테면 공화당 경선에서는 경쟁 상대들에 대한 흑색선전을 거침없이 퍼부었으며,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출생지 의혹을 다시금 수면 위로 끄집어내 민주당을 공격하기도 했다.
선거 과정 중 최대 위기였던 성추문 스캔들에서 트럼프를 구한 것 역시 스톤이었다. 당시 여성을 비하하는 저속한 표현이 담긴 녹취 테이프가 공개돼 궁지에 몰렸던 트럼프를 구하기 위해 스톤이 사용한 방법은 시선 돌리기였다. 얼마 후 열렸던 트럼프와 클린턴의 2차 TV 토론회에서 과거 빌 클린턴을 성추행 혐의로 고소했던 여성들을 방청석 맨 앞줄에 앉도록 한 것이었다. 당시 이 모습을 본 클린턴이 당황했던 것은 물론이며, 이 전략은 TV를 시청하던 유권자들로 하여금 트럼프 성추문 스캔들을 잊게 만드는 데도 성공했다.
사정이 이러니 트럼프가 재선을 위해 스톤이 필요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 ‘뉴욕타임스’는 “이번에 트럼프가 사면을 통해 스톤을 구출해 냈지만, 스톤이 과연 은혜를 갚을 수 있을까는 미지수”라고 말하면서 “그의 비열한 속임수가 더 이상 통할지는 분명하지 않다”라고 지적했다.
무엇보다 선동을 하는 데 있어 탁월한 수완을 발휘하는 그의 솜씨가 이번에는 코로나19로 인해 효과를 발휘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소셜미디어를 통해 여론을 조작하는 데 있어 전문가지만 사실상 모든 주요 플랫폼에서 현재 그의 활동은 금지된 상태다. 가령 페이스북은 그의 은밀한 가짜 계정 네트워크를 발견한 후 삭제해 버렸다.
과연 남은 3개월 동안 스톤은 다시 한 번 킹메이커로서의 역할을 해낼 수 있을까. 이번에는 어떤 식의 전략을 내세워 승부수를 띄울지 워싱턴을 비롯한 전세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닉슨에 미친 악랄한 승부사 로저 스톤이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닉슨의 1972년 재선 운동을 도우면서였다. 그는 등에 닉슨의 얼굴을 문신으로 새겨 놓았다. 사진=넷플릭스 ‘겟 미 로저 스톤’ 워싱턴 정가에서 정치 컨설턴트인 로저 스톤에 대한 평은 엇갈리고 있다. 뛰어난 정치 전략가라며 그의 능력을 치켜세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기기 위해서 온갖 비열한 수단을 동원하는 사기꾼이자 협잡꾼이라며 비난하는 사람도 있다. 이탈리아와 헝가리계 이민자 출신 부모 밑에서 자란 스톤은 어려서는 부모의 영향을 받아 민주당의 존 F. 케네디를 지지했다. 그의 정치수완 능력은 이미 여덟 살 때부터 나타났다. ‘워싱턴포스트’ 인터뷰에서 스톤은 “당시 학교 식당을 돌아다니면서 모든 아이들에게 ‘닉슨은 토요일에도 학교에 나가는 걸 좋아한대. 그러니까 닉슨이 당선되면 토요일마다 학교에 나와야 돼’라고 말하고 다닌 기억이 있다”라고 말하면서 “그때가 내가 처음으로 정치수완을 발휘했던 때다”라고 회상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케네디가 아니라 닉슨의 1972년 재선 운동을 도우면서였다. 청소년 시절 보수주의 관련 책을 읽고 닉슨에게 흠뻑 빠진 그는 그 길로 ‘닉슨광’이 됐다. 심지어 등에 닉슨의 얼굴을 문신으로 새겨 놓았으며, 중요한 순간마다 양팔을 들어올려 ‘V자’를 그려 보이는 닉슨의 제스처를 모방하기도 했다. 19세 때 닉슨 재선 캠프에서 선거 보좌관으로 일하면서 정치에 발을 들인 그는 그때부터 이미 악랄한 수법으로 승리를 쟁취하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가령 공화당 내 강력한 경쟁자였던 피트 매클로스키를 낙마시켰던 방법이 그랬다. 당시 스톤은 ‘청년사회주의연합’을 대표해서 매클로스키에게 기부금을 전달했는데, 문제는 이 단체의 성격에 있었다. 이 단체는 사실 좌파 정치인들을 지지하고 베트남 전쟁을 열렬히 반대하는 곳이었다. 기부금을 전달한 후 스톤은 언론에 이 소식을 슬쩍 흘렸다. 매클로스키가 사회주의자들과 함께 한 침대를 쓰는 것 같은 인상을 주기 위해서였다. 그의 이 전략은 성공했고, 닉슨은 무난히 경선에서 승리했다. 이후 대선에서 스톤은 공화당 요원을 고용하여 당시 민주당 대선 후보였던 조지 맥거번의 선거캠프를 감시하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결국 그는 워터게이트 사건에 연루돼 비자금을 받은 혐의로 법정에 섰으며, ‘워터게이트 사건 최연소 연루자’라는 불명예를 안게 됐다. 스톤은 평소 자신이 닉슨을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 “그의 불멸성과 회복력 때문이다. 여자들은 그런 것을 좋아한다”라고 말한 바 있다. 현재 플로리다주 오클랜드 파크에 있는 그의 저택에는 그의 이런 충성심을 나타내듯 닉슨 기념품을 전시해놓은 방이 따로 있다. |
김민주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