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현진은 KBO 리그 시절 한화의 내리막을 경험하며 암흑기 에이스로서 설움을 톡톡히 겪었다. 사진=일요신문DB
삼미 슈퍼스타즈는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부터 태평양 돌핀스 시절이던 1988년까지 7년간 포스트시즌 무대를 밟지 못했다. 창단 2년째인 1983년에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 재일교포 투수인 장명부는 그해 전체 100경기 가운데 60경기(선발 44경기)에 출장해 427⅓이닝을 던지면서 30승을 올렸다. 평균자책점은 2.34. 현대 야구에선 눈으로 보고도 믿기 어려운 숫자들이다.
첫 해 15승 65패로 승률 0.188을 기록했던 삼미는 전체 승수의 58%를 책임진 장명부의 활약 덕분에 52승 1무 47패(승률 0.525)로 반등했다. 전기리그 2위, 후기리그 3위라는 감격적인 순위를 받아 들었다. 그러나 장명부 혼자 힘으로는 팀을 정상으로 올리기에 역부족이었다. 장명부의 어깨가 식자 이듬해 삼미는 다시 나락으로 떨어졌다.
손민한은 4년 연속 최하위를 이어가던 롯데 자이언츠가 ‘8888’ 행진(8개 구단 체제였던 2001~2004년)을 멈추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투수다. 그는 2005년 28경기(선발 26경기)에 출전해 18승 7패 평균자책점 2.46을 올렸다. 다승과 평균자책점 1위에 등극했다.
롯데는 에이스의 위용을 앞세워 조금씩 승수를 늘려 갔지만, 결국 5위로 시즌을 끝내 포스트시즌 출전 기준이던 4강 문턱에서 멈췄다. 손민한은 프로야구 출범 이후 최초로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지 못한 팀 소속으로 정규시즌 최우수선수(MVP)를 수상한 선수가 됐다. 비록 가을야구는 하지 못했어도, 손민한이 롯데 팬들에게 ‘영원한 에이스’로 남게 된 계기였다.
류현진(토론토 블루제이스)은 공교롭게도 한화 이글스 암흑기의 시작을 함께한 에이스다. 입단 직후인 2006년과 2007년에는 포스트시즌 무대를 밟았다. 그러나 입단 당시 함께했던 쟁쟁한 선배들이 모두 은퇴하거나 기량이 떨어진 2008년부터는 류현진이 ‘소년 가장’ 역할을 해나가기 시작했다. 탈삼진 왕에 오른 2009년, 팀이 최하위에 머물면서 무려 12패를 떠안은 게 그 증거다.
KBO 리그 마지막 시즌인 2012년도 불운했다. 류현진은 그해 27경기에 선발 출장해 182⅔이닝을 던지면서 평균자책점 2.66을 기록했다. 그러나 승수는 9승. 10승을 채우지 못했다. 통산 100승을 완성하려던 그의 희망은 단 2승이 모자라 불발됐고, 7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 기록도 무산됐다. KBO 리그 마지막 등판에서는 정규이닝을 넘어 연장 10회까지 1실점으로 막아내고도 결국 시즌 열 번째 승리를 손에 넣지 못한 채 마운드를 내려왔다. 류현진은 그렇게 메이저리그(MLB)로 떠났다.
배영은 중앙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