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명숙 전 총리, 이계안 전 의원 |
지난 4월 27일 국회 정론관. 민주당 서울시장 예비후보인 이계안 전 의원은 기자회견을 마치고도 분이 풀리지 않은 듯 기자들에게 한숨 섞인 푸념을 늘어놨다. 당과 한 전 총리가 경선을 무력화하기 위한 ‘암묵적’ 짬짜미를 하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나마 그 경선이란 것도 사실상의 ‘인지도 조사’에 불과한 ‘100% 여론조사’ 방식임을 감안하면 TV토론이라도 받아내야 덜 억울하다는 것이었다. 이 전 의원은 “만약 한 전 총리가 끝까지 TV토론을 거부하면 ‘무소속 출마’도 불사할 수 있다”는 엄포를 놓기도 했다.
서울시장 경선 방식을 둘러싼 민주당 내부 진통이 심화되고 있다. 지방선거를 한 달여 남긴 시점까지 후보 선출을 못하는, 그야말로 파행적 상황이다. ‘쉬운 게임’을 원하는 한 전 총리와 ‘명분 있는 패배’를 원하는 이 전 의원 측 감정싸움 때문이다.
한전 총리 측은 곽영욱 전 대한통운 사장 뇌물수수 의혹 사건의 1심 재판 승소 판결 후 민주당으로부터 ‘명예로운 추대’를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민주당 역시 전략공천을 통해 ‘한명숙 바람’을 일으켜 지방선거 구도를 ‘정권심판’으로 몰고 간다는 계산이었다. 하지만 천안함 사건이 터지면서 ‘한풍’이 주춤거렸고, 한나라당 서울시장 예비후보들의 치열한 경선 레이스와 이 전 의원의 집요한 경선 요구로 서울시장 선거 전략은 큰 폭의 궤도 수정이 불가피한 상황이 됐다.
하지만 당 지도부에 “경선이 한 전 총리의 본선 경쟁력을 해치는 방식이어선 안 된다”는 점에 공감대가 형성됐고, 그런 기류 속에 ‘100% 여론조사’ 경선이 등장했다. 여태껏 여론조사만으로 경선을 치른 지역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경선 아닌 경선’을 치르고 싶었던 지도부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였다.
기존 후보들의 반발은 불문가지. 또 다른 경선후보였던 김성순 의원은 “차라리 한 전 총리를 전략공천하라”며 후보직을 사퇴했고, 홀로 남은 이 전 의원은 “TV토론 보장과 ‘시민공천배심원제 50%+여론조사 50%’ 경선 실시”를 요구하며 제동을 걸고 나섰다. 이 전 의원은 “배심원제가 개혁공천을 위한 제도라며 침이 마르도록 주장하던 386 의원들은 도대체 어디로 갔느냐”며 정세균 대표와 측근 386들을 겨냥했다.
내내 침묵을 지키던 한 전 총리도 입을 뗐다. 한 전 총리는 “이 후보는 TV토론뿐 아니라 경선방식 전체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면서 “후보 간 협상을 통해 정하면 소모전으로 갈 수 있으므로 당이 결정해야 한다”며 당에 책임을 넘겼다.
상황이 악화되자 양측의 갈등은 고질적인 주류·비주류 간 다툼으로까지 확전되는 양상이다. 비주류 측은 “아무리 한 전 총리라도 경선 형식은 갖춰야 하는 법”이라며 이 전 의원을 거들고 나섰다. 주류 측도 “경선전이 격화될수록 본선 경쟁력이 약화된다”며 ‘한명숙 보호론’으로 맞섰다.
비주류 그룹인 ‘쇄신모임’ 소속 의원들은 연쇄 회동을 갖고 “모든 후보에게 공정한 기회를 줄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나섰다. 공동대표인 이석현 의원은 “한나라당이 TV토론을 네 번 하면서 유권자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며 “한 전 총리가 토론을 왜 기피하는지 이해가 안 간다”고 말했다. 지난 4월 28일 열린 당무위원회에서도 이들 의원들은 “경선 붐을 일으키는 데 가장 효과적인 TV토론을 여당도 아닌 야당이 거부하고 있는 것을 언제까지 방관할 것이냐”며 지도부를 압박했다.
지도부도 반격에 나섰다. 박주선 최고위원은 한 라디오 방송 프로에 출연해 “최고위에서는 경선방법만 결정하지 TV토론이나 경선일자를 따지는 건 당 선거관리위에서 후보자들과 합의를 통해 결정할 문제”라고 반박했다.
이런 가운데 양측은 지난 4월 29일 중앙당 선거관리위원회의 중재 아래 첫 접촉을 갖고 경선 일정 및 방식에 대한 협상을 가졌다. 당 선관위는 ‘물리적 여건’을 감안해 ‘5월 4일까지 경선 실시·100% 여론조사 경선’이라는 원칙을 재확인했고, 양측 역시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이튿날인 30일 오후 이 전 의원과 공천심사위원장인 이미경 사무총장이 회동해 경선일을 오는 5월 6일로 연기하는 데 합의했다. 이에 따라 TV토론은 방송일정이 맞지 않아 사실상 무산됐다.
양측의 쟁점은 ‘거친’ 경선이 한 전 총리의 본선 경쟁력에 도움이 되는지 여부다. 주류 측은 이 전 의원에 대한 ‘안 좋은 추억’을 거론한다. 2006년 열린우리당 서울시장 경선에서 당시 잘나가던 강금실 후보를 이 전 의원이 몇 번의 TV토론을 통해 ‘생채기’를 내면서 본선 경쟁력을 떨어뜨렸다는 ‘혐의’다. 주류 측 한 핵심관계자는 “2006년에도 이 전 의원의 경선 요구로 강 후보와 체육관 경선을 했지만, 선거 흥행엔 도움도 안 되고 강 후보의 약점만 드러냈다는 평가가 많았다”고 주장했다. 여기엔 한 전 총리가 재판 준비 등으로 서울시정 학습에 물리적 시간을 투입할 여력이 없었다는 현실적 고민도 깔려 있다. “본선을 준비해야 하는 상황에서 (당 경선에 쏟을) 시간이 많지 않다”(임종석 캠프 대변인)는 게 이 같은 고민을 대변한다.
비주류 측은 말도 안 된다는 반응이다. 약점이 있으면 경선을 통해 미리 ‘예방주사’를 맞는 게 옳지 않느냐는 것이다. 서울시장 선거에 나서는 첫 현직시장인 오세훈 시장의 ‘내공’을 감안할 땐 더 더욱 준비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한 재선 의원은 “오 시장이 오랜 시정 경험과 각종 정보를 갖고 선거에 임할 텐데 도대체 어쩌려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우려했다.
이런 연유로 당 일각에선 한 전 총리의 ‘콘텐츠’에 대한 의구심도 증폭되고 있다. 당의 한 관계자는 “총리 재직시에도 별다른 정책능력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얘기까지 돌고 있다”며 “한 전 총리가 토론에 소극적일수록 이 같은 소문과 평가는 점점 더 힘을 얻게 돼 본선에서도 부담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양원보 세계일보 기자
wonbosy@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