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전 영화 ‘신세계’로 ‘부라더 케미’를 보여줬던 황정민-이정재가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에서는 추격자와 암살자로 분해 생사를 건 추격전을 벌인다. 사진=CJ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는 청부살인을 업으로 삼는 암살자 인남(황정민 분)이 마지막 살인을 끝낸 직후, 태국에서 발생한 충격적인 납치 사건이 자신과 관계되는 일임을 알게 되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태국 내 카르텔 조직, 그들과 결탁한 부패 경찰들을 피하기만도 벅찬 상황에 인남의 마지막 청부살인 피해자의 형제이자 이 영화 최고의 ‘광기‘를 보여주는 레이(이정재 분)의 난입으로 상황은 더 잔혹하고 복잡해진다. 청소년 관람불가 딱지를 피하기 위해 잔인한 장면에 포커스를 직접 맞추는 것은 필사적으로 자제하고 있지만, 레이가 일을 저지를 때마다 영화관에 들이차는 사운드만으로도 이 영화의 잔혹성을 충분히 입증하고도 남는다.
어디선가 봤음직한 스토리 라인이라든지, 오마주인지 패러디인지 아리송한 캐릭터나 시퀀스가 관객들의 고개를 갸웃하게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접어두고 영화에 몰입할 수 있는 것도 레이의 덕이 크다. 그가 등장하자마자 이해가 되지 않던 극중의 모든 사건사고들이 한 번에 받아들여지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극중에서조차 비정상적인 인물이 다른 캐릭터들과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순간부터 이 영화는 관객들의 심오한 이해를 구하고 있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되는 탓인지도 모른다.
극중 이정재는 자신의 형제를 인남(황정민 분)의 손에 잃고 그를 추격하는 광기어린 도살자 ‘레이’ 역을 맡았다. 사진=CJ엔터테인먼트 제공
이정재는 레이에 대해 “스타일리시한 액션을 구사한다”고 평가한 바 있다. 강렬한 영화 속에 더 강렬한 캐릭터를 만들어내야 한 만큼 이제까지 해본 적 없던 캐릭터 스타일링에 관여까지 했다는 게 그의 이야기다. 감독과 배우의 수차례 시행착오를 거쳐 만들어낸 레이는 확실히 독특한 캐릭터로 추격전 영화사에도, 이정재의 필모그래피에도 뚜렷한 족적을 남길 것으로 기대된다.
이처럼 거리낄 게 없어 자유롭고, 그래서 더 잔인해질 수 있는 스타일리시한 악역 캐릭터는 종종 대중들의 불필요한 애정이나 동경을 받는 일이 있었다. 다행히도 이정재의 레이는 앞의 두 가지는 갖췄지만, 독특한 패션 스타일은 호불호가 심하게 갈릴 것이란 점에서 이 같은 불상사(?)는 피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방콕의 무더위 속에서도 꿋꿋이 포기하지 않는 화이트 롱 코트는 그의 비정상적인 성향을 더욱 뚜렷하게 만든다.
레이는 추격자라기 보단 미치광이 도살자에 가까운 캐릭터다. 계획이 있어 목표물을 쫓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내 앞에 있기 때문에 쫓는 짐승 같은 본능에 충실한 면모를 보여준다. 깊이 감상하고 싶다면 레이의 등장 신마다 주목할 것을 추천하고 싶다. 이제까지 본 적 없는 그의 광기어린 눈동자 연기가, 설명에 너무 충실한 백 마디의 대사보다 더 완벽한 이정재의 귀환을 알리고 있다.
황정민은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에서 지키고 싶은 것이 생긴 암살자 ‘인남’ 역을 맡아 강도 높은 액션과 추격신을 모두 소화해 냈다. 사진=CJ엔터테인먼트 제공
이정재의 레이가 흰 코트를 나부끼는 광기어린 눈동자의 도살자 겸 추격자라면, 황정민의 인남은 검은 수트를 차려 입은 소 같은 눈망울의 암살자다. 레이의 전 직업을 고려해 소처럼 순박한 눈빛 연기가 가능한 황정민을 캐스팅한 것인지는 홍원찬 감독이 풀어야 할 비하인드 스토리가 되겠지만, 사실 확인 여부를 떠나서 두 배우가 한 작품에서 펼치는 극과 극의 면모를 즐기는 것도 이 영화의 또 다른 관람 포인트다. 또한 이처럼 흑과 백, 정과 동, 교과서만큼이나 뚜렷하게 대비되는 두 캐릭터가 희한하게 얽히면서도 결코 섞이지 않는 연출도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전작인 ‘신세계’에서 합을 맞췄다곤 하지만 두 배우가 액션으로 맞붙는 것은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가 최초다. 스토리의 큰 줄기는 인남을 향한 레이의 추격전이긴 하나 정작 추격 신은 적거나 그 스케일이 다소 빈약한 편이며, 이에 대한 아쉬움은 그들의 일 대 일 액션 신에서 풀 수 있도록 안배했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의 액션신은 캐릭터와는 또 다른 독특함으로 눈길을 끌고 있다. 실제 배우들의 액션 장면을 원 테이크로 촬영 후 스톱모션 기법을 차용해 프레임을 나눠 편집함으로써 타격감을 극대화 시킨다는 게 제작진의 설명이다.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액션 영화’라는 제작의 출발점에 부합하는 독특한 방식이긴 하나 잦은 슬로우 모션과 클로즈업으로 오히려 관객의 몰입을 어렵게 하는 단점이 못내 아쉽다.
배우 이정재, 박정민과 홍원찬 감독이 28일 오후 서울 용산구 CGV용산아이파크몰에서 열린 영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언론 시사회에 참석해 포토타임을 갖고 있다. 황정민은 해외 촬영 일정으로 실시간 화상인터뷰로 참석을 대신했다. 사진=박정훈 기자
연출을 맡은 홍원찬 감독은 28일 서울 CGV 용산아이파크몰점에서 열린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언론배급시사회에 참석해 작품에 대해 “장르적 특성에 집중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기획의도를 밝혔다. 홍 감독은 “장르 영화라는 것은 결국 익숙한 이야기를 어떻게 변주해 전달하는지가 관건인 것 같다. 성에 갇힌 공주를 구하는 이야기의 원형을 큰 틀에서 따르고, 이 영화만의 다른 방식과 스타일을 부여했다. 그렇게 탄생한 게 이정재가 연기한 레이”라고 설명했다.
황정민의 인남에 대해서는 “제가 좋아하던 기존의 느와르 작품에서 많이 등장했던 베이스를 갖고 있다. 나락으로 떨어져 있는 인물이 누군가를 구하면서 본인도 구원받는 캐릭터다. 구상단계에서 그런 부분을 생각했고 이를 함축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제목을 찾다 보니 주기도문 마지막 구절에 착안해 결정했다”고 말했다. 정작 황정민 본인은 “대사가 많이 없어서 작품을 선택했다”고 해맑게 밝혀 기자간담회장에 모인 사람들을 웃게 만들기도 했다. 전작인 ‘공작’은 대사가 너무 많아 어려웠기에 상대적으로 대사가 적은 ‘다만 악’을 선택했지만, 오히려 연기가 더 어려웠다는 뒷이야기도 덧붙였다.
작품의 히든카드인 박정민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극중 인남의 조력자로 등장하는 유이를 맡았다. 관객들이 직접 경험해야 하는 충격이기 때문에 많은 이야기를 담을 순 없지만, 황정민과 이정재가 ‘극찬’을 한 이유를 실감했다는 것만큼은 단언할 수 있을 것 같다. 박정민은 자신의 캐릭터에 대해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한 인물이다. 저도 처음에는 그런 시선으로 접근을 했지만 유이라는 인물이 지닌 속마음에 중점을 두기로 했다. 말투, 행동 등을 너무 특이하지 않게 하려고 했다”고 아직 영화를 관람하지 못한 대중들의 궁금증을 더욱 키웠다.
한편 영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는 쫓는 자 ‘레이’(이정재 분)와 쫓기는 자 ‘인남’(황정민 분) 두 남자가 펼치는 스타일리시한 하드보일드 추격 액션을 그린다. ‘신세계’와 ‘레옹’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면서도, 어디에도 없는 캐릭터로 밀고 나가기에 성공하는 그 뚝심에 주목. 108분, 15세 이상 관람가. 8월 5일 개봉.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