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5년 동안 한국기원 제6대 사무총장을 지낸 양재호 9단은 이후 K바둑방송 대표로 일하다 올해 2월 3일 다시 제9대 한국기원 사무총장으로 복귀했다. 사진=사이버오로 제공
승부사로 남긴 기록도 남부럽지 않다. 동양증권배 우승(1989년), 명인전 준우승(1992년) 등 우승 1회, 준우승이 7회다. “바둑 자체는 적성에 맞는 부분이 있습니다. 다만 성격적으로 승부와는 체질이 안 맞았어요. 입단 후엔 바둑보다 학교 공부에 중점을 뒀고, 대학도 합격했습니다. 스트레스 받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데 바둑에 지면 어쩔 도리가 없죠. 술도 못 마시던 젊은 시절이라 정처 없이 거리를 돌아다녔어요. 지금도 걷는 걸 가장 좋아합니다”라면서 웃었다.
바둑도장을 차려 후학을 양성했다. 방송에선 명해설자로 사랑을 듬뿍 받았다.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대표팀 감독을 맡아 금메달 3개를 싹쓸이하며 명장의 반열에 올랐다. 2011년 4월부터 바둑행정가로 거듭났다. 약 5년 동안 한국기원 제6대 사무총장을 지냈다. 이후 K바둑방송 대표로 일하다 올해 2월 3일 다시 제9대 한국기원 사무총장에 복귀했다. “어떤 단체나 늘 변화가 필요합니다. 한국기원은 시기를 놓쳤어요. 지금은 더 어렵습니다. 역설적으로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굳이 제가 다시 나설 필요가 없었죠. 다시 사무총장으로 불러주셨을 때 주위에 사람들은 다 말렸습니다. ‘왜 사지(死地)로 가시나’라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이후 6개월이 지났다. 양재호 사무총장의 새판 짜기는 이제 막 포석을 마쳤다. 중반전에 임하는 각오와 비전을 들었다.
―다시 사무총장으로 돌아온 소회는.
“8년 전엔 ‘쓰러져 가는 바둑계를 살려보겠다’는 거창한 꿈이 있었다. 하지만 실무에 들어가니 눈앞에 쌓인 현안 처리로만 바빴다. 문제가 생기고, 사건이 터지면 해결하느라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물러난 후엔 내가 사무총장으로 뭘 했다고 말하기 어렵더라. 그때 못했던 변화를 만들고 싶은 마음이다. 짧고, 굵고, 과감하게 개혁하겠다.”
양재호 사무총장은 “짧고, 굵고, 과감하게 개혁하겠다”고 말했다. 사진=사이버오로 제공
“두 갈래가 있다. ‘대회’는 재미있고 흥미롭게 바꾸겠다. ‘보급’도 기존과 다른 관점에서 접근하겠다. 재미가 있어야 팬들이 모인다. 기존 대회방식에서 재미없는 부분은 과감히 덜어내겠다. 새로 만들 대회는 흥행에 초점을 맞춰 설계하겠다. 지금은 한국기원에 바둑TV가 있으니 방송과 더불어 시도할 수 있는 게 많다. 보급도 그렇다. 바둑 인구는 갈수록 노령화되고, 바둑교실은 모두 무너졌다. 바둑은 진짜 맛을 알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 바둑 룰만 아는 사람을 18급이라고 가정하면 최소한 10급은 되어야 바둑의 진정한 재미를 느끼고 애정을 가진다. 이 틈을 메워주는 역할을 한국기원이 맡아야 한다.”
―대회방식의 변화라면 어떤 점이 있을까.
“바둑리그를 예로 들면 주장전 도입과 같은 거다. 올해 시니어리그에서 주장전(지명대결)을 하니 시청률이 바로 급상승했다. 다음 한국리그와 여자리그도 주장전을 추진할 예정이다. 주장전을 만들고 대국료에서 차등을 주면 해외 용병도 자연스럽게 들어올 수 있다. 커제, 양딩신 같은 선수가 와서 신진서, 박정환과 붙어야 흥행이 되지 않나.”
―시니어리그와 여자리그는 한창 진행 중이다. KB리그 준비상황은 어떤가.
“9월에 세팅을 마치고, 10월에 개막할 예정이다. 올해 목표는 10개 팀 개막이었다. 거의 완성이 되었는데 최근 약간 변동이 생겨 고민이다. 아직 1~2팀은 확정이 안 되었다. 곧 예선도 치러야 하는데 팀이 정해지는 대로 구체적인 선발인원 등을 발표할 예정이다.”
―지난 5월 기자간담회에선 기전 확대도 예고했었다.
“응씨배를 능가하는 세계대회, 국내최대기전 창설, 1억 5000만 원 규모의 여자대회를 말했었다. 여자대회는 개막 준비를 마쳤다. 9월 초에 들어간다. 국내기전은 협의가 다 되었는데 후원사가 워낙 코로나에 민감한 회사라 일정을 연기했다. 세계대회도 같은 이유로 미뤄진 상태다. 이외에도 대회 몇 개가 가시권에 있다.”
양재호 사무총장은 기전 확대와 함께 신진서-박정환 7번기 등 이벤트 기전도 기획 중이다. 사진=사이버오로 제공
“그 중에 하나로 신진서와 박정환이 대결하는 ‘7번기’ 또는 ‘10번기’를 기획 중이다. 한 지자체와 협의하고 있다. 그 지역 명소를 순회하면서 멋진 자연환경을 배경으로 바둑을 두는 콘셉트다. 이런 게 팬들이 원하는 대회가 아닐까. 승부는 최고점에 오른 기사가 팽팽하게 균형을 이룰 때 재미가 있다. 지금 바둑리그처럼 선수 간에 전력 차이가 나면 시청자들은 바로 외면한다. 한편에선 ‘왜 이벤트 대회만 만드냐’는 반론도 듣고 있다. 지금은 프로기사 인원이 너무 많다. 전체가 참가하는 규모의 대회는 흥행이 어렵다. 한국기원은 전체 기사의 복지보다 바둑을 널리 알리는 일에 중점을 둬야 한다. 바둑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많아져야 바둑TV 시청률도 상승하고, 수신료과 광고비가 따라서 올라간다. 프로기사의 복지도 신경 쓸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이런 선순환을 만들고 싶다.”
―보급 면에서 한국기원의 새로운 전략이 있나.
“한국기원 프로기사들은 모두 뛰어난 인재다. 이들을 활용해 바둑 보급에 기존 학교 등에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겠다. 제반 환경은 한국기원이 제공하겠다. 학교와 행정적인 절차를 대행해서 프로기사는 가서 교육만 하면 되는 시스템을 만들겠다. 뜻이 있는 기사를 모아 다방면으로 재교육하겠다. 물론 재정적인 지원도 따른다. 그 외에 바둑 초보자를 위한 인공지능 교육 프로그램도 개발 계획이 있다. 예전 구글 알파고와 대결할 때 하사비스에게 직접 요청했었는데 그 후에 소식이 없다(웃음). 국내 업체와 손잡고 추진할 예정이다.”
―이 외에 검토하는 개혁과제가 있다면.
“입단제도는 손봐야 한다. 이미 기원과 기사회를 중심으로 TF를 구성했다. 전반적인 논의를 다시 할 생각이다. 영재 입단을 강화해 기준도 현재 16세보다 더 낮추는 방향을 고려하고 있다. 어린 친구 중에 재주가 있으면 과감히 뽑아줘야 한다. 입단 연령이 올라가는 건 모두에게 바람직하지 않은 상황이다. 과거 인재가 넘쳐날 때는 입단 수를 제한했다. 지금은 원하는 이도 적고 수준이 낮은데 입단자 수는 많이 늘어났다. 전체 입단자 수는 신축성 있게 가려고 한다. 대바협(대한바둑협회)과 협력관계도 재구축해야 한다. 꼭 통합이 좋은 건 아니다. 단체 자체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예전에 한번 통합했던 시절에는 한국기원이 대바협을 지배하는 구조였다. 그건 아니다. 각자 평등한 관계에서 상부상조하는 게 더 이상적이다. 평소엔 자기 역할을 하면서 일이 있을 때는 한 몸이 되는 거다. 바둑계 전체를 보며 한국기원에 입장에서 변화를 이어가겠다. 세상에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변화는 없다고 생각한다. 더 나은 방향으로 가기 위한 희생은 불가피하다. 피해 보는 층이 생기면 욕을 먹게 된다. 이 점은 각오하고 있다. 그래도 유익한 변화를 끊임없이 추구해야 바둑계 전체가 살아남는다고 생각한다.”
박주성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