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외 건설경기가 급격히 위축되면서 정의선 현대차그룹 수석부회장의 승계 자금줄이 되어 줄 현대엔지니어링이 실적 위기에 놓일 가능성이 커졌다. 서울 종로구 현대건설 본사. 사진=연합뉴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에 따르면 현대ENG의 2019년 매출은 6조 8010억 원으로 전년보다 8.2% 늘었지만 영업이익은 4081억 원으로 10% 감소했다. 올 1분기도 매출은 5.8% 증가한 1조 6381억 원을 기록했으나 영업이익은 20.6% 줄어든 801억 원에 그쳤다. 국내 건축‧주택부문에서 매출을 늘렸지만 해외 플랜트 사업이 위축됐기 때문으로 보인다.
코로나19 장기화와 유가 변동성 확대로 인한 타격이 2분기부터 반영될 것이란 점에서 해외 시장에서 화공플랜트·설계를 주력으로 삼는 현대ENG의 실적이 더 안 좋아질 가능성이 높아졌다. 현대ENG의 매출 비중은 해외 플랜트 사업부문과 국내 주택사업 부문이 51 대 49로 해외 비중이 조금 더 높다.
건설업계 한 관계자는 “코로나19가 해외에서는 3~4월부터 확산됐기에 2분기 제한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하반기엔 타격이 본격화할 것”이라며 “국내 시장도 정부가 워낙 규제를 강화하고 있어 역성장할 가능성이 있다”고 예측했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코로나19와 함께 유가 변동성도 커지면서 중동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플랜트 발주를 미루는 등 투자를 축소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현대ENG는 위기에 대비해 국내 도시정비사업·쇼핑몰·지식산업센터 수주 등 비플랜트사업 비중을 늘리고 있다. 2014년 흡수·합병한 현대엠코의 주택건설 역량을 한껏 활용하겠다는 복안이다. 실제 이 덕분에 현대ENG는 올 상반기 도시정비사업 수주액이 1조 23억 원으로 수주 순위 4위에 오르는 등 해외 플랜트 부진을 국내 주택사업으로 메우고 있다.
하지만 국내 건설 경기도 정부의 고강도 부동산 규제로 상황이 좋지 않아 신규 일감이 주는 추세다. 그나마 나오는 물량들도 모회사 현대건설과 사업 영역이 겹쳐 현대ENG가 수주하기엔 한계가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우병탁 신한은행 부동산투자자문센터 팀장은 “현대ENG는 작은 규모의 아파트·오피스텔과 업무·상업용 빌딩 등 틈새시장 위주로 수주를 많이 하고 있지만, 이 시장은 본래 대기업 브랜드보다 개인 사업자를 비롯해 중소·중견 소규모 건설사들이 많이 포진해 있어 이미 포화상태”라며 “대기업 베이스를 갖췄더라도 녹록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건설업계 다른 관계자도 “국내 주택건설시장 일감이 풍부해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코로나19가 끝나기 전까지 버티려는 차원이고, 영역도 현대건설과 겹쳐 대안이라고 보긴 힘들다”며 “실적 악화에 따른 기업가치 하락은 불가피할 것”이라고 했다.
국내외 건설경기가 급격히 위축되면서 현대엔지니어링(현대ENG)의 어깨가 무거워졌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수석부회장이 지난해 1월 30일 경기 화성시 현대기아차 기술연구소에서 인사말을 하는 모습. 사진=공동취재단
코로나19와 국내 부동산 규제 강화로 인한 타격은 국내 대부분 건설사들이 직면한 문제다. 다만 현대ENG는 정의선 부회장의 현대차그룹 지분 승계를 위한 자금줄 역할을 해야 한다는 점에서 위기에 따른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정의선 부회장은 ‘현대모비스→현대차→기아차→현대모비스’로 이어지는 현대차그룹의 순환출자구조를 끊어내는 동시에 현대모비스 지분을 획득해 최대주주로 올라서야 한다. 그러나 현재 보유한 현대모비스 지분은 0.32%에 불과하다. 지분을 늘리려면 아버지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이 보유한 현대모비스 지분 7.13%를 상속받고 증여세를 내거나 자신이 최대주주인 현대글로비스를 현대모비스와 합병해야 한다. 기아차·현대제철 등이 보유한 현대모비스 지분을 매입하는 것도 승계와 동시에 순환출자 고리를 끊을 수 있는 방법이다.
문제는 돈이다. 정의선 부회장은 현대모비스뿐 아니라 현대차(2.62%)·기아차(1.74%) 등 핵심 계열사들에 대한 지분율이 미미해 어떤 시나리오를 택하든 대규모 자금이 필요하다. 재계에서는 정의선 부회장 개인 지분이 많고 매각해도 경영권에 영향을 주지 않는 현대글로비스(23.29%)와 현대ENG(11.72%), 현대오토에버(9.57%), 현대위아(1.95%), 이노션(2%) 등 계열사 지분을 팔아 실탄을 마련할 것으로 본다. 특히 현대ENG는 정의선 부회장이 현대글로비스 다음으로 지분이 많아 현대건설과 합병한 뒤 우회상장하는 시나리오가 꾸준히 언급돼 왔다.
정 부회장 입장에서 유리한 합병 비율을 산정하려면 지분이 많은 현대ENG 가치는 높을수록, 현대건설 가치는 낮을수록 좋다. 현대차그룹은 정의선 부회장이 최대주주로 있던 현대엠코와 정의선 부회장의 지분이 없던 현대ENG를 2014년 합병하면서 지분 가치를 높였다. 현대ENG는 현대엠코의 빌딩·도로·항만·주택 등 토목·건축부문 역량을 물려받고 포트폴리오를 다각화하며 덩치를 키워왔다. 그러던 중 코로나19에 따른 타격과 국내 부동산 규제로 건설업종이 전반적으로 저평가를 받으면서 현대ENG가 기업가치 하락 위기에 놓인 것.
반면 현대건설은 최근 굵직한 도시정비사업을 따내고 쌍용차 구로서비스센터 부지 인수와 송도 자체사업지 매입 등 개발 재원을 확보했다. 최근엔 신재생에너지와 친환경사업, 스마트시티 투자 계획도 내놓으면서 일각에선 최근의 수주와 투자 행보가 향후 주가 기폭제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전망을 내놓는다. 이대로라면 현대건설 가치는 오르고 현대ENG 가치는 낮아지는, 정의선 부회장이 원하는 그림과 정반대의 상황이 펼쳐질 수 있는 셈이다. 현대ENG가 각종 악재를 앞두고 실적 방어에 사활을 걸어야 하는 이유다.
재계 한 관계자는 “현대엠코와 현대ENG를 의도적으로 키워온 현대차그룹 입장에서는 코로나 사태가 터지면서 현대건설과 합병으로 총알을 마련해 승계 시나리오를 실현하기에 애매한 상황이 됐다”고 했다. 이어 “코로나 사태로 그룹 전반이 어려운 지금 캐시카우(현금창출원)가 되어줄 사업은 그나마 타격이 덜한 국내 건설 사업으로, 현대건설이든 ENG든 수주를 많이 늘려 이익을 극대화해야 한다”며 “다만 승계를 위해서는 현대ENG 가치는 높아지되 현대건설은 그대로 머물러줬으면 하는 마음이지 않겠느냐. 여러 모로 딜레마일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우려에 대해 현대엔지니어링 측은 “코로나19와 저유가로 해외 수주가 어려워질 수 있지만 국내 주택사업 비중을 늘리면서 안정적인 포트폴리오를 유지하고 있다”며 “현대건설과 사업영역이 겹치긴 하더라도 각자 수준이 업계 상위권에 올라와 있어 어느 한쪽이 수주가 많다고 해서 다른 쪽이 적은 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이어 기업공개(IPO·상장)나 현대건설과의 합병 가능성에 대해서는 “전혀 검토되는 바가 없다”고 일축했다.
김예린 기자 yeap1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