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이정재는 8월 5일 개봉하는 영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에서 광기어린 추격자 레이 역을 맡았다. 2013년 ‘관상’에 이어 오랜만에 제대로 된 악역이다. 사진=CJ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다만악)에서 이정재는 광기어린 추격자 ‘레이’ 역을 맡아 자신의 악역 필모그래피에 또 하나 굵직한 족적을 추가했다. 일반적으로 대중이 떠올리기 쉬운 추격자라기보다는 ‘도살자’에 더 가까운 이 미치광이는, 연기에 앞서 그 이미지를 결정하는 데만 많은 시간을 들이고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다고 했다.
“레이는 원래 시나리오상에선 화려한 캐릭터가 아니었어요. 첫 등장에서 보면 이 캐릭터가 맹목적으로 추격을 해나가는데 ‘과연 형에 대한 복수만 있어서 그럴까’ 하는 생각으로 발전한 거죠. 그래서 좀 더 묘한 캐릭터로 만들어서 관객 분들에게 ‘쟤는 왠지 저럴 것 같다’는, 시각적인 믿음을 확실히 드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믿음을 첫 등장에서부터 보여드려야 하니까 비주얼적인 부분에서 고민을 많이 했죠. 그래서 첫 미팅 때 제가 나름대로 준비한 이미지들을 USB 메모리에 담아 보여드렸는데 정말 많이들 놀라시더라고요(웃음).”
극 중 레이는 독특한 패션센스로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화이트 컬러의 롱 코트나 화려한 애니멀 프린트의 실크 셔츠, 턱 아래부터 쇄골까지 빼곡하게 차 있는 타투와 미래지향적인 선글라스. 다 합쳐 놓고 보면 이런 것을 걸친 인물은 결코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시각적으로 단박에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이정재의 적극적인 참여가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처음엔 더 컬러풀하고, 킬러지만 킬러 같지 않은 느낌으로 (이미지를) 준비해 갔어요. 주황색 반바지라든가 흰 부츠 같은 것(웃음). 놀란 스태프 분들이 ‘더 파격으로 가는 것도 원하느냐’고 하시더라고요. 전 파격으로 갔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타투도 한두 개 하는 게 아니라 왕창 하자! 그런데 이걸 매일 분장을 해야 하니까 좀(웃음). 레이가 뭐가 많잖아요, 액세서리도 달고 있고, 머리도 제가 원래 곱슬이어서 일일이 다 펴가지고 드라이해서 붙여야 하고, 그런 수고가 좀 있었죠(웃음).”
광기어린 성정에 어울리는 독특한 패션 센스로 눈길을 사로잡는 ‘레이’의 이미지 구축에는 이정재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었다. 사진=CJ엔터테인먼트 제공
“사실 수양대군도 그렇고, 모든 배우에게 자기가 맡은 캐릭터의 첫 등장과 퇴장은 너무나 중요한 것이거든요. 첫 등장에선 ‘저 캐릭터가 뭘 해도 믿음이 간다’는 신뢰감을 줘야 하고, 마지막 퇴장 장면에서는 영화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서도 여운이 남도록 해야 하기 때문에 어떤 영화든 처음과 마지막이 매우 중요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그런 걸 중점적으로 고민하는 것 같아요. ‘다만악’의 경우 레이가 등장하면서 극 중에 또 다른 속도를 가중시키는 게 없잖아 있죠. 원래 의도돼 있는 시나리오의 속도를, 레이가 등장하면서 정확하게 그 속도를 내드려야 하는 게 제 숙제였던 것 같아요.”
전작의 이야기가 나온다면 ‘신세계’가 빠질 수 없었다. 특히 ‘다만악’은 이정재와 황정민(인남 역)이 ‘신세계’ 이후 7년 만에 합을 맞춘다는 것으로도 눈길을 끈 작품이다. ‘신세계’에서 이른바 ‘부라더 케미’로 대중성은 물론 영화계의 코어 팬덤까지 가질 수 있었던 두 사람의 ‘다만악’ 속 케미는 어땠을까.
“‘신세계’에서 정청으로 나오는 정민이 형이나 ‘다만악’에서 인남으로 나오는 황정민은 전혀 다른 캐릭터라 전혀 다른 연기를 펼쳤죠. 저의 경우 ‘신세계’에선 자기 신분을 감춰야만 하는, 내면적인 모습을 보여드렸다면 여기선 자기 하고 싶은 걸 다 하는 거침없는 캐릭터잖아요? 그런 환경에서 또 함께 연기를 할 수 있는 조건이어서 굉장히 서로 재밌게 했던 것 같아요. ‘신세계’와 워낙 설정이 달라서 그렇게 다르게 연기를 했던 게 또 다른 재미지 않았나…. ‘신세계’ 때는 정민이 형을 보면서 ‘와, 이 형이 옷 태가 참 좋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웃음), 이 작품에선 철저하게 자기 캐릭터에 맞춰서, 특히 부성애에 대한 표현을 굉장히 인상 깊게 연기해주셨던 것 같아요. 자칫 잘못하면 신파 아닌 신파처럼 보일 수 있는 장면을 굉장히 깊게, 잘 표현해 주셔서 정민이 형의 마지막 장면들이 기억에 참 남더라고요.”
절친 정우성과 함께 이정재도 감독 데뷔 초읽기에 들어갔다. 그의 첫 연출작 ‘헌트’(가제)는 내년부터 촬영에 들어갈 예정이다. 사진=‘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스틸컷
최근 이정재는 연출자로 변신도 앞두고 있다. 첩보 액션 영화 ‘헌트’(가제)로 알려진 그의 첫 번째 연출작은 내년부터 촬영에 돌입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절친인 정우성은 영화 ‘보호자’로 감독 데뷔에 먼저 한 발 내딛은 상황. 서로 좋은 자극제이자 롤 모델이 되고 있다고 했다.
“제가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한 건 8~9년 된 것 같아요. ‘도둑들’을 찍을 때였는데, 어떤 선배님이 ‘나는 주로 연기를 하지만 어떨 땐 연출도 하고, 시나리오도 쓴다’고 하신 얘기를 들은 게 그 당시에 되게 부럽더라고요. 아 이 사람은 영화인이구나 하는 생각. 우리도 그냥 영화인으로서 어떨 땐 자유롭게 영화 작업을 하며 연출도 하고, 제작 참여도 하고, 뭔가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있으면 시나리오도 쓰고 그랬으면 좋겠다 하는 자극이 꽤 있었던 것 같아요. 아, 정우성 씨요(웃음)? 아주 유려하고 여유 있게 연출을 하고 있더라고요. 찍은 것도 제가 옆에서 몇 장면 봤는데 굉장히 잘 찍혔고, 현장에서 스태프들과 호흡을 잘 맞추면서 배우로서 큰형으로 노력하는 것 이상으로 연출자로서의 면을 다시 본 것 같아요. ‘아, 이 아저씨는 연출을 계속 해야 되겠다, 너무 잘 찍었어. 이 양반은 연출을 해야 해’ 이런 생각(웃음).”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배우 이정재’가 고프다. 프리퀄을 약속했지만 7년의 세월이 지나버린 ‘신세계’의 뒷이야기도 궁금하고, ‘사바하’ 속 박웅재를 주인공으로 한 시리즈도 기약 없는 기대감을 높이고 있다. 연출자 이정재를 맞이하기에 앞서 배우 이정재에게, 그의 연기자로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행보에 대한 질문을 던져봤다.
“간혹 저에게 ‘과거로 돌아가 예전 캐릭터를 또 한다면 잘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이 들어와요. 그럼 당연히 잘할 수 있을 거라고 보실 수 있겠지만, 저는 못해요. 그때의 연기는 그때의 심리 상태, 에너지로 하는 거라서 아무리 제가 경험을 많이 해 보고, 관객들이 무엇을 더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차별성을 잘 알지라도 과거의 캐릭터를 지금 다시 해 볼 거냐고 물으면 솔직히 자신 없어요. 한편으로 저는 제가 표현해 보지 않았던 캐릭터가 저에게 왔을 때 흥분감이 있거든요. ‘어, 이거 내가 안 해 본 건데’ 하면 좀 더 호기심이 가고, 과연 내가 이걸 잘할 수 있을까 하는 상상을 해보다 뭔가 실마리가 찾아지는 것 같으면 결정을 하는 식이에요. 이제는 영화든 드라마든 장르는 상관없고 캐릭터가 주는 재미가 제게 훨씬 더 중요한 것 같아요. 2시간 안에 끝나는 영화도 중요하지만 앞으로는 에피소드가 몇 개가 되더라도 이야기가 좀 더 긴, 그런 작업도 계속 하고 싶어요.”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