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가 터진 사모펀드들의 투자금 액수가 워낙 큰 탓에 이번 선보상안은 금융당국, 투자자, 판매사 등 이번 사태에 관련된 모두에게 민감할 수밖에 없다. 판매사들이 비난을 각오하면서까지 결정을 미루고 있는 만큼 사태가 장기화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반면 금융감독원은 새 대책이 필요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은 아니라는 입장이다.
잇따라 터진 사모펀드 사태 보상안에 대해 은행과 증권사 등 판매사들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사진=라임자산운용 홈페이지
최근 라임펀드 판매사들이 금감원 분쟁조정위원회 권고 수락 시한을 연장해달라고 요청했다. 앞서 분조위는 라임 무역금융펀드 분쟁조정 신청에 대해 민법 제109조 ‘착오에 의한 계약취소’를 적용하고 사상 처음으로 판매사가 투자자에게 원금 ‘100%’를 배상해주라고 권고했다. 지난 7월 27일은 판매사들이 분조위 권고에 대해 수락 여부 등 답변을 해야 하는 날이었다.
분쟁조정 신청이 들어와 전액 배상 권고를 받은 판매사는 우리은행(650억 원), 하나은행(364억 원), 신한금융투자(425억 원), 미래에셋대우(91억 원) 4곳이다. 우리‧하나은행은 답변 시한을 앞두고 각각 이사회를 열어 전액 배상 권고안에 대해 논의했지만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사실관계에 대한 추가 확인과 보다 심도 있는 법률 검토가 필요하다는 이유였다. 신한금융투자, 미래에셋대우는 일정 문제로 이사회는 열지 못했지만 내부 검토 후 답변을 미루기로 했다.
금감원은 판매사 요청에 따라 답변 기한을 늘려주기로 했다. 대신 딱 한 차례만 연기를 허가하고, 가급적 한 달 내로 결론을 내려달라고 전했다. 각 판매사들의 이사회에서 추가 설명 등 결정에 필요한 사항이 있으면 언제든지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는 의사도 밝혔다.
#판매사들 고민 깊어진 까닭
사태 초기 판매사들은 ‘안전한 금융기관’이라는 이미지를 위해 선제적 보상안 마련에 적극적이었지만 막상 권고가 내려지고 답변 시한까지 다가오면서 고민이 점점 깊어지고 있다.
배임 가능성이 가장 큰 이유다. 판매사들이 투자자들에게 원금 100%를 배상하면 라임자산운용에 구상권을 청구해 자금을 회수해야 하는데, 현재로선 라임운용으로부터 돌려받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이사회가 회사에 불필요한 손실이 생겼다고 판단할 수 있어 형법상 배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판매사들은 아직까지 펀드 운용사와 판매사 간 과실비율 등이 명확하게 나오지 않은 만큼, 조금 더 신중하게 따져봐야 한다는 입장이다.
금융권이 같은 이유로 분조위 권고를 불수용한 사례도 있다. 외환파생상품 키코(KIKO) 분쟁조정의 경우, 우리은행을 제외한 나머지 은행이 총 5차례의 기한연장 끝에 결국 수용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분조위 권고를 받아들이면 화해가 성립돼 민법상 확정 판결과 동일한 효력이 발생하는 만큼 작은 이견도 결정을 내리는 데큰 걸림돌이 된다.
이번 선보상이 선례로 남을 여지가 있다는 점도 고려 대상이다. 현행법상 판매사가 운용사 문제에 관여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때문에 라임자산운용과 판매사들의 책임 문제가 ‘확정적으로’ 가려지지 않고 판매사가 일단 책임을 지게 되면 향후 다른 사모펀드 이슈에도 똑같은 방식이 적용될 수 있다.
현재 금융당국의 사모펀드 사태 해결 초점은 1차적으로 판매사들의 선제 보상에 맞춰져 있다. 지난해 11월 KB증권의 호주 부동산 펀드 손실 문제 때 선제적 보상안이 구체화됐고, 라임 사태 때부터 본격적으로 거론됐다. 이 과정에서 업계 ‘눈총’을 받으면서도 선보상을 행동으로 옮긴 일부 판매사들이 나왔는데, 이때 윤석헌 금감원장이 직접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며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라임과 관련해 선보상을 결정할 경우 징계 수위를 낮추는 등의 ‘당근’도 검토되고 있다.
다만 금감원의 입장을 반대로 뒤집어 보면, 선보상을 거부할 경우 자칫 ‘괘씸죄’를 뒤집어 쓸 수 있다. 한 금융지주 임원은 “감독자와의 관계가 불편해지면 좋을 건 없다”면서도 “일단 선제적 보상이 가이드라인이 됐고, 보상안을 바라보는 눈높이도 점점 높아지고 있다. 사모펀드가 시한폭탄이 된 상황에서 섣불리 받아들였다가 앞으로 감당하기 힘든 후폭풍이 밀려들까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옵티머스 펀드를 가장 많이 판매한 NH투자증권도 라임펀드 판매사들과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라임 사태 판매사들의 선보상 문제는 이미 다른 펀드로도 번져있다. 옵티머스 펀드 사태로 난감한 처지에 놓인 NH투자증권이 대표적이다. 라임에 이어 옵티머스 펀드도 전액 배상 권고 결정이 내려질지가 초미의 관심사다. 5000억 원에 육박한 옵티머스 펀드를 판매한 NH투자증권 역시 당초 선보상을 적극적으로 검토했으나 최근 이사회에서 ‘신중히 확인해봐야 한다’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라임 배상 향방이 NH투자증권 결정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옵티머스 펀드와 관련한 조사는 아직 진행 중이다.
#자신 있는 금감원 “지켜보고 있다”
선제적 보상안이 거론된 이후부터 최근까지 판매사들은 다른 회사들의 보상 논의 동향 파악에 공을 들이고 있다. 동향 파악 뒤 내부 보고를 거쳐 고심을 거듭하고 있다. 판매사들 간 ‘눈치보기’가 진행 중인 셈인데, 금융권에선 이 기간이 길어지는 만큼 결정이 내려지는 시점도 더 늦춰질 것으로 보고 있다.
다만 판매사 가운데 신한금융투자와 미래에셋대우의 경우, 분조위 권고를 수용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은 것으로 관측된다. 신한금투는 단순 판매를 넘어 라임 펀드에 TRS(총수익스와프증권)를 제공하는 등 운용에도 관여했다. 다른 판매사들은 추후 라임은 물론 신한금투에도 구상권을 청구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미래에셋대우는 판매액 91억 원으로 4곳 판매사들 가운데 배상해야 할 금액이 가장 적다. 권고를 가장 먼저 수용할 곳으로 전망된다.
금감원은 일단 판매사들에게 시간을 더 주기로 한 만큼 조금 더 지켜본다는 입장이다. 그렇다고 사태가 장기화되거나, 이 때문에 새 대책을 고민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하고 있다. 분조위 권고안에 자신 있다는 취지다. 앞서 금감원은 ‘착오에 의한 계약 취소’ 결정과 권고안을 내기 전 내·외부 전문가들과 학계, 법조계 등으로부터 수차례 의견과 자문을 받았다. 최악의 상황에서 소송전이 벌어지더라도 결과가 뒤집힐 가능성은 없다고 보고 있다.
같은 이유로 키코 사태처럼 라임도 장기전이 될 것이란 우려에 대해서도 선을 그었다. 금감원 관계자는 “권고를 불수용할 경우 판매사들은 개별 소송을 하게 될 텐데, 키코와 달리 재판에서 착오 취소 결정이 내려질 수 있다”며 “판매사들이 패소할 경우 계약 취소 적용 시점인 2018년 11월부터 확정 판결이 내려진 시점까지의 지연이자까지 내게 된다”고 말했다. 이어 “바람직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울 방침”이라고 덧붙였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