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백화점그룹이 기업 인수합병 시장 큰 손으로 떠오르고 있다. 사진=최준필 기자
그간 관심이 집중됐던 현대HCN 인수전에 속도가 붙고 있다. 최근 매각 우선협상대상자로 KT 위성방송 자회사인 KT스카이라이프가 선정됐다. 두 회사는 관련 절차를 거쳐 오는 8월 말까지 계약을 마무리할 계획이다.
현대HCN은 업계 5위 수준이지만 서울, 부산, 대구 등 대도시 종합유선방송사업권역(SO)을 확보하고 있는 ‘알짜 매물’로 평가받는다. 이 때문에 본입찰에는 SK텔레콤과 LG유플러스, KT스카이라이프가 모두 참여해 치열한 경합을 벌였다. KT스카이라이프가 경쟁사들 가운데 가장 높은, 약 6000억 원의 인수가를 써낸 것으로 전해진다. 앞서 현대HCN은 매각가로 6500억 원을 희망해왔다.
현대HCN 매각 대금은 현대퓨처넷이 모두 가져가게 된다. 올해 초 현대백화점그룹은 현대HCN을 존속법인 현대퓨처넷과 신설법인 현대HCN으로 분할했다. 현대퓨처넷이 현대HCN을 100% 지배하는 구조다. 이에 따라 매각이 마무리되면 현대퓨처넷이 확보하는 실탄은 매각 대금 약 6000억 원에 분할 당시 나눈 유동자산 약 3300억 원을 더해 약 1조 원에 육박하게 된다.
이번 현대HCN 매각은 현대백화점그룹의 대형 M&A를 알리는 신호탄이다. 앞서 지난 3월 현대백화점그룹은 현대HCN 매각을 공식화하면서, 이 자금을 활용해 신사업과 대규모 M&A에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 현재 현대백화점그룹은 미래사업본부를 주축으로 인수 분야와 후보 기업 등을 정지선 회장에게 수시로 보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IB(투자은행)업계 관계자들에 따르면, 현대백화점그룹은 업종을 특정하지 않고 광범위하게 인수 후보를 찾고 있다. ‘현대백화점과 직접 시너지를 낼 수 있는 분야’라는 기준을 충족해야 하고, 미래 성장성이 있는 곳이 그 대상이다. 식품과 리빙, 뷰티 등과 AI(인공지능), 플랫폼, 전자기기, 물류 등이 포함돼 있다.
인수 후보 기업들의 몸값도 수백억 원부터 1조 원대까지 다양하게 살펴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IB업계 한 관계자는 “현재 현대백화점그룹의 ‘쇼핑’ 모습을 보면, 향후 거액의 실탄을 거머쥔 현대퓨처넷이 중심이 돼 전사적으로 동시다발적인 M&A가 진행하거나 그룹 자금을 모아 조 원 단위의 대형 거래를 추진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화장품+면세사업 시너지 노린다
현대백화점그룹 관계자들은 “다양한 방안을 구상 중이지만 아직까지 확실하게 정해진 내용은 없다”며 말을 아끼고 있다. 다만 업계에선 당장 올해 화장품 분야에서 드러난 현대백화점그룹의 행보에서 힌트를 얻고 있다. 앞서 현대백화점그룹 계열사 한섬은 지난 5월 화장품 전문기업 ‘클린젠 코스메슈티칼’ 지분 51%를 인수했다. 한섬이 패션 이외 다른 사업에 뛰어든 건 이번이 처음이다. 한섬은 클린젠의 화장품 제조 특허기술을 활용해 내년 초 프리미엄 화장품을 론칭할 계획이다.
한섬의 이 같은 전략은 경쟁 패션업체 신세계인터내셔날과 비교된다. 신세계인터내셔날은 2012년 일찌감치 브랜드 ‘비디비치’로 화장품 사업을 시작했다. 이후 매출과 영업이익이 꾸준히 늘고 있다. 지난해엔 매출 1조 4250억 원, 영업이익 844억 원을 기록했는데, 각각 전년 동기보다 13%, 52% 증가한 실적이다.
유통채널 확대 전략도 닮은꼴이다. 신세계인터내셔날은 신세계백화점과 신세계디에프 면세점을 통해 화장품을 유통하고 있는데, 특히 면세점에서 화장품이 효자노릇을 했다. 신세계인터내셔날 화장품 사업이 크게 성장한 2018년 신세계디에프도 함께 몸집을 불렸다. 한섬은 내년 화장품 브랜드를 론칭하면 현대백화점 일부 매장을 시작으로 면세점과 온라인 등에서 판매할 예정이다.
신세계인터내셔날과 차이점은 화장품 원료 제조업체 보유 여부에서 갈릴 전망이다. 신세계인터내셔날은 2015년 이탈리아 화장품 연구개발 및 제조업체 인터코스와 공동 출자해 지분율 50 대 50으로 합작법인 ‘신세계인터코스코리아’를 세웠다. 다만 최근 화장품 브랜드 사업 강화를 이유로 최근 합작 파트너 인터코스에 지분 50%를 전량 매각했다.
현대백화점그룹은 국내 화장품 제조업체 SK바이오랜드 인수를 추진 중이다. 그룹차원에서 거래를 진행 중인데, 인수주체는 한섬이 아닌 현대HCN이다. 현대백화점그룹은 화장품 사업을 중심으로 현대HCN과 한섬, 두 회사의 성장과 수익성을 기대하고 있다. SK바이오랜드는 화장품 원료뿐만 아니라 건강기능식품, 의료소재 등도 생산하고 있어 사업 포트폴리오를 더 확장할 수도 있다.
#위기 때마다 큰돈 쓴 현대백화점
현대백화점그룹의 대규모 M&A 투자 방향에 대한 증권가의 관심도 뜨겁다. 증권업계 관계자들에 따르면, 현대백화점그룹은 그동안 투자와 지출 규모와 속도를 엄격하게 관리하면서 보수적이고 안정적인 경영을 해왔고 시장에서도 이에 대한 신뢰가 높았다.
문제는 현재 그룹의 핵심인 현대백화점이 코로나19 사태로 다른 오프라인 유통채널과 다름없이 심각한 부진을 겪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 시내 면세점 추가 오픈과 인천공항 면세점 진출까지 겹치면서 실적 우려도 높아지고 있다. 기존 현대백화점그룹 경영 전략대로라면 투자와 M&A 계획을 미뤄야 하는 상황이지만 공격적인 현금 지출 계획을 공식 천명한 만큼 그 과정과 결과에 관심이 쏠리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한 증권사 관계자는 “경기가 좋지 않을 때 투자를 늘리거나 인수합병을 시도하는 것 자체가 이례적인 일은 아니다.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다”며 “현대백화점그룹의 굵직한 M&A나 신사업진출은 IMF외환위기와 2008년 금융위기 등의 전후로 이뤄졌다. 그룹만의 투자 전략인 셈”이라고 말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