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미 슈퍼스타즈, 롯데 자이언츠 등에서 감독을 역임한 김진영 감독이 지난 3일(한국시간) 별세했다. 1983년 프로야구 삼미 대 MBC 경기에서 주심 판정에 심한 항의를 하고 있는 김진영 삼미 감독. 사진=연합뉴스
1935년 인천에서 태어난 김 감독은 삼미 초대 사령탑인 고(故) 박현식 전 감독과 함께 ‘인천 야구의 대부’로 통했다. 인천고 재학 당시 모교를 세 차례 전국대회 우승으로 이끌어 인천이 낳은 최고의 야구 스타로 떠올랐다.
실업 야구 시절에는 육군, 교통부, 철도청 야구단에 몸담으면서 국가대표 유격수로 활약했다. 현역 시절 근성이 남달라 숱한 화제를 몰고 다녔다. 큰 부상으로 입원한 날 중요한 경기가 열리자 몰래 병원을 빠져나와 대타 홈런을 친 뒤 병상으로 복귀했다는 에피소드도 유명하다. 현역에서 물러난 뒤엔 중앙대와 인하대에서 지도자 생활을 했다.
김 감독은 프로야구 출범 2년째인 1983년, 인천을 연고로 하는 삼미 지휘봉을 잡았다. 삼미가 승률 0.188(15승 65패)라는 참담한 성적표로 프로 첫 시즌 꼴찌를 한 뒤였다. 삼미는 그 충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김 감독을 새 사령탑으로 선택했다.
첫해부터 순탄치 않았다. 삼미는 당시 천문학적 몸값이던 1억 원을 투자해 재일교포 투수 장명부를 데려왔다. 국가대표 출신 투수 임호균을 포함한 선수 13명도 새로 영입했다. 선수 스카우트에 돈을 너무 많이 써버려 해외 스프링캠프를 떠날 수 없었다. 김 감독은 국내 모처에 임시로 설치된 비닐하우스 훈련장에서 프로 사령탑 생활을 시작해야 했다.
그해 6월 1일 MBC 청룡과 잠실 경기에선 심판 판정에 격하게 항의하다 퇴장당했다. 심지어 이때 폭력을 행사했다는 이유로 이튿날 경찰에 연행돼 구속되는 어려움도 겪었다. 어두웠던 당시 시대상이 고스란히 반영된 촌극이다. 김 감독이 벌금 100만 원에 약식 기소되자 구단은 ‘일시 퇴진’ 징계를 내렸다. 한국시리즈를 향해 달리던 삼미는 끝내 전·후반기 모두 2위에 머물렀다.
김 감독은 1984년 삼미 사령탑으로 복귀했지만, 팀이 다시 2년 연속 최하위를 기록하자 지휘봉을 내려놓았다. 1990년 롯데 자이언츠 감독을 맡은 뒤에도 팀 안팎의 내홍에 휘말려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해 8월 28일 성적 부진으로 경질됐다. KBO리그 감독 통산 성적은 121승 8무 186패.
김 감독은 이후 야구계에 복귀하지 않고 미국으로 이주해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대신 ‘영원한 고향’ 인천에 빛나는 유산을 남겨 놓았다. 아들 김경기 SPOTV 해설위원(52)이다. 김경기 위원은 학창시절부터 ‘김진영의 아들’이자 인천 야구의 미래로 주목받았다. 대학 졸업 후 실제로 인천 연고팀 태평양 돌핀스에 입단해 간판스타로 활약했다. ‘미스터 인천’이라는 애칭을 가슴에 새기고 평생 아버지를 자랑스러워했다. 아들에게 인천 야구의 혼을 물려준 아버지는 수많은 야구인의 추모 속에 영원한 잠에 들었다.
배영은 중앙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