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과 가치는 늘 붙어 다닌다. 붙어 다니면서 가치가 사실을 지배하면 사실은 맥을 못 추고 세상은 편견에 편견으로 갈등의 춤을 춘다. 나와 다른 가치를 가진 것이 악이 되고 함께하지 못할 사람이 되면 세상은 쉽게 아수라장이 된다.
나는 SNS를 하지 않지만 SNS를 하는 친구들의 그룹을 보면 우리 사회가 보인다. 보수적인 사람들은 보수적인 사람들끼리, 진보적인 사람들은 진보적 사람들끼리만 함께하며 이념이나 성향이나 세대가 다르면 아예 ‘악’으로 규정하고 외면한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
서로 만나지 않고도 자기 방 안에서 모든 것이 가능한 SNS 소통은 이 분열을 심화시킨 느낌이다. 21세기가 들어선 지 20년이나 지났는데도 여전히 진보는 보수를 ‘수구’라 공격하고, 보수는 진보를 ‘빨갱이’라 공격한다. 통합은 점점 더 어려워지는 과제가 된 느낌이다.
이제는 다 안다. 다르다는 것과 틀리다는 것은 다르다는 사실을.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나’와 다른 사람이지 틀린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머리로는 아는데 ‘나’와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대해서는 들으려고조차 하지 않는다. 상대에게 질문을 하지만 그것은 질문이 아니라 공격이고,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고는 하지만 내 이야기를 강요할 뿐 상대의 이야기에는 귀를 막고 있다. 여전히 우리 사회는 다르기 때문에 외면하는 사람들로 완전히 분열되어 있다.
코로나19 정국에서 다시 주목받고 있는 책이 있다. 바로 실존주의 철학자 카뮈의 소설 ‘페스트’다. 이 책이 내게 인상적이었던 점은 무엇보다도 거대한 부조리 속에서 서로 다른 주인공들이 만들어내는 깊은 우정이다.
주인공은 35세 의사 청년 리유와, 리유와 함께 보건대를 조직하여 연대하는 이방인 타루, 그리고 신을 믿는 사제 파늘루다. 이 세 인물은 접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들은 고향이 다르고, 성장 과정이 다르고, 하는 일이 다르고, 무엇보다도 삶의 지향성이나 세계관이 다르다. 그들은 다르기 때문에 외면하지 않는다. 오히려 다르기 때문에 서로에게 질문하며 배우며, 서로에게 스미며, 삶을 확장해간다.
무자비하게 사형을 구형한 아버지에게 실망하고, 아버지와 대척점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서도 희망을 보지 못했던 이방인 타루의 지향성은 성인(聖人)이다. 조용한 성품의 진중한 타루는 리유에게 묻는다. 어떻게 하면 신을 믿지 않고도 성인이 될 수 있을지를.
다르기 때문에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다르기 때문에 정직해질 수 있는 열린 리유가 답한다. 나는 성인들보다 패배자들에게 더 연대의식을 느낀다고. 나는 성인이 아니라 그저 인간이 되고 싶다고.
카뮈는 무신론적 실존주의자로 분류된다. 그가 무신론자인 것은 러셀처럼 신의 존재를 논증하거나 반증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다. 그가 무신론자인 이유는 시지프스의 바위처럼 기습적으로 굴러 떨어져 우리를 공격해대는 고통을 쉽게 신에게 맡기며, 더 쉽게 고통으로부터 도망가는 비겁한 인간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함께하기 위해 믿음이나 가치관이 동일할 필요는 없다. 다만 자기의 믿음체계로 남을 판단하거나 정죄하거나 통제하려는 경직성 없이 타인의 대해 열려 있기만 하면 된다. ‘페스트’에서 기막힌 페스트 사태를 만나 “우리는 어쩌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고백하게 된 파늘루 신부가 무신론자인 리유와 타루와도 연대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에게 경직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들이 세계관이 달라도 함께할 수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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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향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