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당 배진교 의원(가운데)이 지난 7월 31일 국회 소통관에서 대기업 지주회사의 기업형 벤처캐피탈(CVC) 소유 허용에 관해 재벌의 편법적 경영권 강화와 승계, 총수 일가의 사익편취 활용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며 입법 시도 중단을 촉구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CVC는 대기업이 출자하는 벤처캐피털로, 펀드를 조성해 벤처기업 등에 투자하는 금융회사를 뜻한다. 그간 금융‧산업 간 상호소유 및 지배를 금지하는 금산분리 원칙에 따라 일반지주회사는 금융회사인 CVC의 보유가 금지됐다. 때문에 지주사 체제의 대기업들은 지주체제 밖 계열사 또는 해외법인 형태로 CVC를 운영 중이었다. 국내에서는 64개 대기업집단 가운데 15개 대기업이 17개의 CVC를 운영 중이다. 이 가운데 CVC를 보유 중인 지주사 체제의 대기업은 롯데와 CJ, 코오롱, IMM 인베스트먼트 등 4곳이며 금융지주 가운데는 NH농협과 한국투자금융이 CVC를 보유하고 있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7월 30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제12차 비상경제 중앙대책본부를 주재하고 일반지주회사의 CVC 제한적 보유를 허용하기로 했다. 홍 부총리는 “구글 지주회사 ‘알파벳’이 설립한 구글벤처스는 우버 등 다수 투자 성공사례를 창출하는 등 CVC가 글로벌 트렌드로 자리잡고 있다”며 “우리 경제의 혁신성·역동성 강화를 위해 추진방안을 마련했다”고 밝혔다. 정부의 추진방안에 따르면 CVC는 일반지주회사가 지분을 100% 보유하는 완전자회사 형태로 설립하도록 했다. 기존 벤처캐피털 형태인 중소기업창업투자회사와 신기술사업금융업자 두 가지 유형이 가능하다.
다만 금산분리 원칙 완화에 따른 부작용을 막기 위해 사전·사후적 통제장치가 마련됐다. 일반지주회사 보유 CVC는 원칙적으로 투자행위 외 금융업이 금지된다. 기존 신기술사업금융업자의 경우 융자업무와 타 금융업 겸업이 가능하지만 일반지주회사가 보유한 신기술사업금융업자는 여타 금융업무가 금지되는 것. 또 총수일가의 사익편취를 막기 위해 소속 기업집단 총수일가 지분보유 기업이나 계열회사, 대기업집단에 대한 투자를 금지한다. 타인 자본을 이용해 지배력을 무분별하게 확장하지 못하도록 자기자본의 200% 이내로 차입 규모를 제한하고, 펀드 조성 시 외부자금 조달 또한 40%로 제한했다.
정부가 여러 단서조항을 달아 CVC 보유를 허용하면서 주요 대기업들은 각 그룹의 상황에 따라 희비가 엇갈리고 있다. 롯데(롯데액셀러레이터)와 CJ(타임와이즈인베스트먼트), 신세계(시그나이트파트너스)는 이미 지주사 체제 밖에 CVC를 두고 있으며 LG(LG테크놀로지벤처스)는 해외법인 형태로 CVC를 운영 중이다. 지주사 체제가 아닌 삼성(삼성벤처투자)과 두산(네오플럭스), 네이버(스프링캠프), 카카오(카카오벤처스) 등은 계열사 형태로 CVC를 운영 중이다.
정부의 태도 변화로 가장 고심 중일 것으로 관측되는 곳은 롯데그룹이다. CVC를 지주사 체제 밖으로 빼낸 지 1년이 채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정부가 일반지주사의 CVC 보유를 허용한 까닭이다. 롯데그룹은 2017년 10월 지주사를 출범과정에서 금융계열사를 정리해야 했다. 롯데는 지난해 9월 말 롯데지주가 보유한 롯데액셀러레이터 지분 9.99%를 호텔롯데로 매각하면서 금융계열사 지분 정리를 완료했다. 현재 롯데액셀러레이터 최대주주는 호텔롯데(29.98%)이고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과 롯데케미칼이 각각 19.99%, 9.99%를 보유하고 있다. 외부투자자인 하나금융투자와 KB증권 또한 각각 지분 19.98%를 보유 중이다.
CVC를 지주사 체제 내에 두면 계열사와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고 그룹 차원의 전략적인 투자가 가능하다. 또 익금불산입제도(법인이 자회사로부터 지급받는 배당금의 일정 비율을 과세소득에서 제외)에 따라 세제 효과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외부투자자의 지분은 물론 신동빈 회장과 롯데케미칼, 호텔롯데로 흩어져있는 지분을 롯데지주가 전량 매입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다. 롯데그룹 관계자는 “CVC 지분을 호텔롯데에 매각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정부의 발표 또한 최근이라 지분을 다시 지주로 가져오는 계획은 아직 없다”며 “액셀러레이터를 호텔롯데 산하로 옮겼지만 스타트업 지원이나 펀드 운용 등에 있어서 별다른 변화가 없다”고 전했다.
최근 CVC를 설립한 신세계그룹에도 관심이 쏠린다. 신세계그룹은 지난 7월 신세계인터내셔날과 (주)신세계, 신세계센트럴시티 3개 회사가 공동 출자해 시그나이트파트너스를 설립했다. 신세계그룹의 CVC는 그룹과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신규사업 모색 및 선제적 투자를 통한 미래 성장동력 확보를 목적으로 설립됐다. 그러나 지주사 격인 (주)신세계 대신 신세계인터내셔날이 설립을 주도했다. 신세계인터내셔날 관계자는 “합자회사인데다 최근 설립된 만큼 지분 구조 변화 등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LG그룹은 주요 대기업 가운데 가장 CVC 설립에 관심이 높은 기업으로 평가된다. 구광모 LG그룹 회장은 취임 직후 미국 실리콘밸리에 해외법인 CVC인 LG테크놀로지벤처스를 설립했다. LG테크놀로지벤처스는 LG전자와 LG디스플레이, LG화학, LG유플러스, LG CNS 등 5개 계열사가 공동으로 출자해 설립됐다. LG그룹 관계자는 “LG테크놀로지벤처스는 실리콘밸리에 위치해 근처의 유망 글로벌 스타트업을 발굴해 투자하고 있다”며 “(국내 CVC 설립에 대해) 관심 있게 지켜보며 검토 중에 있다”고 전했다.
CJ그룹의 CVC인 타임와이즈인베스트먼트는 승계의 발판이 될 것으로 관측된다. 오너 3세가 지분을 보유한 CJ그룹 계열사 씨앤아이레저산업의 100% 자회사로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12월 말 이재현 회장의 동생 이재환 CJ파워캐스트 대표가 보유 중이던 타임와이즈인베스트먼트의 지분 51%를 넘기면서 씨앤아이레저산업이 지분 100%를 보유하게 됐다. 씨앤아이레저산업는 이재현 회장의 장남 이선호 CJ제일제당 부장이 51%의 지분을 보유한 최대주주로 있으며 이경후 CJ ENM 상무와 이 상무의 남편 정종환 CJ 부사장 또한 각각 지분 24%, 15%씩 보유 중이다.
타임와이즈인베스트먼트를 100% 자회사로 두게 된 씨앤아이레저산업은 기업가치가 높아질 것으로 관측된다. 타임와이즈인베스트먼트가 CJ그룹과 시너지를 내며 사업을 확장 중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오너3세의 지분 가치 또한 오를 가능성이 크다. 때문에 지분 변동이나 지주사 내 이동 등은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타임와이즈인베스트먼트와 관련, CJ그룹 관계자는 “CVC 설립에 관심이 높은 다른 기업들과 마찬가지로 그룹의 신사업 및 미래먹거리 발굴과 벤처 스타트업 생태계 투자의 선순환을 위해 설립됐다”며 “타임와이즈인베스트먼트의 지분 구조 변화나 지주사 내 새로운 CVC 설립 등의 계획은 없다”고 전했다.
고심이 깊은 대기업과 별개로 참여연대와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등 시민단체는 대기업의 CVC 보유 방침에 대해 강력 반발하고 있다. 금산분리 원칙을 무너뜨리는데다 펀드 출자라는 명목으로 사실상 순환출자를 허용하는 방안이라는 주장이다. 더불어 재벌기업의 벤처 생태계 잠식도 우려한다. 경실련은 지난 7월 30일 성명을 통해 “현재도 재벌들은 일반지주회사를 제외한 CVC를 운영하고 있고, 지주회사 체제 안에서도 금산분리 원칙을 준수하며 계열사의 편법적 순환출자 없이도 충분히 자금 조달이 가능하다”면서 “오직 재벌의 이익에만 부합하는 CVC 도입 방침을 즉각 철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반면 재계는 정부안의 단서조항에 대해 완화를 요구하고 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과거에 비해 많은 부분 규제가 완화된 것 같긴 하지만 외부 자금 유치 비율과 차입 규모 제한은 투자 여력이 없는 기업들에게 허들이 될 수 있다”며 “대기업의 경우 국내 벤처 발굴을 기반으로 동남아 등 스타트업 투자를 넓혀나가고자 하는 의지가 큰데, 해외투자를 하지 못하는 점은 아쉽다”고 전했다.
여다정 기자 yrosad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