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민 IOC 선수위원은 ‘스포츠뉴스 댓글 금지법’ 발의를 요청하기도 했다. 사진=연합뉴스
네이버와 다음이 이런 결정을 하게 된 배경에는 최근 여자 배구선수 출신 고 고유민 씨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 배경으로 악성 댓글이 거론되고 스포츠계를 중심으로 스포츠 뉴스 댓글을 금지해 달라는 요구가 빗발치면서 포털 사이트에 부담을 안겨준 것으로 보인다. 한국배구연맹은 지난 3일 네이버·다음·네이트에 스포츠 기사의 댓글 기능 개선을 요청한 바 있다.
악성 댓글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연예인들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일들이 발생하자 포털 사이트는 연예 기사의 댓글 기능을 폐지했다. 그러나 스포츠 기사의 댓글 기능은 그대로 유지했다. 똑같이 공인의 삶을 살고 있는데 연예인은 보호를 받고 스포츠 선수들은 악성 댓글에 온전히 노출된 상황에서 고유민 씨마저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 것이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배구연맹뿐만 아니라 프로축구연맹, 프로농구, 여자프로골프 등에서 포털사이트에 댓글 기능 개선을 요청하자는 공감대를 형성했고, 타 종목들과 연대 움직임을 벌였다. 특히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유승민 선수위원(현 대한탁구협회장)은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리고 스포츠뉴스의 댓글 금지법을 촉구했다.
‘(중략) 과거에는 비판도 스포츠인으로서 감내해야 할 부분이었으나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고 많은 부분들을 혁신해야 한다고 주문받고 있습니다. 그런 사회의 통념 속에 갈수록 운동선수들의 사회적인 책임은 더욱더 커져만 갑니다. 하지만 사회적 책임감에 비해 외부의 영향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시스템은 부족합니다. 특히 단순한 충고를 넘어선 인격모독성 비난, 특정인에 대한 근거 없는 여론몰이식 루머 확산 등은 선수들에게도 치명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중략) 선수들을 포함해 지도자들도 인간입니다. 특히 하루하루 루틴에 맞춰 식사 한 끼도 맘 편히 못하고 전략적으로 해야 하는 삶을 삽니다. (중략) 선수들을 위해 심각한 악플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게 부탁드립니다.’
이후 유승민 선수위원은 8월 3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에 ‘스포츠 뉴스 댓글 금지법’ 발의를 요청했다.
이예랑 리코스포츠 대표(가운데)는 “댓글 폐지만이 정답은 아니다”라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사진=리코스포츠 제공
가장 많은 팬들을 보유한 프로야구에서도 악성 댓글 관련 전쟁 선포가 잇따르고 있다. 최근 오지환(LG)의 아내 김영은 씨는 오지환을 향한 무분별한 악성 댓글에 법적 대응을 선언했다. 그는 “(수사 의뢰 대상자가) 너무 많아 1000명 단위로 신고하겠다”고 밝히면서 “선처는 없다. 한 번 고소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계속한다. 설령 합의금이 생기더라도 변호사한테 주고 나머지는 전액 기부하겠다”고 강경 입장을 나타냈다.
프로야구 LG 트윈스의 오지환은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아경기대회를 기점으로 심각한 악성 댓글에 시달려 왔다. 최근에는 오지환 개인을 넘어 가족까지 공격 대상이 됐고 아내 김 아무개 씨의 인스타그램 댓글과 다이렉트메시지를 통해 도를 넘는 악성 댓글이 지속적으로 발생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오지환, 채은성(LG 트윈스), 채태인(SK 와이번스) 등이 속한 에이전시 (주)플레이아데스도 8월 4일 성명문을 내고 “소속 선수들은 물론 그의 가족에 대한 악의적인 댓글과 다이렉트메시지 등을 통한 도를 넘는 비방에 강력하게 대처하겠다”고 밝혔다. 플레이아데스는 악성 댓글뿐만 아니라 선수들의 SNS 게시물, 다이렉트메시지, 쪽지 등을 통한 욕설, 명예훼손, 허위사실 유포, 명의 모용(사칭) 등에 대해 민형사상 책임을 묻는 등 적극적인 법률적 조처를 할 예정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양의지(NC 다이노스) 김현수(LG) 박병호 이정후(이상 키움 히어로즈) 강정호 등이 소속된 리코스포츠도 악성 댓글에 대한 법적 대응을 예고했다. 리코스포츠 이예랑 대표는 일요신문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악성 댓글들을 법적으로 대응하기까지 많은 시간 동안 고민했고, 소속 선수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입장을 전해 듣고 선수들의 의견을 반영했다고 설명한다.
“사실 악성 댓글로 법적 대응을 벌이는 건 선수 한 명이 움직이기에 부담이 크다. 회사에 소속된 선수에게 이런 부담을 안겨주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선의로 하는 일이라고 해도 오해를 살 수도 있고, 선수 개인이 법적 대응을 하기에는 시간적인 부담이 크기 때문이다. 최근 몇 달 동안 팬들로부터 다양한 항의를 받았다. 소속 선수에 대한 도 넘은 비난이 계속되고 있는데 왜 회사 차원에서 대응하지 않고 가만히 있느냐는 내용이었다. 회사 대표로서 팬들의 요구를 지켜만 볼 수 없었다. 소송이 시작되면 선수들 주위가 시끄러워질 수밖에 없는 터라 선수들의 허락이 가장 중요했는데 모든 선수들이 회사 차원의 법적 대응에 크게 공감했고 지지를 보냈다.”
이 대표는 포털 사이트의 댓글보다 야구 갤러리와 선수 SNS에 보내는 다이렉트메시지의 내용들이 훨씬 충격적이라고 설명했다.
“선수들이 받은 메시지들을 보면 세상에 처음 들어본 욕들이 그 속에 글자로 박혀 있더라. 물론 일부에서는 많은 연봉을 받는 선수들은 팬들의 비난도 감당해야 하는 몫이라고 말한다. 당연하다. 선수가 경기를 못해서 퍼붓는 비난은 얼마든지 받아들인다. 그러나 야구 커뮤니티나 선수한테 보내는 메시지들의 내용은 우리가 상상했던 수준보다 더 험악하고 악랄한 내용이 수두룩하다. 오죽했으면 그 글들을 읽다가 며칠 동안 속이 울렁거려 밥을 못 먹었겠나. 개인적으로 그런 욕을 보내는 사람들은 팬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대표는 포털 사이트의 댓글 기능 폐지가 정답은 아니라고 말했다.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어느 포털 사이트보다 네이버는 스포츠 뉴스 댓글 관련해서 철옹성 같은 이미지가 있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댓글을 잠정적으로 폐지한다고 해서 놀랐다. 그런데 댓글 폐지만이 정답은 아니라고 본다. 뉴스 댓글에 악성 댓글을 달지 못하는 이들은 야구 커뮤니티나 선수 개인 SNS에 다이렉트메시지를 보내 욕을 퍼부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가족을 폄훼하고 죽으라는 소리는 다반사고 인간의 존엄성을 뒤흔들 만한 비아냥거림이 보이지 않는 무기로 선수들을 공격하고 있다. 결국에는 선수가, 회사가 법적 대응으로 전쟁 선언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유명 스포츠 스타인 A 선수는 얼마 전 조용히 악성 댓글들을 모아 법적 대응을 진행했다. 그는 자신보다 자신의 가족에게 이루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엄청난 악성 댓글들이 쏟아지자 고소를 결심했고, 회사와 손잡고 악성 댓글을 단 수십 명의 명단을 작성해 담당 변호사가 소송을 진행했다. 경찰서에 조사를 받기 위해 불려 나온 악성 댓글러 중에는 10대만이 아닌 30대 전문직 종사자도 있어 A 선수를 깜짝 놀라게 했다는 후문.
A 선수는 이 일을 언론을 통해 공개하려 했지만 가족들이 또 다시 상처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외부에 알리지 않고 조용히 일을 마무리했다고 한다. 법의 심판을 받게 된 악성 댓글러들은 A 선수 회사에 연락해 선처를 호소했지만 A 선수는 단 한 명도 봐주지 않았다.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