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천문학자 퍼시벌 로웰이 자신의 저서 ‘조선,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우리 전통 갓을 설명한 대목이다. 1883년 한미수교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사절단의 일원으로 조선을 방문한 그는 우리나라의 갓에 깊은 인상을 받고 조선을 ‘모자의 나라’(The Land of Hats)라 불렀다.
강순자 기능보유자의 총모자 제작과정. 사진=문화재청 제공
로웰이 극찬한 ‘조선 모자’ 갓은 과연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을까. 갓 만드는 일을 ‘갓일’이라고 하는데, 무엇보다 섬세한 솜씨와 숙련된 기술, 그리고 탁월한 집중력과 끈기가 필요한 공예 작업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의 석학으로 불리는 이어령 박사는 저서 ‘우리문화 박물지’에서 갓을 “한국인의 이념이 응집돼 있는 ‘머리의 언어’”라고 표현한 바 있다. 이 말을 빌리자면 갓일은 “머리의 언어를 만드는 손의 미학”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갓과 갓일의 세계’로 한번 들어가 보자.
갓은 조선시대 남성의 대표적인 쓰개(머리에 쓰는 물건을 통틀어 이르는 말)를 이르는 순우리말이다. 한자로는 ‘입’(笠) 또는 ‘입자’(笠子)라고 표기한다. 원래 햇볕과 비바람을 가리기 위한 실용적인 모자였으나, 시대가 변화하면서 양반의 사회적 신분을 상징하는 용도로 사용됐다.
양태를 만드는 장순자 기능보유자. 사진=문화재청 제공
갓이 성인 남성들의 필수품으로 자리 잡다 보니, 조선의 상업 중심지였던 한양 운종가(지금의 광화문에서 종로3가에 이르는 거리)의 상설시장인 시전에도 갓을 파는 상점인 ‘입전’이 여럿 들어섰다. 풀이나 대오리(대나무를 실처럼 얇게 오려낸 것)로 만든 초립을 파는 ‘초립전’, 상중에 쓰는 흰 갓을 파는 ‘백립전’, 양반들이 썼던 검은 갓을 파는 ‘흑립전’, 동물의 털로 만들어 무관이 썼던 갓인 전립을 파는 ‘전립전’ 등이 대표적이었다.
갓일은 말총이나 대나무를 이용해 대우(컵을 뒤집어 놓은 듯한 갓의 모자 부분)를 짜는 ‘총모자일’, 머리카락처럼 가는 죽사(대나무를 실처럼 가늘게 쪼갠 조각)를 엮어 양태(갓 모자의 밑 둘레 밖으로 둥글넓적하게 된 부분)를 만드는 ‘양태일’, 대우와 양태를 조립해 명주천을 입히고 먹이나 옻을 칠해 완성하는 ‘입자일’ 등 크게 세 가지 공정으로 이루어졌다. 각 공정을 담당하는 장인은 각각 총모자장, 양태장, 입자장으로 불렸는데, 재료를 고르고 다듬는 탁월한 안목과 섬세한 솜씨, 그리고 숙련된 기술이 삼위일체가 되어야 갓이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됐다.
입자장 박창영 기능보유자의 작업 모습. 사진=문화재청 제공
조선 전기에는 갓일과 관련된 장인인 양태장과 입자장들을 상의원 등 중앙 관청에, 총모자장은 지방 관청에 소속시켜 갓을 만들도록 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태조가 중신인 정도전 등에게 초립을 하사한 일과 예종이 사은사에게 흑초립을 하사한 일 등이 기록돼 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들어 갓의 수요층이 사대부로부터 일반 서민에게까지 확대되면서 갓일하는 장인들도 관청에만 얽매이지 않고 사적인 생산을 도모하게 된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갓의 크기, 대우의 높이와 양태의 넓이에도 다양한 변화가 있었다. 효종 대에 이르러서는 문을 드나들 때 방해가 될 정도로 큰 갓이 유행해 이를 금지하기도 했다. 갓의 크기는 19세기 초 순조 대에 이르러 점차 줄어들어 고종 대에는 양태가 좁아진 소형 갓으로 변모했다.
갓은 조선의 개화기까지도 시중의 인기를 이어갔다. 그러나 1895년 단발령이 내려진 이후부터 급격히 쇠퇴해 장인의 수가 줄고, 생산지역도 제주도와 통영 등지로 축소됐다. 양복이 국내에 들어오면서 갓의 자리를 중절모와 맥고모자가 대체하게 된 것이다. 흥미롭게도 일제강점기 때 갓이 대량으로 팔린 적이 두 차례 있었는데, 한 번은 고종의 국상(1919년) 때, 다른 한 번은 순종의 국상(1926년) 때였다고 한다. 수많은 국민이 조의를 나타내기 위해 흰색의 갓, 백립을 썼기 때문이었다. 비록 나라는 빼앗겼지만, 갓을 통해 조선의 정신과 혼을 되살렸던 셈이다.
입자장 정춘모 기능보유자의 작업 모습. 사진=문화재청 제공
광복과 6·25전쟁을 겪은 이후 갓의 운명은 더욱 위태로워졌다. 갓은 사극에서나 볼 수 있는 드라마 소품이 되었고, 갓일 역시 옛 시대의 유산 정도로 여겨졌다. 정부는 갓 만드는 전통을 이어가기 위해 1964년 갓일을 국가무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해 보호에 나섰다. 하지만 갓에 대한 수요가 크게 줄어들면서 갓일 또한 점차 설 자리를 잃을 수밖에 없었다.
갓일은 그 기술이 매우 복잡하고 정밀해 이를 습득하는 데만 10년 이상 걸린다고 한다. 또 공정 하나하나에 고도의 집중력과 끈기가 필요해 ‘극한직업’ 중 하나라 할 만하다. 2020년 8월 현재 정춘모(입자장), 박창영(입자장), 장순자(양태장), 강순자(총모자장) 등 4인이 기능보유자로서 갓일의 명맥을 잇고 있다. 모두가 거의 평생을 갓을 만드는 데 바친 장인이다. 하지만 전통 문화유산을 계승하는 일은 몇몇 기능보유자와 그 전수자들만이 짊어지기에는 너무 버거운 짐이다. 국민의 일상으로부터 동떨어져 있는 유산은 결국 말라가는 샘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갓의 날’ 제정과 같은, 일년 중 하루라도 갓과 갓일을 우리 삶 속으로 이끄는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다.
자료협조=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