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을 나선 심 아무개 형사는 가장 먼저 주머니를 더듬어 담배를 꺼내 들었다. ‘한마디만 해달라’는 기자들을 피해 법원을 빠져나온 그는 길모퉁이에서 담뱃불을 붙였다. 심 형사는 한동안 내뿜은 담배 연기 너머를 말없이 응시했다.
이춘재 8차 사건 당시 수사 형사가 수사가 조작됐다는 혐의를 일부 인정하고 공식 사과했다. 8차 사건 범인으로 몰려 20년 옥살이를 한 윤성여 씨가 재심청구서를 들고 있다. 사진=최준필 기자
8월 11일 수원지방법원에서 이춘재 8차 사건 4차 공판이 열렸다. 당시 8차 사건을 수사했던 심 형사는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했다. 이날 심 형사는 당시 범인으로 지목된 윤성여 씨의 진술 조서를 조작하고 사흘 동안 잠을 재우지 않는 등 대부분 혐의를 인정하고 윤 씨에게 사과했다. 심 형사는 재판 마지막쯤 피고인석에 앉은 윤 씨를 바라보며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고 싶다”며 “윤 씨에게 죄송하다. 저로 인해서 이렇게 된 점에 대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사건 발생 이듬해인 1989년 7월 심 형사가 용의 선상에 오른 윤 씨를 임의동행 형식으로 경찰서로 데려와 사흘 동안 잠을 재우지 않고 조사한 끝에 자백을 받아 구속시킨 지 31년 만의 일이었다.
3시간 30분 정도 이어진 이날 재판에서 윤 씨의 변호를 맡은 박준영 변호사는 당시 수사기록을 바탕으로 심 형사를 강하게 추궁했다. 박 변호사는 증인 신문에 앞서 미국 검사 마티 스트라우드가 30년 전 자신이 기소한 글랜포드가 진범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그를 찾아가 진정어린 사과를 하는 영상을 보여주며 “증인도 용기 내 달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검찰 신문 때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대부분 혐의를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부인하던 심 형사는 변호인 신문 때 마음을 바꿔 대부분 혐의를 인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심 형사는 윤 씨에 대한 진술 조서를 작성할 당시 윤 씨를 앞에 두고 작성한 것이 아니라 자백 내용이 담긴 진술서와 수사기록을 바탕으로 자신이 임의로 작성했고 그 내용을 윤 씨가 열람하게 했다고 밝혔다. 심 형사는 윤 씨가 당시 글을 읽고 쓰는 데에 어려움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고도 말했다. 또 자신이 받은 세 번째 자필진술서는 자신이 아는 수사 내용을 불러줘 윤 씨가 자필로 쓰게 했다는 사실도 인정했다. ‘범인을 만들었다’고 시인한 셈이다. 심 형사는 신문이 이어지는 사이에 “잘못했다”고 덧붙였다.
이어 심 형사는 소아마비로 한쪽 다리가 불편한 윤 씨가 현장 검증 때 피해자 박 아무개 양 집의 담을 넘지 못했다고 진술했다. 윤 씨가 일했던 공업사와 피해자의 집을 실제로 걷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심 형사는 “국과수의 증거가 명확했다. 모두가 윤 씨를 범인이라고 생각하는 사회적 분위기와 국과수 결과 때문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는) 말을 하지 못했다. 윤 씨가 100% 범인인 줄 알았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심 형사는 윤 씨를 사흘 동안 잠을 재우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자신은 폭행이나 욕설, 가혹행위를 하지 않았다며 고인이 된 최 아무개 형사에게 책임을 떠넘기기도 했다. 심 형사는 “최 형사가 윤 씨의 첫 자백을 받았다. 사건이 검찰에 송치된 이후 윤 씨를 두어 대 때렸다고 최 형사가 말하는 걸 들었다”고 말했다. 또 심 형사는 자신은 체모 감정 결과가 담긴 국과수 감정서를 보지 못했고 결과만 전해 들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박 변호사는 “그렇게까지밖에 말하지 못하는 입장을 이해한다. 하지만 (심 형사가) 많은 것을 인정했다”고 답했다.
지난 7월 30일 심 아무개 형사가 기자와 만나 인터뷰를 하고 있다. 심 형사는 8월 11일 법정 증언을 끝낸 뒤 기자와 대화에서 “후련하다”면서도 “내가 그렇게까지 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나 자신에게 회의감이 든다. (윤 씨에게) 미안한 게 맞다”고 말했다. 사진=박현광 기자
증언이 끝난 뒤 법원 나온 심 형사는 기자와 40분 동안 이어진 대화에서 소회를 밝혔다. 심 형사는 “후련하다”면서도 “내가 그렇게까지 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나 자신에게 회의감이 든다. (윤 씨에게) 미안한 게 맞다”고 말했다. 잠을 안 재울 땐 어떤 방법을 썼냐는 질문엔 “정말 기억이 안 난다”고 했다. 윤 씨를 따로 만나 사과할 생각이 있느냐는 질문엔 “두고 보자”고 답했다.
당시 범인으로 몰려 억울하게 20년 동안 옥살이를 했다는 윤 씨에겐 심 형사의 법정 사과는 부족했다. 윤 씨는 “사과를 받긴 했지만 아쉬움이 남는다. 혐의를 전면 인정하고 진정어린 사과를 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전했다.
재판 마지막쯤 발언권을 얻은 윤 씨는 격앙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윤 씨는 심 형사를 향해 “대한민국 국민에게 사과할 의향은 없냐?”며 묻기도 했다. 이에 대해 윤 씨는 “물론 오늘 재판을 보면서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며 “내 사건도 내 사건이지만 초등생 실종 사건 생각이 나서 울컥했다”고 말했다.
이날 8차 사건의 진범 논란을 잠재울 것으로 기대를 모으는 현장 채취 체모 2점에 대한 감정 결과는 공개되지 않았다. 재판부는 “아직 법원에 공식적으로 감정 결과가 도달한 것은 아니다”라며 다음 기일에 결과를 공개하기로 했다.
다음 공판 기일은 8월 24일이다. 8차 사건 해결 공로를 인정받아 1계급 특진한 장 아무개 형사와 이 아무개 형사가 증인으로 채택됐다. 장 형사는 애초 8월 11일 공판에 증인으로 소환됐지만 나오지 않았다. 장 형사는 11일 일요신문과의 통화에서 “소환장을 받지 못했다. 다음 기일에도 소환장을 받으면 갈 것이고 아니면 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춘재 8차 사건은 1988년 9월 16일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 진안리 자신의 집에서 자던 박 아무개 양이 성폭행당한 뒤 살해된 사건을 말한다. 사건 발생 1년여가 지난 1989년 7월 25일 윤 씨는 범인으로 지목돼 경찰 수사를 받은 뒤 1심에서 무기징역을 받았다. 윤 씨는 경찰의 강압 수사로 허위 자백을 했다고 항소했지만 2심과 3심에서 기각됐다. 윤 씨는 20년을 복역하고 2009년 가석방됐다. 이춘재가 8차 사건 범인으로 밝혀진 뒤 윤 씨는 2019년 11월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박현광 기자 mua12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