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소년 변상일은 문명근 9단을 만난다. 약 3년 동안 수련했다. 스승은 “총 500판 정도 뒀다. 서울 가기 전 내게 ‘선에 덤 3집’으로 버텼다. 난해하고 복잡한 전투를 좋아했다. 기세가 좋아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라고 평했다. “어린 나이인데 다른 건 생각 않고 모든 관심이 바둑에만 있었다. 집중력이 굉장히 강했다. 일류기사로 성장할 자질이 보였다. 주변에 마땅한 상대가 없어 지역 일반인대회까지 나갔다. 어린 시절부터 승부기질이 강했다. 결승만 올라가면 실력이 두 점 정도 센 상대라도 반드시 이겼다. 경남 지역대회에서 이세돌 9단과 만나 5점 지도기를 벌여 불계승했다”라고 기억한다.
2012년 입단 직후 인터뷰 중인 15세 소년 변상일. 사진=사이버오로 제공
서울은 외로웠다. 홀로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슬럼프가 찾아왔다. 바둑이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르며 정체된 것도 원인 중 하나였다. 가끔 고향인 진주로 내려오면 엄마, 아빠와 함께 있는 시간이 너무 아까워 잠을 이루지 못해 함께 밤을 지새웠다. 초등학교 3학년까지 도장생활만 했다. 연구생에 들어갈 실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연구생 시험도 1, 2등이 아니면 들어갈 생각도 말아라”라는 스승의 엄명 때문이었다.
변상일은 커제와 같은 1997년생이다. 2012년 1월에 열린 제131회 일반입단대회를 통과했다. 영재입단대회가 생겨 신진서가 ‘1호’가 되기 6개월 전이었다. 동률 재대국까지 벌였다. 15세 입단이다. 이후엔 변상일 나이에 ‘일반’입단대회를 뚫은 기재는 없다. 대회장 입구에서 소식을 기다리던 어머니에게 “축하한다”는 말을 전하자 곧 울음을 터졌다. “기뻐서 우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마음고생이 생각나서”라며 계속 눈물만 흘렸다. 재능과 노력을 겸비했지만 변상일도 입단까지 10년 세월이 걸렸다.
첫 스승 문명근은 제자를 서울로 보내며 “빠르면 중2, 늦으면 중3에는 입단하고, 이후 경험을 쌓으면 최소한 국내 10위권 내에서 활약할 것”이라고 예언했었다. 당시에는 긴가민가했지만, 랭킹 10위안에 든 건 이미 몇 년 전이다. 올해 8월은 한국랭킹 4위에 올라있다. 신진서, 박정환, 신민준 다음이다. 2, 3년 전엔 다승, 승률 기록이 1위에 오른 적도 있었다. 그러나 실력에 비해 우승 운이 없었다. 2013년 신인왕전 우승으로 반짝하더니 이후는 2018년 JTBC 챌린지매치 3차 대회 우승이 마지막이다. 세계대회도 본선 8강까지가 한계였다.
올해 초 한국기원에서 우연히 마주친 변상일에게 “언제 인터뷰 한 번 해요”라고 말을 건넨 적이 있다. 변상일은 “저~요?”라며 느리지만 어눌한 말투로 말했다. 머리를 긁적이며 기자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글쎄요. 그런데 제게 뭐 물어보실 게 있으세요?”란다. 순간 말문이 막혔다. 뭘 물어봐야 할까. 그의 일과는 바둑계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안다. 대회가 없으면 매일 한국기원 4층 국가대표실에 있다. 공휴일에도 국가대표실에 앉아있는 유일한 프로기사다. 온종일 바둑을 두고, 연구하고, 저녁에도 인터넷 대국을 두다 잠든다.
누구보다 열심히, 꾸준히, 오래 공부하는 기사다. 인터넷 대국수도 그를 따라갈 이가 드물다. 하루에 28판을 이상 둔 날도 있다고 한다. 대국 상대를 찾아 한국과 중국 바둑 사이트를 오가며 대국한다. 매일 밤 바둑사이트에 출근도장을 찍는 그를 보고, 한 중국기자는 그를 ‘온라인상의 모범 노동자’라고 칭했다.
변상일이 2020년 8월 춘란배 16강전에서 양딩신을 꺾고 8강에 올랐다. 사진=한국기원 제공
지난 7월에 일어난 에피소드. 커제와 중국 바둑사이트에서 바둑을 뒀다. 100% 진 바둑을 변상일이 던지지 않고 뚜벅뚜벅 두어가자, 커제는 종반 ‘한 수 쉼’을 클릭했다. 그만 두고 던지라는 의사표시였다. 그러나 변상일은 개의치 않고 고맙다는 듯 착점을 이어갔다. 결국 바둑은 커제가 이겼지만, 인터넷 대화창은 발칵 뒤집혔다. 성품에서 극을 달리는 동갑내기다. 변상일은 어떤 도발에도 무심하다. 천성이다.
지난 6월에 벌어진 LG배 8강에 한국기사 6명, 중국기사 2명이 올랐다. 8월에 열린 춘란배에선 8강 대진표에 한국기사 3명, 중국기사 4명, 대만기사 1명이 자리했다. 두 대회 모두 8강에 오른 기사는 변상일과 커제 두 명뿐이다. 춘란배에선 중국랭킹 3위와 2위를 차례로 꺾었다. 24강전에서 미위팅을 가볍게 제쳤다. 16강전은 한국기사들이 가장 까다로워하는 양딩신을 만나 완승했다. ‘체질상 온라인 대국 환경이 변상일에게 맞았다’는 관측도 있다. 연말엔 자신의 한계를 넘어 세계대회 4강에 오를 수 있을까. 중국랭킹 5위 롄샤오와 8강전에서 만날 예정이다.
변상일은 “수읽기와 형세판단이 단점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저를 전투형이라고 말하는데 전투는 별로 안 좋아해요. 어려운 걸 싫어해서 쉬운 길을 찾아가는 편입니다. 쉬운 길만 찾아가다 쉽게 지죠”라며 웃었다. 천재들의 생각법의 핵심은 ‘무시하는 능력’이다. 필요 없는 요소를 판단에서 제외하는 힘이다. 그의 바둑에서 자주 보이는 ‘자유로운 발상’은 문제를 단순화하는 힘에서 나온다. 바둑 한 판을 두면서도 수많은 갈림길에 직면한다. 수읽기에도 가지치기가 필요하다. 변상일은 이런 선택이 빠르다. 인공지능과 대국도 초 단위로 즐긴다. 생활도 마찬가지다. 프로 입단해선 바둑 외적인 면은 대부분 무시하고 그만의 세계를 그렸다. 입단 전 10년, 이후 8년 8개월을 그렇게 지냈다. 이 정도면 ‘대기만성’의 시간으로 충분하다.
박주성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