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까지 롯데그룹은 주말마다 긴장감이 감돌았다. 신동빈 회장이 예고 없이 사업장을 불시에 방문하고 있기 때문이다. 계열사는 물론 그룹 내부에서조차 신 회장이 언제 어느 곳을 방문할지 예측할 수 없다. 롯데그룹 관계자는 “현장 방문은 늘 있는 일이지만, 최근처럼 자주 방문하는 경우는 없었다”고 말했다.
신동빈 회장의 현장 경영은 일본에서 돌아온 지난 5월부터 시작됐다. 같은 달 17일 서울 소공동 롯데백화점 본점 방문을 시작으로 최근까지 백화점, 마트, 하이마트, 아울렛 등은 물론 롯데제과와 롯데칠성, 롯데케미칼 공장 등 전 계열사 사업장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단순히 경영진과 만나 사업을 점검하는 게 아니라 직접 직원들을 만나고 제품을 구매했다. 잘 운영되는 부문은 격려하는 한편 “내부에서 공유된 내용이 현장에서 지켜지지 않는다”는 취지의 쓴소리를 남기기도 한다.
지난 6월 부산 해운대구 엘시티 랜드마크 타워에서 열린 시그니엘 부산 그랜드 오픈 행사에 참석한 롯데그룹 핵심 임원들. 사진 왼쪽부터 송용덕 롯데지주 부회장, 박성훈 부산시 경제부시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박양우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황각규 롯데지주 부회장. 사진=연합뉴스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도 현장을 자주 찾고 있다. 최근까지 이마트와 스타벅스 등 그룹 계열사 등을 연달아 방문했다. 계열사 임원과 직원들을 만나 주로 자신이 도와줄 수 있는 것이 있는지 묻는다. 조용히 사업장을 방문하는 신동빈 회장과 달리 정 부회장은 자신이 다녀갔다는 사실을 SNS를 통해 직접 알리는데, 단순 홍보에 그치지 않고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을 공유하거나 소비자들이 남긴 댓글에 답변을 해주는 방식으로 관심을 끌고 있다.
두 유통그룹의 상황은 다른 분야 기업들보다 현실적인 어려움이 크다. 온라인 유통사업의 급성장과 중국의 사드 보복, 일본제품 불매 운동에 올해 코로나19 사태가 겹치면서 사업에 직격탄을 맞았다. 롯데그룹은 백화점, 마트 등 실적 급감으로 오프라인 매장을 대거 줄이는 등의 구조조정에 착수했고, 신세계그룹의 캐시카우였던 이마트도 적자를 내는 등 고군분투하고 있다. 재계에선 두 그룹사 총수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위기 극복을 위한 대응에 나서고 있다고 해석하고 있다.
신동빈 회장과 정용진 부회장의 행보에서 다른 이유로 눈길을 끄는 지점도 있다. 호텔 사업을 둘러싼 움직임이다. 신 회장이 앞서의 전남 여수 롯데케미칼 공장 방문 이후 들른 곳은 또 있다. 한화호텔앤드리조트가 최근 새롭게 개장한 여수 벨메르 바이 한화호텔앤드리조트다. 신 회장은 이곳에서 1시간을 머물며 직접 시설 곳곳을 둘러봤다.
정용진 부회장은 지난 7월 14일 호텔 객실로 보이는 장소에서 바다를 배경으로 어딘가를 가리키는 자신의 사진을 올렸다. 이 사진 설명에 ‘대사 집어 넣기가 좀…’이라고 썼는데, 이후 사진 속 장소가 ‘시그니엘 부산’이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시그니엘은 롯데의 프리미엄 브랜드 호텔로, 부산 해운대에 위치한 시그니엘 부산은 지난 6월 개장했다. 현재 정 부회장의 SNS에선 이 사진이 삭제돼 있다.
지난 7월 14일 정용신 신세계그룹 부회장의 인스타그램에 올라 온 사진. 사진 속 장소는 롯데의 프리미엄 브랜드 호텔 ‘시그니엘 부산’으로 알려졌다. 사진=정용진 부회장 인스타그램
두 그룹사는 최근 호텔사업에 공을 들이고 있다. 시그니엘 부산은 호텔롯데가 지난 2017년 서울 롯데월드타워에 개장한 시그니엘 이후 두 번째로 선보이는 호텔이다. 지난 6월 개장식에 이례적으로 신동빈 회장과 황각규, 송용덕 롯데지주 부회장, 이봉철 호텔‧서비스BU장 등 그룹 수뇌부가 대거 참석하면서 눈길을 끌었다. 신 회장은 2주 만에 다시 이 호텔을 방문했는데, 이를 두고 그룹 차원에서 호텔 사업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신세계도 호텔사업을 대대적으로 확대하고 있다. 조만간 시그니엘 부산과 약 300m 거리에 위치한 ‘그랜드 조선 부산’ 개장을 앞두고 있다. 당초 7월 말 개장 예정이었으나 최근 집중 호우로 일정이 미뤄졌다.
정 부회장은 지난해 연말 인사에서 전략실 관리총괄 한채양 부사장을 신세계조선호텔 대표로 선임했다. 신세계그룹 관리총괄은 그룹 전체의 재무 업무를 맡는다. 이 보직을 맡은 임원을 호텔 사업 최전선으로 보낸 셈이다. 한 대표는 이후 인력 충원을 진행하는 동시에 새로운 호텔 브랜드 ‘그랜드 조선’을 내세웠다. 앞으로 ‘그랜드 조선 제주’, ‘포포인츠 바이 쉐라톤 서울 명동’ 등도 연내 개장할 계획이다. 내년 상반기에는 서울 역삼동에 ‘메리어트’와 합작해 신규 호텔을 연다.
호텔사업은 두 그룹의 모두에게 적자 사업으로 통한다. 지난해 호텔롯데는 392억 원, 신세계조선호텔은 230억 원의 적자를 각각 기록했다. 올해는 코로나19 여파로 적자폭은 더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그런데도 총수들이 직접 나서 호텔사업을 챙기는 이유는 그룹의 중장기 성장 동력으로 호텔사업을 낙점했기 때문인 것으로 해석된다. 증권사 한 연구원도 “호텔은 롯데와 신세계의 본업인 면세, 백화점, 식음료 등과 가장 큰 시너지를 낼 수 있다”며 “유통 채널뿐만 아니라 내수와 관광사업과도 연결된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대비한 투자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재계 일각에선 두 총수가 호텔 사업에 힘을 싣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는 해석도 나온다. 호텔롯데는 롯데그룹의 지배구조 개편 작업의 마지막 퍼즐로 통한다. 롯데그룹은 호텔롯데 IPO(기업공개)를 통해 일본롯데와의 고리를 끊어내는 계획을 세우고 있지만 업황 부진과 코로나19로 지연되고 있다. 신세계는 경영 승계와 연결된다. 정 부회장의 장남은 현재 미국 코넬대학에서 호텔경영학을 전공하고 있고, 지난해 여름엔 웨스틴조선호텔서울에서 실습을 하는 등 호텔사업에 관심이 높다. 아직 이르지만 신세계의 호텔사업 확대와 정 부회장 장남의 졸업 후 행보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이 재계의 분석이다.
호텔업계 한 관계자는 “호텔사업은 만성적자 사업이라 규모가 큰 그룹사가 대대적으로 사업을 확대할 경우 다른 사업이나 투자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위험이 있다”며 “롯데와 신세계 그룹이 주력인 유통사업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상황에서 두 총수가 직접 챙기고 나선 만큼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