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사자가 본인의 범죄 관련 증거를 인멸하는 것은 죄에 해당하지 않지만, 변호사 등 제3자가 이를 도울 경우 ‘증거인멸’에 해당한다. 당사자의 경우에도 증거인멸 자체가 죄가 되지는 않지만, ‘구속 사유’를 스스로 만드는 꼴이 된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 부인 정경심 동양대 교수의 요청을 받고 증거를 은닉한 혐의로 기소된 자산관리인 김 아무개 씨는 1심에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기도 했다.
변호사들의 자문을 구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자연스레 서초동 변호사 업계에서는 ‘증거인멸 컨설팅’이 생겨나고 있지만, 그만큼 변호사 업계 고심도 깊어지고 있다.
최근 법조계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 가운데 하나가 증거인멸 혐의다. 사진은 연출 이미지로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없다. 사진=일요신문DB
#이동재 전 채널A 기자 ‘증거인멸’이 발목
최근 구속 기소된 이동재 전 채널A 기자. 이 전 기자에게 적용된 혐의는 강요미수지만 구속된 이유는 증거인멸이라는 게 법조계 다수의 중론이다. 이 전 기자는 3월 말 MBC에서 검언유착 관련 의혹이 제기되자 각종 데이터 자료를 삭제했다. 사용하던 휴대전화 2대는 모두 초기화돼 있었고, 노트북은 포맷돼 각종 핵심 데이터가 삭제돼 있었다. 구속영장 실질심사에서 검찰은 구속 필요성으로 증거인멸을 강조했고, 법원도 발부 사유로 “증거인멸 우려가 높다”고 명시했다.
그러나 삭제된 자료들은 다시 확인할 수 없었다. 채널A는 삭제된 데이터를 복구하기 위해 외부 업체에 디지털 포렌식을 맡겼지만 데이터 복구에 실패했고, 검찰 역시 새로운 포렌식 기법을 적용해 자료 복구를 시도했지만 유의미한 자료는 확보하지 못했다.
휴대폰, 노트북, 스마트워치 등 몸에 지니고 다니는 디지털 기기가 늘어나는 만큼 증거인멸도 늘어나고 있다. 망치 등으로 휴대폰 액정 상단 부분을 집중 타격하거나, 휴대폰이나 하드디스크를 전자레인지에 넣고 파손시켜 포렌식 수사를 어렵게 하는 방법 등이 흔히 사용된다. 한강이나 바다에 버리는 방법도 많이 쓰인다.
실제 드루킹 특검 수사 때 경제적공진화모임(경공모) 회원들이 압수수색에 대비해 휴대폰 수십 대를 망치로 부숴 포렌식에 애를 먹기도 했다. 당시에는 특검이 일부 유의미한 자료를 확보할 수 있었지만 ‘항상 그렇지는 못하다’는 게 검찰의 고민이기도 하다.
의뢰인들은 한 발 더 나아가 전문 업체를 찾기도 한다. 강력한 자기장을 이용해 하드디스크 데이터를 완전 삭제하는 ‘디가우징’이나, 수차례 데이터를 덮어 씌워 포렌식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안티포렌식’도 익히 알려진 기법이다.
범죄 스릴러 드라마 ‘비밀의 숲’에서 범죄자가 증거인멸을 위해 한강에 버린 휴대폰을 경찰이 찾아내는 장면이다.
#“휴대폰부터 숨겨라”
가장 중요한 디지털 기기는 단연 휴대폰이다. 특정 시점의 위치는 물론, 전화·문자·SNS 기록 등은 거짓말을 할 수 없도록 만드는 강력한 증거다. 그만큼 휴대폰 속 자료부터 인멸하는 시도가 잦다.
검찰 수사 대상에 자주 오르내리는 인사들이 카카오톡 등 SNS를 사용하지 않는 것도 이를 우려하기 때문이다. 1년에 검찰에 3~4번 이상 불려간다는 한 경제계 인사는 “일부러 카카오톡도 사용하지 않고 휴대전화도 자주 바꾸는 편”이라며 “나에 대한 자료 노출을 최소한으로 하기 위해 문자도 거의 하지 않고 전화로만 얘기한다”고 말했다.
기업 사건으로 가면 증거인멸은 스케일이 달라진다. 경영권 불법승계 의혹 및 분식회계 혐의로 검찰 수사 대상이 됐던 삼성바이오로직스는 공장 바닥을 뜯고 그곳에 노트북과 서버를 숨겼다가 들통이 났다. 다른 대기업은 검찰 수사에 대비해 미리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교체하기도 했다. ‘회장님’ 등의 단어가 포함된 자료는 자동삭제하거나, 보안을 이유로 아예 2년마다 하드를 교체하는 곳도 생겨났다.
그럼에도 변호사 업계는 고민이다. 의뢰인에게 자문을 해줄 경우 처벌받을 수 있고, 그렇다고 불리한 증거를 그대로 놔두라고 얘기하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대형 로펌의 한 변호사는 “처음 의뢰인이 와서 문의를 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증거인멸을 해야 하는지 여부”라며 “죄를 지은 게 어느 정도 확실해 보일 경우 불리한 증거를 스스로 없애는 것은 불법이 아니라는 점 정도만 알려주지만 더 정확한 방법을 묻는 경우가 많아 로펌 차원에서도 ‘조심해야 한다’고 당부할 정도”라고 설명했다.
전관 출신의 한 변호사는 “의뢰인 상담 초반에 구체적으로 대응 전략을 컨설팅해줘야 계약까지 한다”며 “다소 위험한 것은 알지만 불리한 증거를 없애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 중요한 상담 과정”이라고 언급했다.
그렇다고 해서 증거인멸이 꼭 도움되는 것만은 아니다. 불리한 증거를 인멸하려다가 유리한 증거까지 삭제돼 안 좋은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증거인멸 과정에 가족을 동원하면 가족이 처벌 받을 수 있고, 꾸준히 발달해 온 포렌식 기술 탓에 삭제된 증거 자료가 복원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한국 수사기관의 디지털 포렌식 기술은 상당한 수준으로 알려졌는데, 자칫하면 증거를 인멸하려다가 구속과 동시에 재판에서는 양형 가중 사유가 될 수 있다.
앞선 대형 로펌 변호사는 “한 의뢰인이 상담 전에 불리한 증거를 없앤다고 휴대폰을 한강에 버렸는데, 그 안에 유리한 자료도 남아 있어서 이를 구하려고 수백만 원 주고 잠수부를 고용해 휴대폰을 찾으려고 한 적도 있다”며 “갈수록 증거를 통해 다투는 법정 공방이 늘어날 것이기에, 증거인멸로 구속되거나 처벌되는 경우가 더 늘어날 수밖에 없다”고 내다봤다.
서환한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