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가 바꿔놓은 일상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비대면 결제, 원격진료 및 원격수업, 홈트레이닝, 온라인 쇼핑 확대 등 변화는 다방면에서 이뤄지고 있다. 또한 코로나19 확산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해외여행이나 장거리 이동을 못하게 된 것 역시 커다란 변화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슈퍼리치들의 경우에는 꼭 그렇지만도 않다. 이들은 국경을 넘는 데 예전보다 점점 더 막대한 비용을 지출하고 있다. 바로 투자이민을 위해서다.
최근 ‘CNN 트래블’은 전세계 슈퍼리치들이 보다 안전한 나라로 투자이민을 신청하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다만 이들의 목적은 특정 나라의 국적이나 시민권을 취득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보다는 자산을 전세계에 분배해 세제 혜택을 받는 동시에, 전염병이 대유행할 경우 제약없이 마음대로 여행할 수 있는 자유도 원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황금 비자’라고도 알려진 슈퍼리치들의 투자이민프로그램(CIP)이야말로 현재 가장 눈에 띄는 성장 산업이라고 CNN은 말했다.
전세계 부자들이 투자이민으로 가장 선호하고 있는 나라는 아드리아해의 몬테네그로(위)와 지중해에 위치한 섬나라 키프로스다.
지난 5~10년 동안 투자이민을 신청하는 전세계 부자들(200만~5000만 달러(약 23억~600억 원) 이상의 자산가들)의 일차적인 동기는 이동의 자유, 세제 혜택, 쾌적한 생활환경, 보다 좋은 교육환경, 합법적인 권리로서의 자유 등이었다.
하지만 최근 코로나19로 상황이 획기적으로 바뀌면서 일부 부자들 사이에서는 다른 목적으로 투자이민을 신청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의료 서비스를 통해 확실하게 건강을 관리할 수 있고, 유행병에 잘 대응할 수 있으며, 가족들의 안전이 보장된 곳을 중심으로 투자이민 장소를 물색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 글로벌 시민권 및 거주지 자문회사인 ‘헨리앤파트너스’의 도미니크 볼렉 아시아 지사 대표는 ‘CNN 트래블’ 인터뷰에서 “부자들은 의료 서비스와 전염병 대응에 대해서 특히 우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앞으로 코로나19 같은 유행병이 또 발생하지 말란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볼렉은 “부자들은 5년에서 10년을 바라보고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 그들은 부와 웰빙의 측면에서 100년 이상을 내다보고 미리 계획을 세운다”고 강조했다.
이런 폭발적인 관심은 ‘헨리앤파트너스’를 통한 투자이민 문의나 신청 건수에도 잘 나타나 있다. 실제 올해 상반기(1~6월) 동안 관련 문의는 전년 동기 대비 49% 급증했으며, 2019년 4분기와 2020년 1분기를 비교했을 때 상담 후에 신청까지 한 사람들의 수는 42% 증가했다. 역시 이유는 단 하나, 코로나19 대유행에 따른 불안심리 때문이었다.
현재 부자들이 가장 선호하고 있는 나라는 아드리아해의 몬테네그로와 지중해에 위치한 섬나라 키프로스다. 두 나라는 2019년 4분기 대비 2020년 1분기의 신규 신청이 각각 142%, 75% 증가했다. 부자들 사이에서 꾸준히 인기인 몰타 역시 지속적인 관심을 받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볼렉은 “특히 키프로스와 몰타 시민권을 취득할 경우에는 (지리적으로 가깝기 때문에) 유럽연합에 속한 모든 국가를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데다 실제 유럽에 정착할 수 있어 더욱 인기다”라고 설명했다.
호주와 뉴질랜드의 투자이민프로그램도 인기가 높지만 이 경우는 조금 다른 이유 때문이다. 바로 탁월한 위기관리 능력이다. 볼렉은 “뉴질랜드는 영국이나 미국처럼 일반적으로 선호되는 다른 나라와 비교했을 때 코로나19 대응 능력이 훨씬 뛰어났다. 그래서 최근 호주와 뉴질랜드 투자이민에 대한 문의가 크게 늘고 있다”고 분석했다.
다만 호주와 뉴질랜드 투자이민은 사실상 부자들에게만 가능한 이야기다. 막대한 비용 때문이다. 가령 호주로 투자이민을 갈 경우에는 100만~350만 달러(약 12억~41억 원)가, 그리고 뉴질랜드의 경우에는 190만~650만 달러(약 22억~77억 원)가 필요하다.
호주(위)와 뉴질랜드의 투자이민프로그램이 인기가 높은 이유는 바로 탁월한 코로나19 위기관리 능력 때문이다.
투자이민을 신청하는 사람들의 국적도 다양해지고 있다. 지난 9개월 동안 가장 많이 증가한 국적은 미국, 인도, 나이지리아, 레바논 등이었다. 이 가운데 특히 미국인들의 신청은 2019년 4분기 대비 2020년 1분기에만 700%가량 급증했다. 그런가 하면 중국과 중동 부자들의 신청은 계속해서 꾸준한 추세를 보이고 있다.
앞서 말했듯 부자들이 투자이민을 가기에 적당하다고 꼽고 있는 곳은 또 다른 전염병이 발생할 경우 가족과 함께 숨어버릴 수 있는 안전하고 외진 곳이다. 당장은 접근하지 못하더라도 다음 유행병에 대비하고 싶은 바람에 따른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국제금융자문회사인 ‘에이펙스 캐피털 파트너스’의 설립자인 누리 카츠는 ‘CNN 트래블’에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따르면 작은 국가들일수록 유행병에 보다 쉽게 대응하고 관리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라고 말했다.
덧붙여서 그는 “미국과 같은 나라는 완전히 통제불능이었던 반면, 작은 나라들은 그렇게 큰 타격을 받지 않았다. 예를 들어 도미니카, 안티구아 바부다, 세인트키츠 같은 카리브해 국가에서는 코로나 확진자가 거의 나오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때문에 부자들이 건강관리나 생활환경 측면에서 그런 부분에 더 관심을 갖게 되는 건 당연하다고도 말했다.
카리브해에 위치한 작은 섬나라들이 인기 있는 이유는 또 있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투자이민 비용과 함께 지리적으로 폭넓은 여행의 자유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볼렉은 “만약 500만 달러(약 59억 원) 혹은 1000만 달러(약 118억 원) 정도의 순자산가라면 카리브해는 훌륭한 선택지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방글라데시 부자는 여행의 자유 측면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최악의 여권을 소지하고 있다. 이런 경우에는 어디를 가든 늘 비자를 발급 받아야 한다. 하지만 안티구아 바부다 정부에 수수료를 포함해서 10만 달러(약 1억 원)를 투자하면 4인 가족이 약 4~6개월 만에 두 번째 여권을 발급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여기에 덤으로 비자 없이 어디든 갈 수 있는 이동의 자유를 얻게 된다.
카츠는 또 다른 트렌드에도 주목했다. 혹시 미래에 또 다른 유행병이 발발할 경우, 특정 국가의 여권 소지자들의 입국이 거부되는 사태를 막기 위해 비교적 안전한 나라의 여권에 투자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코로나19 확진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했을 당시 유럽 국가의 여권 소지자들은 대부분 미국을 방문할 수 없었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키프로스 여권 소지자는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대부분의 유럽연합 국가를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었다. 카츠는 “사람들은 현재 ‘좋아, 당분간은 이런 일이 계속해서 발생할 거야’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면서 원하는 생활을 계속해서 누릴 수 있도록 시민권을 포함한 자산 포트폴리오를 조정할 방안을 구상하고 있다. 언제든 유럽을 자유롭게 여행하고 싶은 사람들은 일종의 (시민권이나 체류) 지위를 얻는 방법에 대해 고려하기 시작했다”라고 말했다.
카츠는 지난 2017년의 경우 1년 동안 투자이민프로그램을 통해 약 5000명 정도가 시민권을 취득했다고 추산했다. 그러면서 아직 공식적인 기록은 집계되고 있지 않지만 2020년에는 벌써 그 수가 2만 5000명에 육박한다고 말했다.
세인트키츠 같은 카리브해 국가에서는 코로나19 확진자가 거의 나오지 않았다. 부자들이 작은 섬나라를 선호하는 이유 중 하나다.
물론 아무리 부자라고 해서, 또 돈만 지불한다고 해서 투자이민 신청이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또한 허가가 날 때까지 시간이 걸리는 것 또한 현실이다. 볼렉은 “아무리 러시아의 올리가르히라고 해도 단순히 정치인에게 100만 달러만 건네주고 바로 여권을 취득할 수는 없다. 그런 경우는 절대 없다”고 강조했다.
나라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긴 하지만 보통 실사 과정은 짧게는 수개월에서 길게는 수년까지 걸린다. 또한 일반적으로 신청자들은 거주권이나 시민권이 승인되기 전까지 재산을 합법적으로 벌어들였는지 확인하기 위해 철저한 재정 및 범죄여부 심사를 받는다. 가령 몰타의 경우, 엄격한 4단계 검증 과정이 실시된다. 요컨대 신청자는 순자산과 자금 출처를 해당 국가의 정부에 공개해야 하고, 출생국가와 현재 시민권을 보유하고 있는 국가, 그리고 최근 10년 동안 6개월 이상 거주한 모든 국가에서 발행하는 범죄경력증명서를 제공해야 한다. 몰타의 시민권 신청 거부율은 지원자의 20~25% 정도며, 만약 시민권을 취득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될 경우에는 단호하게 신청이 거부된다.
현재 투자이민프로그램의 취지에 대해서는 찬반 논란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투자이민프로그램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 프로그램이 결국은 양쪽 모두에게 윈-윈이라고 주장한다. 부자들은 개발도상국에 자연재해, 산업붕괴, 유행병, 또는 단순히 경제의 특정 분야를 발전시키는 데 필요한 자본을 제공해주고, 그 대가로 자산을 여러 곳에 분산시킬 수 있는 기회와 더불어 위기 발생시에 더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자유를 보장받으며, 안전을 누릴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된다.
하지만 일부 전문가들은 그게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고 지적했다. 지난 2018년 국제투명성기구는 몰타, 키프로스, 포르투갈, 스페인의 투자이민 제도를 비판하면서 “해당 국가의 투자이민프로그램은 투명성을 바탕으로 한 정밀한 조사나 실사를 하지 않은 채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무분별하게 시민권을 판매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워싱턴 DC 소재 싱크탱크인 이민정책연구소의 케이트 후퍼 부정책분석가 역시 비슷한 의견을 내놓았다. 그는 “투자이민프로그램이 종종 의혹을 불러일으키는데 이는 일부 국가가 부적절한 실사 과정을 공개하지 않기 때문이다”고 꼬집었다. 다만 이런 경우는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 후버는 “지난 몇 년 동안 제대로 심사를 하지 않은 채 시민권을 부여한 사례는 얼마 되지 않는다. 손에 꼽을 정도다”라고 덧붙였다.
한편 덴버대학의 국제경제 및 윤리학 교수인 조지 드마티노는 투자이민프로그램이 사회적 불평등을 악화시킬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이런 프로그램들은 이미 특권을 가진 사람들에게 또 다른 특권을 부여한다”고 지적하면서 “다른 나라로 이주할 필요가 전혀 없는 사람들에게는 시민권을 획득할 수 있는 기회를 쉽게 허용하는 반면, 자국에서 끔찍한 경제 상황에 직면해 이주가 절실히 필요한 사람들은 이러한 프로그램 혜택에서 완전히 배제되고 있다”고 비난했다.
투자이민 프로그램(CIP)이란? 억 소리 나는 기부로 시민권 획득 투자이민프로그램(CIP)이란 특정 국가의 시민권 및 거주권을 취득하기 위한 투자 프로그램을 말한다. 국가별로 일정 금액을 해당 국가에 기부하고, 그 대가로 그 나라 국민으로서의 권리를 취득하는 것이다. 이때 기부 형식은 일반적으로 한 나라의 경제에 상당한 기여를 하는 식으로 이뤄진다. 가령 고가의 부동산을 매입하거나, 일자리를 창출하거나, 인프라를 개발하거나, 또는 국채에 투자하는 방법 등이다. 최초의 CIP는 1984년 카리브해의 세인트키츠 앤 네비스에 의해 처음 도입됐다. 이후 오스트리아, 키프로스, 몰타, 몰도바, 세인트루시아, 터키, 안티구아 앤 바부다, 도미니카, 그리스, 몬테네그로 등 수십 개국이 동일한 프로그램을 마련해 이민자들을 받아들이고 있다. 자격 조건은 나라별로 상이하다. 어떤 나라들은 지원자들에게 자국에 비영리단체를 설립하거나, 지역 일자리를 창출하는 회사를 설립하거나, 특정 기간 동안 자국에 거주하도록 요구하기도 한다. 또 어떤 나라들은 신청자들이 국채, 부동산, 개발 프로젝트에 원격으로 투자할 수 있도록 해주기도 한다. 비용 역시 수십만 달러부터 수백만 달러까지 다양하다. 다음은 CNN이 소개한 국가별 투자이민 최소 조건이다. 도미니카공화국: 10만 달러(약 1억 원) 세인트루시아: 10만 달러(약 1억 원) 안티구아 바부다: 13만 달러(약 1억 5000만 원) 그레나다: 15만 달러(약 1억 7000만 원) 세인트키츠 앤 네비스: 15만 달러(약 1억 7000만 원) 몬테네그로: 29만 4000달러(약 3억 5000만 원) 포르투갈: 29만 4000달러(약 3억 5000만 원) 불가리아: 58만 8000달러(약 7억 원) 캐나다: 89만 4000달러(약 10억 원) 미국: 90만 달러(약 10억 5000만 원) 키프로스: 253만 달러(약 30억 원) 영국: 260만 달러(약 30억 7000만 원) |
김민주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