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거래소 코스닥시장본부는 지난 8월 6일 기업심사위원회(기심위)를 열고 신라젠에 대한 상장적격성 심사를 진행했지만 결론을 내지 못했다. 기심위가 오후 2시부터 5시간 넘게 이어진 마라톤 회의에도 결정을 못하고 추후 속개하기로 한 건 이례적인 일이다. 상폐 여부는 다음 회의에서 결정하기로 했는데, 향후 일정은 미정이다.
부산광역시 북구 신라젠 본사. 사진=연합뉴스
신라젠은 2006년 부산대 산학협력에서 출발한 바이오벤처 기업이다. 문은상 전 신라젠 대표가 2013년 경영권을 넘겨받으며 항암 바이러스 간암 치료제 ‘펙사벡(Pexa-Vec)’ 개발을 본격화했다. 펙사벡은 암세포만 선택적으로 파괴하는 신약으로 국내외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
2016년 신라젠은 기술특례상장으로 코스닥에 입성했다. 펙사벡이 ‘꿈의 신약’이라는 평가를 받으면서 기대감이 높아졌다. 시장의 본격적인 관심을 받기 시작한 것은 2017년 하반기부터다. 펙사벡이 신약 출시 전 마지막 관문인 글로벌 임상 3상을 진행한다는 소식에 주가가 15만 2300원까지 올랐다. 당시 신라젠의 시가총액은 10조 원. 코스닥 시총 2위였다.
그런데 지난해 8월 미국에서 펙사벡 임상 중단을 권고 받으면서 주가가 고꾸라졌다. 불과 나흘 만에 주가가 4만 4550원에서 1만 5300원으로 반토막이 났다. 펙사벡이 신라젠의 유일한 신약 파이프라인이었기에 파장은 더욱 컸다.
여기에 문은상 전 대표 등 임원들의 횡령‧배임 의혹까지 불거졌다. 전 경영진이 2014년 3월 페이퍼컴퍼니를 통해 챙긴 것으로 추정되는 부당이득은 1947억 원이다. 신라젠 자기자본의 약 344%에 달하는 규모다. 신라젠 주식 거래는 경영진의 횡령‧배임 등 실질 심사 사유가 발생한 지난 5월 초 이후 정지됐다. 지난 6월 거래소는 신라젠을 상장적격성 실질심사 대상으로 결정했다.
#기심위가 결론 내리지 못한 이유
기심위가 결론을 내리지 못한 이유는 다수의 소액주주에게 큰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으로 전해진다. 지난 7월 거래소가 신라젠을 실질심사 대상으로 결정한 이후 신라젠 소액주주들은 크게 반발하고 나섰다. 연일 집회를 열고 거래재개를 촉구했다. 지난해 말 기준 신라젠 소액주주는 16만 8778명이다. 이들의 주식 보유 비율은 87.68%로, 약 7800억 원이 현재 신라젠에 묶여 있다. 상폐가 결정되면 이들 주식이 한 순간에 휴지조각이 될 수 있다.
투자자들은 거래소 책임론도 주장하고 있다. 신라젠이 기술특례 제도를 통해 코스닥시장에 상장하는 과정에서 거래소는 신라젠의 기술평가를 AA등급으로 매겼다. 기술특례 상장은 유망 기업의 코스닥 진입을 돕기 위해 2005년 도입한 제도다. 거래소는 제도 도입 이후 문턱을 지속적으로 낮춰왔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신라젠을 포함해 이 제도를 통해 증시에 발을 들인 기업들이 심각한 주가 부진이나 임상 실패 등의 문제가 연달아 터지면서 현재 이 제도 운영과 심사에 불신이 높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신라젠의 경영개선 의지도 거래소 판단 유보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관측된다. 신라젠은 지난 7월 초 경영진을 대폭 물갈이했다. 특히 양경미 신라젠 부사장까지 전격 사퇴 의사를 밝히는 등 예상 밖 결정을 내렸다. 양 전 부사장은 문은상 전 신라젠 대표 후임으로 선임이 유력했던 인사다. 신라젠 안팎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양 전 부사장은 문 전 대표가 외부에서 영입해온 인물이라 사퇴 전까지 거래소 측과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신라젠의 운명, 짊어진 새 경영진
앞으로 예상할 수 있는 신라젠의 운명은 △상장적격성 인정 △개선기간 부여 △상장폐지 가운데 하나다. 기심위가 신라젠의 상장적격성을 인정할 경우 다음 날부터 곧바로 거래가 재개된다. 개선기간을 부여할 경우 최장 12개월 후 다시 심의 및 의결 과정을 거쳐 상장폐지 여부를 결정한다.
관련 업계에선 경영진 비위 행위를 근거로 기심위가 상장폐지를 결정할 가능성은 낮다고 관측하고 있다. 전·현직 경영진은 이미 사퇴했고, 그와 가까운 양경미 부사장까지 물러난데다, 이들의 횡령·배임 혐의에 대한 법원의 판단도 아직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은상 전 대표가 지난 4월 27일 오후 서울 양천구 서울남부지검에서 조사를 마친 뒤 청사를 나서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결국 관건은 오는 9월 7일로 예정된 신라젠 임시주주총회다. 신라젠 임시주총의 안건은 △본점 소재지의 서울 이전을 포함한 정관 일부 개정 △사내이사 주상은·이권희 및 사외이사 홍승기·정영진·남태균 선임 △비상근 감사 정성미 선임 △이사 보수 한도 승인 △감사 보수 한도 승인 △주식매수선택권 부여 등이다.
거래소는 신라젠의 새 경영진이 내놓을 경영방침과 수익성 및 재무상태 건전성 등을 보고 경영 지속성 여부를 판단할 가능성이 높다. 신라젠 측은 “사내이사 후보 주상은 부사장, 이권희 전무는 전직 경영진들이 물러난 뒤 경영지배인으로 선임됐고, 사외이사진 역시 법률전문가와 식품의약품안전처 출신의 외부 전문가로 교체하는 등 전 경영진들과의 연결고리를 완벽히 끊어냈다”고 강조하고 있다.
다만 안건 가결 여부는 오롯이 개인투자자들에 달려있다. 보통결의 사항인 사내·사외 이사 및 비상근 감사 선임 등은 출석 주주의 과반의 찬성이, 정관 일부 개정 및 주식매수선택권 부여 등 특별결의 사항은 출석주주 3분의 2 이상이 찬성해야 한다. 주주 대부분이 개인투자자들인 만큼 이들의 참여율이 신라젠의 운명을 가르게 되는 셈이다. 다만 임시주총까지 남은 시간은 3주도 채 되지 않는다. 의결권대행업체 등에 의뢰해도 시간이 촉박하다.
앞서 기심위가 결정을 미루는 과정에서 신라젠이 기술특례 상장으로 증시에 입성한 만큼 기술잠재력을 봐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신라젠 신약 펙사벡이 간암 임상3상은 중단했지만, 신장암과 대장암, 고형암, 흑색종 등 다른 암종에서는 임상이 진행 중이라, 미래 가치에 대한 기대감이 여전히 높은 상황에서 증시 퇴출을 결정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다. 바이오업계는 추후 열릴 기심위에서도 다시 이 내용이 다뤄질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다른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펙사벡의 가치, 즉 신라젠의 기업가치가 어떻게 판단되느냐 역시도 중요한 변수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