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택은 2019년 1월 2년 계약을 맺으며 “계약이 끝나면 현역에서 물러난다”고 예고한 바 있다. 사진=연합뉴스
박용택은 현역 마지막 계약서에 사인하면서 “끝까지 LG에서 최선을 다하고 LG 선수로서 명예롭게 은퇴하겠다”고 선언했다. 올해가 바로 그 계약이 끝나는 시즌이다. 박용택은 올 시즌까지만 뛰고 20년 가까이 누빈 그라운드를 떠난다.
그런 그를 둘러싸고 ‘은퇴 투어’ 논란이 일었다. 은퇴 투어는 메이저리그에서 시작된 문화다. 은퇴를 앞둔 선수가 마지막 시즌을 치르는 동안 홈뿐 아니라 그동안 뛰었던 모든 원정지의 팬들에게도 작별 인사를 하고 박수를 받을 수 있는 기회다. 야구선수라면 누구나 꿈꿀 만한 장면이기도 하다.
하지만 박용택의 은퇴 투어 가능성이 제기되자 일부 야구팬이 반기를 들고 나섰다. “박용택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인터넷 댓글창이 삽시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은퇴 투어’는 왜 값진 문화인가
은퇴 투어는 지역 연고가 뿌리 깊은 한국에서 시기상조로 여겨졌던 문화다. 하지만 2017년 ‘라이언 킹’ 이승엽이 전환점을 만들었다. 한국 프로야구 홈런의 역사를 새로 쓰고 떠나는 이승엽을 위해 KBO와 10개 구단이 팔을 걷어 붙였다. 소속팀 삼성 라이온즈는 물론 나머지 9개 구단도 흔쾌히 은퇴 투어 개최에 합의했다. 그해 8월 11일 대전 한화 이글스전을 시작으로 정규시즌의 마지막 한 달이 ‘이승엽’이라는 전설의 이름으로 들썩거렸다.
KBO리그 역대 최다승 투수이자 유일하게 200승-3000이닝 고지를 밟은 송진우 한화 코치는 당시 이승엽의 은퇴 투어 개최를 두 팔 벌려 환영했다. “미국에서는 이미 종종 해왔던 행사다. 우리 프로야구가 메이저리그에 비해 역사는 길지 않지만, 각 구단이 힘을 합치고 마음을 연 덕분에 이승엽이 은퇴 투어를 할 수 있는 것 같다”며 “우리 프로야구 문화가 더 앞으로 나아가는 계기가 될 것 같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이승엽의 은퇴 투어는 같은 해 은퇴를 선언한 NC 다이노스 이호준에게도 좋은 영향을 미쳤다. 이호준 역시 동갑내기 이승엽과 마찬가지로 “2017시즌까지만 선수 생활을 하겠다”고 은퇴를 예고한 뒤였다. 그런 이호준을 위해 NC가 아닌 다른 구단들도 행사를 준비했다.
이호준이 2000년부터 2012년까지 뛰면서 전성기를 보낸 SK 와이번스가 가장 먼저 깜짝 이벤트를 준비했다. 그러자 이호준과 별다른 인연이 없던 두산 베어스도 그해 NC와 마지막 시리즈에서 양팀 선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기념 꽃다발을 전달했다.
광주일고 출신 이호준이 프로 생활을 시작했던 고향팀 KIA 타이거즈 역시 전광판에 ‘처음 그리고 마지막, 제2의 인생을 응원합니다’라는 문구를 띄워 작별 인사를 건넸다. 야구계는 이승엽과 이호준의 은퇴 장면을 보면서 달라진 은퇴 문화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자신의 은퇴 투어가 반발 여론에 부딪히자 결국 박용택은 직접 나서 진행하지 않을 뜻을 밝혔다. 사진=연합뉴스
#박용택의 은퇴 투어는 왜 논란이 됐을까
올해 은퇴하는 박용택도 이승엽과 이호준에 이어 이 같은 명장면을 만들어 낼 다음 주자로 꼽혔다. 2018년 양준혁을 넘어 역대 KBO리그 통산 최다 안타 기록을 경신한 타자다. 지금 박용택이 때려내는 안타 하나하나가 모두 리그 신기록이다.
무엇보다 한 팀에서만 10년 이상 간판으로 뛰다 은퇴하는 선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암흑기가 유독 길었던 LG는 끊임없이 리빌딩을 시도하느라 베테랑 선수를 여러 차례 정리했다. 박용택은 그 거센 태풍을 모두 이겨냈다. 늘 팀의 주전으로 살아남았다. 한 팀의 전통과 역사를 품은 프랜차이즈 스타는 그런 이유로 더 귀한 대접을 받을 필요가 있다.
은퇴 투어도 결국은 ‘전설을 전설답게’ 예우하기 위한 이벤트다. 특히 이승엽 이호준 박용택처럼 은퇴 시기를 먼저 정하고 그 결심을 실행에 옮긴 선수만 그 영광을 누릴 기회를 얻는다. 그동안 많은 레전드가 은퇴했지만, 이승엽과 이호준만 전국에서 은퇴 기념 행사를 했던 이유다.
하지만 지난 8월 7일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선수협)가 박용택의 은퇴 투어를 추진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다른 구단 일부 팬들이 반기를 들었다. ‘은퇴 투어’라는 상징적 단어는 이승엽 정도 선수에게나 어울린다고 항변했다. “박용택은 LG 구단의 레전드일 뿐 국가대표로도 많은 업적을 남긴 이승엽과 다르다. 은퇴 투어를 하기에는 자격이 부족하다”는 논리였다.
또 일부에선 “2009년 타격왕에 오른 박용택이 타율을 지키기 위해 시즌 마지막 경기에 출전하지 않았고, 당시 LG 사령탑이던 김재박 감독은 (타격왕 경쟁자였던) 두산 홍성흔을 전 타석 고의4구로 걸렀다. 스포츠맨십을 어긴 사건이었다”며 자격론에 불을 붙였다. 이에 박용택 뒤에는 ‘졸렬하다’는 과격한 수식어가 붙기도 한다.
“레전드 선수의 은퇴를 기리는 행사가 KBO리그 문화로 정착하기를 기대한다”며 의욕적으로 행사를 추진하던 선수협은 화들짝 놀라 “확정된 사안은 아니었다”고 한 발 물러섰다. 선수협의 제안을 받고 다른 9개 구단에 협조를 요청하려던 LG 구단도 당황한 건 마찬가지다. 다른 팀 감독과 선수들이 “박용택은 은퇴 투어의 주역이 될 자격이 있다”고 옹호했지만, 어느새 박용택은 원치 않은 논란의 주역이 돼 야구계를 뜨겁게 달궜다.
#“내가 졸렬한 게 맞다” 스스로 물러난 박용택
결국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박용택이 직접 나섰다. 스스로 은퇴 투어를 사양하기로 결정하고, 지난 8월 11일 잠실구장에서 간이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는 “(‘타격왕 밀어주기’ 논란 이후) 10년 만에 처음으로 야구 기사 댓글을 봤다. 웬만한 건 다 읽었다고 보면 된다”며 “은퇴 투어를 지지하는 팬이든 반대하는 팬이든 팩트는 대부분 정확하더라. 누구든 충분히 부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문제”라고 했다.
하필 박용택이 오른쪽 햄스트링 통증에서 회복하느라 2군에 머물던 시기다. 그는 “은퇴 투어 논란을 보면서 모처럼 과거를 되돌아봤다. 2009년에 얻은 ‘졸렬택’이라는 별명 때문에 스마트폰으로 ‘졸렬하다’라는 단어의 뜻을 찾아봤는데, 내가 그 당시엔 그 뜻과 똑같은 행동을 한 게 맞다고 생각한다. 그 이후 ‘졸렬하게’ 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고 털어 놓았다.
음주운전을 비롯한 사적인 구설수 하나 없이 19년 프로 생활을 해온 박용택이다. 다만 2009시즌의 마지막 한 경기가 그의 마음속에 여전히 가장 큰 짐이자 후회로 남아 있다. 야구 관계자들은 “그 경기 이후 박용택이 그라운드 안팎에서 더 성숙해진 것 같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박용택은 “은퇴 투어 대상으로 거론되는 것 자체가 내겐 영광이다. 진심으로 고맙고 감사하다”고 먼저 인사한 뒤 “하지만 지금은 내 은퇴 투어 문제로 류중일 감독님과 선수단을 어렵게 해선 절대 안 되는 시기다. 매 경기 소중하게 순위 싸움을 벌여야 할 때라 내 은퇴 투어 문제는 여기서 마무리했으면 좋겠다”고 선을 그었다.
사실 논란이 불거지고 공론화된 순간, ‘열린 적도 없는’ 박용택의 은퇴 투어는 이미 빛이 바랜 셈이다. 박용택 자신도 이미 잘 알고 있다. 리그에서 가장 많은 안타를 때려낸 선수가 ‘LG의 레전드’라는 프레임과 10년 전 단 한 경기의 판단 착오에 갇혀 여론의 벽을 넘지 못했다. 구단과 선수 모두 마음의 짐과 상처를 떠안았다.
그런데 이 부담은 LG와 박용택에게만 지워진 게 아니다. 앞으로 은퇴하게 될 두산의 레전드, KIA의 레전드, 그 외 다른 구단의 레전드들도 똑같은 압박감을 느끼게 됐다. 이 때문에 박용택은 “팬들에게 단 하나 조심스럽게 부탁드리고 싶은 건 무언가의 흠집 탓에 후배 선수들의 은퇴 투어 행사가 무산되진 않았으면 좋겠다는 거다. 충분히 ‘졸렬하지’ 않은 방식으로 아름답게 선수를 보내줬으면 좋겠다”며 “나는 그저 올해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하고 헹가래를 받고 은퇴하겠다는 꿈만 꾸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박용택 은퇴 투어 논란의 아쉬움
박용택의 은퇴 투어가 무산되는 과정은 많은 야구 관계자들에게 아쉬움을 남겼다. 한 현역 선수는 “박용택 선배는 그 자체로 충분히 존중받을 만한 업적을 남겼는데, 왜 이승엽 선배와 비교를 해서 가치를 깎아내리는지 모르겠다. 이호준 코치님 때처럼 작은 이벤트를 하는 것도 허락되지 않는다면 앞으로 어느 레전드가 은퇴할 때 그런 행사를 할 수 있겠느냐”고 불만을 표현했다.
타 구단 관계자 역시 “선수협에서 은퇴 투어를 제안했다는 건 곧 선수들이 박용택을 적임자로 꼽았다는 의미인데, 여론에 밀려 무산된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타격왕 등극 과정에 오점이 있었던 건 이해하지만 기술이 좋아 충분히 그 경지에 오를 만한 선수였던 것 또한 인정해야 하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이어 “프로야구 선수들의 결정이 대중의 압박으로 무산된 게 유감이다. 그 ‘여론’이 온라인상에서 적극적인 일부 팬의 의견이라는 점을 배제할 수 없어서 더 그렇다”고 했다.
메이저리그 뉴욕 양키스와 보스턴 레드삭스는 100년이 넘은 앙숙이다. 보스턴 팬에게 양키스 전 마무리투수 마리아노 리베라는 최악의 선수였다. 리베라의 등판은 곧 보스턴의 패배를 의미해서다. 양키스의 주전 유격수였던 데릭 지터도 그들에겐 원수나 다름없었다. 지터는 1995년부터 2014년까지, 양키스 역사상 최고의 캡틴으로 인정받았다.
그렇게 이를 갈며 살아온 보스턴의 극성팬들이 리베라와 지터의 마지막 보스턴 원정 때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들에게 야유가 아닌 기립박수를 보냈다. 그것이 적을 인정하는 그들의 방식이다.
야구는 기록으로 승부를 가리지만, 기억으로 전설을 만든다. 자신의 레전드를 존중하고 싶다면, 다른 이의 레전드부터 인정하는 것이 순리다.
배영은 중앙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