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김해의 한 주차장에서 고려인 조직간 다툼이 벌어지고 있는 장면. 고려인 국내 유입이 매해 늘고 있어 고려인 폭력조직이 전국적으로 커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사진=경남경찰청 제공
경남지방경찰청 관계자는 “전국에서 37명이 모였다는 건 조직원이 전국에 퍼져있다는 말”이라며 “아직 규모가 다 파악되지 않았지만 수사 중”이라고 설명했다.
최근 발생한 고려인 조직 사이의 난투극은 자국민이 운영하는 당구장과 사설 도박장 이권을 두고 벌인 싸움이었다. 6월 13일 안산파 고려인 10여 명이 김해 동성동 한 당구장에 들이닥쳐 당구장 ‘보호비’ 상납과 사설 도박장 수익 20%를 요구했다. 당구장 한쪽엔 사설 도박장도 운영되고 있었다. 이를 거절한 것은 부산·경남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김해 동성동파’ 고려인들이었다.
두 조직 사이의 한바탕 기싸움이 있고 일주일 뒤인 6월 20일 안산파로 알려진 고려인 37명이 전국 각지에서 쇠파이프나 야구방망이 등 무기를 들고 김해 당구장 근처 주차장에 모였다. 이 소식을 들은 동성동파는 인근 조직원을 27명까지 불러 모아 골프채, 철근 등을 나눠가지며 결전을 준비했다. 안산파를 먼저 발견한 동성동파가 차량 7대로 안산파를 에워싸면서 두 조직이 맞붙었다.
두 조직의 싸움은 2분여 만에 끝났다. 인근에 있던 김해중앙지구대 소속 김남철 경사가 무기를 든 외국인이 여럿 모여 있는 것을 수상하게 여겨 빠르게 개입했다. 제복을 입은 경찰이 등장하자 본국 송환을 두려워하는 조직원들은 무기를 버리고 서둘러 달아났다. 다만 안산파 조직원 고려인 2명이 중상을 입어 치료를 받기도 했다.
경남지방경찰청과 김해중부경찰서는 합동으로 100명 규모의 전담수사팀을 꾸려 한 달여 만에 현장에 있었던 64명 가운데 1명을 제외한 63명을 일망타진했다. 붙잡힌 고려인 조직원들은 시비가 붙어 우발적으로 일어난 싸움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경남경찰청 관계자는 “CCTV에 무기를 들고 범행을 모의하는 모습이 담겼다. 우발적이라고 하는 말은 거짓말일 수밖에 없다”고 답했다.
#러시아 마피아와 연계?
국내에 거주하고 있는 한 고려인은 “2000년대 초부터 러시아에서 대마초 같은 마약을 들여오는 사건이 숱하게 있었다. 고려인들이 자경단을 만들어 단속을 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페이스북이나 고려인이 쓰는 메신저 등을 통해 대마초 거래를 시도하는 장면. 사진=제보자 제공
김해중부서 관계자는 “조직원들은 대부분 본국에 있는 가족들이 보복당할까 두려워서 입을 꾹 다물고 얘길 하지 않는다. 우두머리가 국내에 있는지 본국에서 지시를 하는 건지는 아직 파악이 안 된다”며 “계좌 추적을 해도 돈이 흘러 들어간 흔적이 나오지 않았다. 굉장히 철두철미한 것 같다”고 전했다.
고려인은 러시아를 비롯해 옛 소련 국가에 살고 있는 한민족을 일컫는다. 다시 말해, 외국 국적을 가진 동포다. 최근 고려인의 국내 유입은 매해 증가 추세다. 법무부 통계에 따르면 국내에 살고 있는 우즈베키스탄, 러시아, 카자흐스탄 국적의 고려인은 2014년 기준 2만 5030명에서 2018년 기준 7만 2243명으로 188% 증가했다. 이와 비교해 같은 시기 국내 체류 외국 국적 동포 수는 70만 4536명에서 87만 8665명으로 24.7% 증가했다.
국내에 거주하고 있는 한 고려인은 “카자흐스탄이나 우즈베키스탄 등 옛 소련 국가의 경제 사정이 좋지 않다. 한 달에 우리 돈 20만 원 정도 번다”며 “먹고 살기 위해서 점점 더 많이 한국으로 들어오고 있는 추세”라고 전했다.
이어 “2000년대 초부터 러시아에서 마약을 들여오는 사건이 숱하게 있었다. 고려인들이 자경단을 만들어 단속을 하기도 했다”며 “옛 소련 국가는 현재 우리나라 1960~1970년대 정도 상황이다. 돈만 주면 범죄경력을 삭제하거나 고려인이 아닌데 고려인으로 출생 증명을 변경할 수 있다. 고려인도 아닌데 신분 세탁을 해 한국에 들어오는 경우도 많다”고 설명했다.
#‘취업차별’ 범죄 유혹 빠지기 쉬워
고려인의 취업 허용 업종이 제한돼 있고, 안정적인 장기 체류가 쉽지 않아 폭력조직 생활 등 범죄 유혹에 빠지기 쉽다는 분석도 나온다.
법무부는 출입국 관리법 시행령에 따라 외국 국적 동포에게 F-4(재외동포) 비자와 H-2(방문취업) 비자를 발급해왔다. 하지만 법무부는 러시아 국적을 가진 고려인에게만 큰 제약 없이 F-4 비자를 발급해주고,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등 옛 소련 국가 국적의 고려인에겐 대학 졸업 등 요건을 갖추지 못하면 H-2 비자를 부여한다. F-4 비자가 있으면 취업이 자유롭고 체류 기간에 제약이 없지만 H-2 비자를 받으면 건설업, 축산업, 양식 어업 등 단순노무분야 39개 업종으로 취업이 제한되고, 국내 체류도 3년 이상 연속으로 할 수 없다.
경남 김해의 한 주차장에 차를 타고 김해 동성동파 조직원들이 모여 들고 있는 장면. 사진=경남경찰청 제공
이번 사건에서 검거된 조직원은 대부분 러시아 외 옛 소련 국가 국적 고려인으로 H-2 비자를 받은 상태로 알려졌다. 이번 사건의 조직원들은 평일엔 각자 일을 하다가 주말에 모여 조직 활동을 해왔다.
한 고려인 단체 관계자는 “대부분 고려인은 근면성실하게 지내지만, H-2 비자를 받으면 정규직을 구하기가 거의 불가능하고 건강보험 문제가 발생하는 등 디아스포라(근거지를 잃고 유랑하는 사람들)의 삶을 산다”고 설명했다.
이어 “F-4 비자를 얻기 위해선 지방에서 4대 보험이 들어가는 정규직으로 취업해 1년에서 2년 동안 성실히 일해야 하지만, 고려인에겐 대부분 일용직이 주어진다”며 “타국에서 받는 차별을 피해서 왔지만 한국에서도 차별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경찰, 고려인 폭력조직 파악 중
김해 고려인 난투극 사건을 해결한 경남경찰청과 김해중부서는 부산·경남 지역의 고려인 조직 규모를 파악하고 이외의 범죄 혐의를 찾는 등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김해중부서 관계자는 “이번 사건 전까지는 고려인 관련 조직범죄는 없었다.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건을 계기로 고려인 조직의 규모를 파악 중에 있다. 마약 범죄 관련 혐의가 있는지 말씀드리기 어렵다”며 “해외 국적자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범죄 행위를 한다면 붙잡아 돌려보낸다는 생각을 심어주도록 수사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전했다.
우리나라에서 고려인이 가장 많이 밀집한 지역이 안산이다. 1만 7000명 정도가 거주하고 있다. 전국구 조직이 ‘경기 안산파’로 불린 이유이기도 하다. 안산을 관할하는 경기남부지방경찰청 관계자는 “아직까지 파악된 고려인 조직 동향은 없다. 이번 김해 난투극 사건을 계기로 예방 차원에서 수사를 진행할 것”이라고 답했다.
박현광 기자 mua12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