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가 정기 인사철이 아닌 8월에 임원 인사를 한 것은 회사 창립 이후 처음이다. 다수의 롯데그룹 관계자들도 언론보도를 통해 이 소식을 접했을 정도로 예상치 못한 인사였다. 그룹 차원에서 이사회 개최 사실과 안건 등을 철저히 함구했다. 사전에 구체적인 내용을 통지 받은 건 롯데 각 계열사 대표들과 그룹 핵심 인사들이 전부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번 인사에서 가장 주목을 끈 것은 황각규 부회장의 퇴진이다. 황 부회장은 앞으로 경영에선 손을 떼고 롯데지주 이사회 의장 역할만 유지하게 된다. 롯데그룹 관계자는 이번 임원인사에 대해 “그룹의 생존과 미래 성장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혁신과 변화가 시급하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의 오른팔이자 그룹 2인자로 통하는 황각규 롯데그룹 부회장이 최근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2017년 롯데월드타워에서 열린 롯데지주 주식회사 공식 출범 기자간담회에서 인사말을 하는 황각규 부회장. 사진=연합뉴스
#‘뉴롯데’ 추진을 위한 퇴진?
롯데에서만 40년을 근무한 황각규 부회장은 신동빈 회장의 최측근이자 롯데그룹 2인자로 통했다. 신 회장과의 인연은 30년 전부터 시작됐다. 일본 노무라증권과 일본 롯데상사에서 일하던 신 회장이 1990년 호남석유화학(현 롯데케미칼)에 상무로 입사하면서 황 부회장이 신 회장 직속으로 배치됐다. 이후 1995년 신 회장이 그룹 기획조정실 부사장으로 자리를 옮길 때도 전에 없던 ‘국제부장’ 직함을 만들어 황 부회장을 데리고 갔다.
신동빈 회장이 추진한 굵직한 사업에는 늘 황각규 부회장이 있었다. 특히 황 부회장은 롯데그룹을 재계 5위까지 올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M&A(인수합병) 현장을 진두지휘했다. 신 회장이 한국 롯데그룹 회장을 맡은 후 ‘뉴롯데’ 기틀을 다지는 시기에도 황 부회장이 늘 함께했다. 새 컨트롤타워인 경영혁신실을 신설하면서 이 조직의 수장을 맡았고, 그룹 지배구조 개편 작업도 도맡았다. 2015년 롯데그룹 경영권 분쟁은 물론, 신격호 명예회장의 장례위원장을 맡는 등 늘 신 회장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있었다.
재계에선 황각규 부회장 퇴진과 관련해 롯데그룹이 분위기 반전을 위한 카드를 꺼냈다고 평가한다. 실제 롯데그룹이 받아들인 2분기 성적표는 처참하다. 그룹의 두 축인 롯데쇼핑과 롯데케미칼의 실적이 급감했다. 롯데쇼핑 2분기 영업이익은 14억 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에 견줘 98.5% 줄었고, 지난 4월 전 계열사가 사활을 걸고 출범한 통합몰 ‘롯데온’도 현재까지는 부진을 겪고 있다. 롯데케미칼 영업이익 역시 329억 원으로 90.5% 급감했다.
재계 관계자는 “이번 인사에는 사드 보복과 일본 불매운동, 코로나19를 연달아 겪으며 롯데가 느낀 위기감이 100%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며 “오프라인 점포 중심의 유통업에 대한 의문부호가 짙어지는 가운데 변화가 필요했던 것으로 해석된다”고 말했다.
실적과 별개로 신동빈 회장이 새롭게 추진하는 경영 방식과 황각규 부회장의 역할이 미묘하게 어긋나 있었다는 평가도 나온다. 신 회장은 2017년 그룹에 BU(Business Unit) 체제를 도입했다. 주요 사업을 유통, 화학, 식품, 호텔 및 서비스 4개 부문으로 나누고 최근까지 체제 안정화 작업을 해왔다. 올해 초부터는 각 계열사에 독립경영과 혁신을 강조하는 등 각 BU장과 계열사 대표들에게 책임과 힘을 실었다. 그러나 황 부회장은 오랫동안 그룹의 2인자이자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면서 그룹 전반의 경영 및 의사결정 등에 영향력을 발휘해왔다. 신 회장이 구상하는 ‘뉴롯데’에 완전히 걸맞은 역할이 아닌 셈이다.
황각규 부회장의 퇴진과 함께 단행된 롯데지주 조직개편은 이 같은 시각에 힘을 싣는다. 롯데는 지주의 핵심 부서였던 경영전략실을 경영혁신실로 개편하면서 규모를 줄였다. 전략 기능이 축소됐고 최소한의 업무만 남았다. 앞으로 경영혁신실은 신사업 발굴과 계열사 간 시너지 창출 전략을 모색하는 데에 집중하고, 다른 업무는 모두 BU로 넘겨주게 된다. 조직 개편과 함께 일부 지주 인력도 계열사 현장으로 이동하게 됐다.
복수의 롯데그룹 관계자들은 신동빈 회장과 황각규 부회장은 이번 인사를 천천히 준비하고 있었다고 평가한다. 그룹 측도 공식적으로 황 부회장이 직접 용퇴를 결정했다는 입장이다. 실제 황 부회장은 이번 이사회에서 “지난해 말 그룹 변화를 위해 물러나려 했지만 인사권자의 의견과 코로나19 사태 등이 있어 이제야 떠나게 됐다”는 취지로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롯데그룹의 한 임원은 “8월 인사 단행은 사실상 신 회장의 결정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인 만큼 여러 의견이 나오는 것 같다”며 “그러나 이미 오래 전부터 두 사람 사이에 교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황 부회장에 대한 신 회장과 그룹 내부의 신망은 두터웠다. 일각에서 거론되는 문책성 인사 또는 불화 등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황각규 부회장 후임으로 이동우 롯데하이마트 대표가 내정됐다. 사진=연합뉴스
#연말 정기인사에서 대규모 조직개편, 임원인사 관측
황각규 부회장의 후임은 이동우 롯데하이마트 대표가 내정됐다. 이 대표는 오는 연말정기인사에서 부회장 승진도 점쳐지고 있다. 이 대표는 그룹의 핵심인 황각규, 송용덕 부회장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인물로 통한다. 2017년엔 과거 롯데월드 대표 시절 직원을 상대로 했던 폭언이 뒤늦게 논란이 되면서 사의를 표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사회의 반대로 자리를 유지했고, 이후 승진 후보자로 이름을 꾸준히 올려왔다.
이동우 대표가 그동안 올려온 성과를 크게 인정 받고 있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롯데그룹이 추진하는 ‘온라인화’를 선제적으로 도입한 건 하이마트다. 오프라인 점포도 메가스토어와 옴니스토어로 개편하면서 실적을 끌어올렸다. 온라인에선 상품 판매, 오프라인에선 고객이 머무는 시간을 늘리기 위한 콘텐츠를 개발했는데, 이 전략은 이 대표가 주도적으로 추진해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올해 2분기 롯데하이마트는 영업이익 693억 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해 51.1% 늘었다. 롯데하이마트 실적은 연결기준으로 롯데쇼핑 실적에 반영된다. 이번 2분기 롯데쇼핑의 실적이 ‘대참사’까지 번지는 것을 막은 게 하이마트였던 셈이다.
롯데그룹 측은 이번 인사가 ‘세대교체’는 아니라는 입장이다. 이동우 대표는 1960년생(61세)으로, 롯데인재개발원장으로 자리를 옮긴 롯데지주 경영전략실장인 윤종민 사장과 류제돈 신임 롯데물산 대표이사 전무와 동갑이다. 김현수 신임 롯데렌탈 대표이사 사장이 1956년생(65세)으로 가장 연장자다. 최근 재계에서 ‘40~50대 CEO(최고경영자) 선임’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을 고려하면 안정적인 변화를 추진한 것으로 보인다.
롯데그룹은 올해 연말 정기인사에서 후속 임원인사를 추진할 방침이다. 대규모 조직개편과 세대교체가 이때 단행될 것이란 관측에 힘이 실리고 있다. 롯데그룹의 다른 관계자는 “향후 성과 중심의 인사가 단행될 가능성이 높아진 만큼 그룹 긴장감도 높아지고 있다”며 “이번 인사로 인해 ‘혁신’과 ‘성과’에 대한 메시지가 확실하게 전달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