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팩(SPAC·기업인수목적회사)은 기업의 인수합병(M&A)을 위해 설립된 일종의 페이퍼컴퍼니로 특별한 사업활동 없이 투자만 받은 후 주식시장에 상장된다. 상장된 스팩은 3년 내 비상장 기업과 합병해야 하며 피합병 기업은 스팩과 합병함으로써 우회적으로 상장할 수 있다. 현대무벡스의 경우도 형식적으로는 NH스팩14호가 존속법인이지만 실질적으로는 현대무벡스가 현 사업을 유지하면서 상장하게 되는 셈이다. 스팩이 3년 안에 합병하지 못하면 상장폐지되고 투자금은 기존 투자자들에게 반환된다.
#현대그룹, 스팩 상장 선택한 까닭
현대그룹은 수년 전부터 현대무벡스 상장을 추진해왔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2018년 말 현대무벡스 사내이사에서 사임하고, 현대무벡스가 사외이사를 신규 선임한 이유도 상장에 대비해 전문경영인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서였다. 상장을 하려면 전체 이사의 4분의 1 이상이 사외이사로 선임돼야 한다(관련기사 [단독]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현대무벡스 사내이사 사임한 까닭은?…상장 작업 가시화되나).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은 2018년 말 전문경영인 체제 구축을 위해 현대무벡스 사내이사에서 사임했다. 2018년 11월 금강산문화회관에서 열린 금강산 관광 시작 20돌 기념 행사에서 기념사를 낭독한 현정은 회장. 사진=현대그룹 제공
현대그룹은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증시 변동성을 우려해 스팩 상장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올해 호반건설을 비롯해 적지 않은 기업들이 코로나19 여파로 기업공개(IPO·상장) 절차를 중단하기도 했다. 스팩 합병을 통해 상장하면 피합병 기록이 남지만 직접 상장하는 것보다 변수가 적은 편이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상장을 하면 기관 수요예측을 통해 제시된 공모희망가를 기준으로 공모가가 결정되지만 스팩 상장은 기업이 필요한 자금에 맞게 스팩이 보유한 현금을 확인하고 상장을 진행할 수 있다”며 “또 상장을 하면서 예상치 못한 변수가 발생하는 경우가 있는데 스팩을 통한 상장은 일정이 변경될 수는 있어도 상장 자체에는 큰 변수가 없는 편”이라고 전했다. 현대그룹 관계자는 “다양한 방안을 검토하면서 더 효율적이고 신속한 점 등을 고려했다”고 밝혔다.
#상장 목적은 승계 자금 확보? 신성장 동력 확보?
현대무벡스는 현정은 회장의 장녀 정지이 현대무벡스 전무와 차녀 정영이 현대무벡스 차장이 경영수업을 받고 있는 곳이다. 지난해 말 기준 현대무벡스의 최대주주는 지분율 45.88%의 현정은 회장이고, 정지이 전무와 정영이 차장은 각각 5.26%와 0.18%를 갖고 있다. 현대무벡스가 현 회장 일가의 지분 승계를 위한 자금줄 역할을 한다는 말이 나오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하지만 지난 4월 현대엘리베이터가 현대무벡스의 전환사채 일부를 사들인 후 전환권을 행사해 현대무벡스 지분율을 40.26%로 늘려 최대주주에 올랐다. 전환사채는 회사의 주식으로 전환할 수 있는 권리가 부여된 채권이다. 전환사채로 전환된 주식을 포함해 계산하면 현재 현정은 회장의 현대무벡스 지분율은 39.31%, 정지이 전무는 4.50%다.
NH스팩14호 공시에 따르면 합병 후 현대엘리베이터와 특수관계인의 현대무벡스 지분율은 67.7%가 된다. 여기서 현대엘리베이터의 지분을 제외한 현 회장 일가의 현대무벡스 지분율은 약 29%가 되지만 정 전무 개인의 지분율은 3% 수준에 불과하다. 따라서 상장 목적이 당장의 승계 자금 확보가 아니라 현대무벡스 사업 확장을 통한 신성장 동력 확보라는 쪽에 힘이 실린다. 현대그룹 관계자는 “투자재원 확보를 통한 사업확장과 미래성장 동력 육성 가속화를 위해 상장을 추진하는 것”이라며 “경영 승계와 관련이 없고, 승계 관련해 진행 중인 작업도 현재 없다”고 전했다.
현대무벡스가 상장한다고 당장 많은 현금이 유입되는 건 아니다. 지난 6월 말 기준 NH스팩14호의 자본금은 168억 원이지만 현금성 자산은 1억 원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대부분 금융자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장 자체만으로도 회사에 긍정적인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분석이 적지 않다. 금융권 관계자는 “어떤 형태로든 자본금이 들어와 재무구조가 개선되면 이를 활용해 더 낮은 금리로 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다”며 “또 상장사로서 관심을 받으면 사업 확장 및 대외 인지도 향상에도 효과를 볼 수 있다”고 전했다.
#현대무벡스에 달린 현대그룹의 미래
2016년 현대그룹이 현대증권(현 KB증권)을 매각하고, 현대상선(현 HMM)도 계열분리되면서 현대그룹 실적은 현대엘리베이터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그런데 현대엘리베이터의 올해 상반기 매출은 8613억 원으로 2019년 상반기 8813억 원에 비해 줄었으며 향후 전망도 긍정적이지 않다. 김동혁 한국기업평가 수석연구원은 현대엘리베이터에 대해 “정부의 고강도 규제 정책과 경기둔화 등을 감안할 때 업무시설, 운수 및 공장, 주택 등 민간부문 수주가 둔화될 전망”이라며 “코로나19 확산과 이로 인한 제조업 부진 등도 수주환경에 부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현대무벡스 본사가 위치한 서울시 종로구 현대그룹 빌딩. 사진=최준필 기자
한때 대북제재가 해제될 기미가 보이면서 대북사업 계열사 현대아산이 주목받았지만 2019년 2월 제2차 북미정상회담이 합의 없이 끝난 후 현재까지 진전이 없는 상태다. 현대글로벌, 현대네트워크, 현대엘앤알 등 다른 계열사도 연매출이 수백억 원 수준으로 그룹 전체 수익과 비교하면 크지 않은 수준이다.
현대무벡스는 2018년 매출 1765억 원, 영업이익 109억 원을 기록했고, 2019년에는 이보다 소폭 하락한 매출 1720억 원, 영업이익 102억 원을 거뒀다. 현대무벡스는 2019년 11월 청라연구개발센터를 준공하고, 상장까지 추진하면서 사업 확장과 실적 상승을 노리고 있다. 현대그룹 관계자는 “향후 국내 석유·화학 및 유통·택배 분야의 물류자동화 사업을 확대하고 스크린도어 사업의 해외 진출 등에 주력할 것”이라며 “육·해상 통합 플랫폼 기반의 물류솔루션 사업도 강화하겠다”고 전했다.
현대엘리베이터의 전망이 밝지 않은 상황에서 현대무벡스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질 것으로 보이지만 반대로 현대무벡스가 부진하면 현대그룹이 적지 않은 타격을 입는다. 재계 관계자는 “현대엘리베이터의 매출이 정체된 이유 중 하나가 꾸준한 수익을 내는 스크린도어 사업 등이 현대무벡스로 넘어갔기 때문”이라며 “현대무벡스가 기대만큼 성장하지 못하면 그간 직간접적으로 현대무벡스를 지원한 현대엘리베이터에도 영향이 갈 수밖에 없다”고 분석했다.
박형민 기자 gody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