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회보 7월호 1면. 사진=광복회보 캡처
광복회는 정치활동을 할 수 없는 국가 기관 산하 보훈단체다. 광복회 정관 제9조에 따르면 광복회는 특정정당이나 특정 정치인을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등 정치활동을 할 수 없도록 규정돼 있다. 한 광복회 회원은 “광복회보에 실린 김원웅 광복회장의 메시지를 보면 정치적 논란의 불씨가 될 수 있는 내용이 많다”고 귀띔했다. 광복회보는 광복회가 달마다 내는 회보로 회장의 동정이나 주요 사업 등을 소개하려 만든 신문이다. 광복회보 편집 및 발행인은 김원웅 광복회장이다.
2020년 7월 29일 발행된 광복회보 최신판에도 여러 정치적 이슈와 관련한 이야기가 담겼다. 눈에 띄는 대목은 김 회장이 7월 14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보낸 서한이었다. 김 회장은 서한을 통해 로버트 에이브럼스 주한미군 사령관의 (본국) 소환을 요구했다. 광복회보는 “김 회장이 ‘최근 에이브럼스 사령관이 한국 국내의 민감한 정치사회적 논쟁에 개입해 내정 간섭적 행태를 보임으로써 한국 국민들의 분노를 사고 있다’고 지적했다”고 보도했다. 이어 광복회보는 김 회장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보낸 서한 전문을 공개했다.
김 회장은 에이브럼스 사령관이 7월 10일 별세한 백선엽 장군을 애도하는 발언에 문제가 있었다고 꼬집었다. 광복회보가 보도한 서한에 따르면 김 회장은 “최근 에이브럼스 주한미군사령관은 일제강점기에 민족을 배반하고 우리 독립군을 학살한 백선엽 씨를 ‘진심으로 그리워질 영웅이자 보물’이라고 칭송했다”면서 “이는 일본에 조선을 팔아먹은 이완용의 죽음에 대해 ‘동양 일류 정치가로 흠모할 바가 많고 국가 일대 손실’이라고 칭송했던 일제 한국강점시기 사이토 마코토 조선 총독의 애도를 연상케 한다”고 했다.
이어 김 회장은 “백선엽은 일제 시 전범국가 일본에 빌붙어 수많은 독립군과 조선민중을 학살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한국전쟁을 전후로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했다”면서 “그는 아시아의 하인리히 힘러”라고 했다. 하인리히 힘러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당의 친위대장이다. 김 회장은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백선엽 장군을 힘러와 비교했다.
“백선엽을 영웅이라고 칭송한다면 그에게 학살당한 독립군과 죄 없는 민간인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이는 유대인을 학살한 나치친위대 하인리히 힘러를 영웅으로 칭송하는 행위와 진배없습니다. 백인을 학살한 하인리히 힘러는 ‘반인류 전범’이지만 조선인을 학살한 백선엽은 영웅이라면 백인만 인류이고 조선인은 인류가 아니란 말입니까? 에이브럼스 사령관은 철저히 인종주의에 갇혀 있는 인물입니다.”
김원웅 광복회장. 사진=최준필 기자
김 회장이 주장한 ‘백선엽 장군의 독립군·민간인 학살’은 일제강점기 말 백 장군의 간도특설대 복무 이력과 한국전쟁 당시 백 장군이 이끌던 1사단의 민간인 학살 논란을 의미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일부 안보·보훈 단체 관계자들은 김 회장이 백 장군과 관련한 여러 논란 가운데 아직 사실로 규정되지 않은 내용을 사실인 것처럼 확신하며 얘기한 것은 충분히 정치적으로 비칠 수 있다고 우려를 표했다. 한 안보단체 관계자는 “김 회장이 자신의 주장을 확신에 찬 듯 이야기했는데 아직까지 자신을 ‘면책특권’이 있는 국회의원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다시 서한 내용이다. 백선엽 장군에 대한 개인적 견해를 밝힌 김 회장은 에이브럼스 주한미군사령관이 주재국 내정에 간섭했다고 주장했다. 김 회장은 “한국에서는 현재 동양판 나치 전범 문제인 일제 청산 이슈가 정치사회적 이슈로 부각되고 있다”면서 “이는 한국 국민들에겐 매우 민감한 정치적 이슈”라고 콕 집었다. 김 회장은 “외국군 사령관이 한국 국내 정치적 논쟁에 개입하는 것은 부적절한 행태”라면서 이렇게 설명했다.
“국제법에는 외교관과 주둔군이 주재국 내정에 관여하면 추방됩니다. (에이브럼스 주한미군사령관의 발언은) 이 국제법에 위반한 행동입니다. 더군다나 반인류 전범행위를 비호하는 행태는 많은 한국 국민의 분노를 사고 있습니다. 일제에 빌붙어 민족을 배반하고 독립군을 학살한 동양판 나치전범을 외국군 사령관이 비호하는 것은 한국 국민을 무시하고 전범에게 학살된 독립군을 모욕하는 방자한 행위입니다. 또한 대한민국은 3·1독립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헌법에 명시돼 있습니다. 에이브럼스 사령관은 대한민국 헌법정신을 훼손하는 언행을 한 것입니다.”
사진=광복회보 캡처
김 회장은 “2019년 11월에도 에이브럼스 사령관이 반인류 전범 백선엽을 칭송하는 언행을 한 바 있고, 그때도 광복회가 에이브럼스 사령관에게 정식으로 공문을 보내 사과와 절제를 요구했다”면서 “많은 한국 국민은 에이브럼스 사령관이 한미동맹을 대미종속으로 한국을 우방국이 아니라 예속국가로 잘못 인식하고 있다는 의구심을 갖게 된다”고 주장했다.
이어진 기사에서도 김 회장 발언은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이어갔다. 광복회보는 국방부가 전군에 독립군가를 교육한다는 기사를 보도했다. 광복회보는 “국방부는 친일작곡가인 김동진, 이흥렬 등의 군가에 대해서도 ‘범정부 차원의 연구, 전문가 의견수렴과 충분한 국민공감대를 형성해 종합적으로 입장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고 보도했다.
이에 대해 김 회장은 “민족을 외면한 호국은 참된 호국이 아니다”라면서 “국군이 ‘민족을 지키는 군대’가 되길 바라며 향후 자주독립정신을 중심적 가치로 정훈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고 했다.
복수 군 관계자는 ‘국군은 이름에서부터 나라를 지키는 군대’라면서 ‘민족을 지키는 군대라는 프레임은 상당히 위험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한 전직 군 관계자는 “국군이 민족을 지키는 군대라면 북한 역시 지켜야 하는 범위에 들어가야 한다”면서 “현 정부 들어 북한이 우리의 주적인가에 대한 논란이 현재진행형인 가운데, 이런 김 회장의 발언은 다분히 정치적으로 비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뿐 아니다. 광복회보 7월호 1면 메인기사는 광복회가 ‘역사정의실천 정치인’을 선정했다고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장현국 경기도의회 의장, 김경호 경기도의원, 채신덕 경기도의원, 김경희 경기도의원 등 경기도의회 내 ‘친일잔재청산특별위원회’ 소속 도의원 4명이 역사정의실천 정치인으로 선정됐다. 이들은 모두 더불어민주당 소속이다. 한 광복회 회원은 “최근 들어 광복회 활동이 정치적으로 다소 편향된 것처럼 보여 우려된다”고 밝혔다.
5월 21일 경남 봉화마을 노무현 전 대통령 묘소를 참배한 김원웅 광복회장의 동정. 사진=광복회보 캡처
광복회보 5월호에선 김원웅 회장의 묘역 참배가 주로 다뤄졌다. 김 회장은 5월 14일 광주 5·18 민주묘지를 참배했다. 김 회장은 이 자리에서 “광복회가 이제 광주정신 왜곡세력과 맞서겠다”고 했다. 김 회장은 “광주 민주화 정신은 친일반민족권력에 맞선 투쟁으로 독립운동 정신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다”면서 “광복회는 친일찬양은 물론 5·18 민주화운동 왜곡을 형사처벌할 수 있는 역사왜곡금지법 제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5월 21일 김 회장이 노무현 전 대통령 묘소를 참배한 내용 역시 광복회보 5월호에 실렸다. 노 전 대통령 묘소를 참배한 김 회장은 “겸손한 권력으로 강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노무현의 철학이 관철되는 세상을 앞당기기 위해서는 친일 청산이 꼭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광복회보 보도에 따르면 노 전 대통령의 친누나인 노영옥 씨는 “노무현 대통령의 가까운 친구인 김원웅 광복회장이 친일파에 맞서 민족정기를 세워가는 꿋꿋한 모습에 하늘에 있는 노 대통령도 기뻐할 것”이라고 말했다. 광복회보는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 광복회가 처음으로 참여한 것이라고 보도했다.
한 보훈단체 관계자는 “광복회 정관을 살펴보면 광복회의 설립 목적은 독립유공자들의 보훈”이라면서 “그 어디에도 광복회가 친일 청산에 앞장서기 위한 단체라는 내용은 없다”고 했다. 그는 “더구나 광주 민주화운동 유공자 묘역 참배나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 참배는 김원웅 회장 개인적인 일이지 광복회를 대변하는 행동이 아니”라면서 “광복회의 설립 목적 범위를 벗어난 김 회장의 광폭 행보에 뒷말이 무성한 상황”이라고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묘소 참배 등에 대해 광복회 관계자는 “회장님은 그런 부분을 특정 정치적인 활동이라고 보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런 행보를 하는 것이다. 정치적인 활동을 하는 게 해석을 어떻게 할 것인가 문제인데, 우리 회장님을 폄훼하는 분들은 이거 정치적인 행동이다 한다”면서 “그러면 광복회장은 도대체 뭘 해야 되는 건가. 가만히 있어야 하나”라고 반문했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