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여름 하얀 태양이 쏟아지는 어느 날이었다. 변호사인 나는 퇴계로에 있는 친일반민족행위조사위원회로 갔었다. 일제강점기를 살아온 한 기업인을 위해서였다. 그는 나라가 없던 그 시절 신문사와 대학교를 세우고 민족기업을 운영하던 사람이었다. 해방 후 친일척결의 태풍이 불던 그 시절 그는 친일심판대에 올랐다. 사업가로서 일제에 협력했다는 혐의였다.
엄상익 변호사
위원회는 그 자손들로부터 재산을 박탈할 권한도 가지고 있었다. 내가 변호사란 신분을 밝히자 조사책임자는 대뜸 내게 “우리들의 적(敵)이시군요”라고 말했다. 내가 변론을 했다. 조사책임자는 “역사는 우리가 해석하기 나름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옆에 있는 역사학자 출신 다른 조사관이 나보고 ‘구조론’을 공부해 보라고 했다. 배고파 경찰앞잡이가 된 사람보다 지주와 자본가들이 근본적으로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나는 내가 어디에 서 있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헌법이 보장하는 변호사 제도를 그들은 적이라는 관념으로 보고 있었다. 그들은 학자가 아니고 혁명가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나는 친일이란 무엇인지 처음으로 심각하게 생각했다. 자라면서 우리 민족 불행의 원인은 일본과 친일파 때문이라고 세뇌 교육을 받았었다. 대학 시절 일본인을 만나면 시비를 걸면서 우쭐해하기도 했다. 친일 척결의 명분은 신성하고 무오류였다. 그러나 변호사로서 진실을 먼저 봐야 하는 입장에서 그 시절의 상황으로 돌아가 그때 사람들의 시각으로 보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몇 년간 일제강점기의 일간신문과 잡지, 재판기록과 논문들 속에 파묻혔다. 세월 저쪽에서 3·1 운동 민족대표가 재판을 받는 법정이 보였다. 민족대표들은 독립보다는 차별을 하지 말아 달라는 게 운동의 근본취지라고 진술했다. 경제대국인 일본시민같이 잘살 줄 알고 합병에 찬성했는데 차별하더라는 것이다. 민족대표가 선임한 일본인 변호사가 오히려 조선 통치에 실패하고 민심을 잃었으니 일본은 조선을 독립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1930대를 산 사회주의자 인정식은 경제 때문에 민족 전체가 전향을 했다고 논문 속에서 통탄하고 있었다. 섬유 기계들이 그 종주국인 영국과 독일로 역수출될 정도로 일본은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조선도 흥청거렸다. 종로통에 조선인 소유의 빌딩들이 솟아오르고 파리에서 개봉한 영화가 한 달 이내 경성에서 상영이 됐다. 조선인이 경영하는 화신백화점에는 엘리베이터가 있고 지하 식품부에는 80전 하는 소시지부터 온갖 식품들이 쌓여 있었다. 세월이 지나가면서 세대가 바뀌었다. 신세대는 구한말에 대한 기억이 없고 구세대 역시 세계적인 강대국인 일본에 대한 저항은 불가능하다는 인식이었다. 차라리 일등국민의 혜택을 누려보자는 현실론이 팽배했다. 그게 그 시대 보통사람들의 인식이었다.
해방 후 친일파 척결의 기준은 일본인의 앞잡이로 고의적으로 우리 동족을 괴롭힌 반민족행위자가 대상이었다. 그 60년 후 다시 생긴 위원회의 기준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친일반민족행위자는 이제 모두 죽고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편향된 이념과 역사관을 가진 사람들이 아직도 친일 프레임으로 정치적 외연을 확장하려는 세력이 있는 것 같다. 오래전 일본 총리를 맞은 중국 지도자는 과거는 잊지 않지만 거기에 매이지는 않겠다고 했다. 이제는 우리도 그 굴레에서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 외부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