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O리그에서 첫 시즌을 맞은 맷 윌리엄스 감독은 ‘와인투어’를 직접 기획하면서 색다른 경험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윌리엄스 감독은 제리 로이스터(전 롯데)와 트레이 힐만(전 SK)의 뒤를 잇는 KBO리그 역대 세 번째 외국인 감독이다. 한국에서는 처음 감독이 됐지만, 메이저리그(MLB)에서는 베테랑 지도자로 이름을 날렸다. 워싱턴 내셔널스 지휘봉을 잡고 무려 179승을 쌓아 올렸다. 선수시절도 화려했다. 빅리그에서 다섯 차례나 올스타에 선정됐다. 골드 글러브와 실버 슬러거 수상 경력도 있는 스타플레이어 출신이다. 월드시리즈 우승도 경험했다.
윌리엄스 감독 선임 소식이 전해졌을 때 일부 야구 관계자들은 “자칫 KBO리그를 한 수 아래로 보고 너무 쉽게 생각하거나 지도자 생활에서 잠시 거쳐 가는 정류장으로만 여길 수 있다”고 걱정을 했다. 그러나 첫 시즌이 절반도 넘게 흘러간 지금, 정반대다.
윌리엄스 감독은 지난 두 달간 와인을 한 병씩 품에 안고 전국의 야구장을 돌았다. 9개 구단 감독들을 한 명씩 찾아 선물을 건네고 덕담을 나누는 유쾌한 원정길이었다. 처음엔 윌리엄스 감독을 어려워했던 다른 팀 사령탑들도 어느새 정성껏 준비한 선물로 화답하기 시작했다. KIA가 새로운 상대팀을 만날 때마다 더그아웃 뒤편에선 훈훈한 교류가 이어졌다.
SK 구단은 윌리엄스 감독의 와인 선물에 대한 답례로 공진단, 모주 등을 포함한 ‘용호삼박’ 세트를 전달했다. 사진=SK 제공
#뜻깊은 와인투어가 시작된 계기
윌리엄스 감독은 지난 5월 29일 광주 LG 트윈스전에서 류중일 LG 감독과 처음 만났다. 3연전 첫 경기를 앞두고 류 감독이 직접 윌리엄스 감독의 방문을 두드린 것이다.
대부분 감독이 선후배 관계로 얽힌 KBO리그에선 시즌 첫 3연전과 마지막 3연전에 앞서 후배 감독이 선배 감독을 찾아가 인사를 나누는 게 관례다. 감독끼리 친분이 깊거나 과거 한 팀에서 함께 일한 사이라면, 매 3연전 첫날에 만나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윌리엄스 감독은 예외였다. 메이저리그에서 수많은 일을 경험했지만 아시아 야구의 그라운드 밖 문화는 알 길이 없다. 다른 한국 감독들 역시 윌리엄스 감독과 인연이 없어 굳이 경기 전 인사 자리를 따로 만들지 않았다. 하지만 현역 감독 중 나이와 경력이 가장 많은 류 감독은 달랐다. 새로 온 외국인 감독에게도 앞장서 마음을 열었다.
류 감독은 윌리엄스 감독을 찾아가 “나이는 내가 당신보다 두 살 많고, 프로 입단은 동기”라고 농담을 건넸다. 또 “메이저리그에선 감독들끼리 잘 만나지 않는다고 하더라. 하지만 한국은 팀이 10개로 많지 않고 선후배 관계도 있어서 감독들이 한 번씩 서로 인사하는 게 관례다. 그래서 내가 왔다”고 친근한 인사를 건넸다.
새로운 문화를 알게 된 윌리엄스 감독은 “내가 잘 몰라서 그동안 다른 감독들을 만나지 못했다”고 아쉬워했다. 그리고 곧바로 ‘행동’에 나섰다. 첫 인사가 늦어진 만큼 정성이 담긴 성의 표시가 필요하다고 여겨 직접 와인 케이스 아홉 개를 제작 주문했다. 각각 9개 구단과 감독 이름을 새겨 넣은 기념품이었다.
그 안에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칠레산 레드와인을 넣어 아홉 개의 ‘선물상자’를 완성했다. 윌리엄스 감독은 “외국인 감독으로서 KBO리그의 문화를 더 이해하고, 익숙해지고 싶다. 감독들에게 와인을 선물함으로써 ‘우리는 경쟁자 이전에 한 배를 탄 동반자’라는 동지애를 전하고 싶었다”고 했다.
윌리엄스 감독과 류중일 감독은 과거 인연을 회상하는 등 특별한 시간을 보냈다. 사진=LG 제공
#감독들의 와인투어 답례 릴레이
‘와인투어’는 주문 제작 와인이 도착한 지난 6월 30일 한화 이글스전부터 본격화됐다. 처음에는 윌리엄스 감독의 일방적인 ‘선물 증정’으로 출발했다. 최원호 한화 감독대행이 첫 번째였고, 이동욱 NC 다이노스 감독이 두 번째였다. 이 소식이 언론과 입소문을 통해 전해지자 다른 감독들이 당황했다. 외국인 감독의 한국식 인사만으로도 기분 좋은 일인데, 뜻깊은 선물까지 들고 찾아왔으니 빈손으로 손님을 돌려보내기 미안해졌다. 윌리엄스 감독을 위한 적절한 답례품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이강철 KT 위즈 감독이 나섰다. 이 감독은 광주 원정에서 윌리엄스 감독이 와인을 선물하자 뜻밖의 대형 선물을 하나 꺼내들었다. 수원의 특산품인 ‘수원 왕갈비’, 그중에서도 무척 비싼 생갈비였다. 윌리엄스 감독이 한국 음식 중 갈비를 좋아한다는 얘기를 듣고 “와인에 곁들여 드시라”고 준비했다는 것이다. 이 감독은 “윌리엄스 감독님이 다른 9개 구단 감독들에게 와인을 선물한다는 기사를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광주도 쇠고기가 맛있지만 수원은 왕갈비가 특산품이다. 와인과 잘 어울리니 함께 맛있게 드시면 좋을 것 같다”며 웃었다. 윌리엄스 감독은 이 갈비를 다음날 선수단 식당에서 구워 KIA 선수들과 함께 먹었다는 후문이다.
그 다음은 한국의 전통주였다. 손혁 키움 히어로즈 감독은 윌리엄스 감독의 와인 선물에 평소 즐겨 마시던 ‘소곡주’로 답례했다. 소곡주는 손 감독의 고향인 충청지역 전통주로 잘 알려져 있다. 이와 함께 한국의 전통 문양이 그려진 와인 커버, 안경 케이스, 컵 받침대를 함께 선물했다. 키움 관계자는 “소곡주 이외의 선물은 손 감독의 아내인 전직 프로골퍼 한희원 씨가 서울 인사동을 찾아 직접 골라온 것”이라고 귀띔했다. 부부가 함께 윌리엄스 감독의 마음에 화답한 것이다.
허삼영 삼성 라이온즈 감독은 한국산 와인을 준비했다. 대구 인근 지역인 청도의 지역 특산품 ‘청도 감 와인’을 직접 택배로 주문했다. 공교롭게도 KIA와 삼성의 대구 3연전 첫날까지 허 감독의 집에 택배가 도착하지 않아 두 감독의 만남을 불가피하게 하루 늦추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3연전 둘째 날 마침내 윌리엄스 감독을 만난 허 감독은 “감으로 만든 와인이라면 특별한 기념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평소 와인을 즐겨 마시는데, 이 와인은 숙취도 거의 없어 윌리엄스 감독님께 잘 맞을 것 같다”고 했다. 윌리엄스 감독도 “한국에서 만든 와인을 처음으로 마셔보게 됐다”며 기뻐했다.
이쯤 되자 다른 감독들도 기분 좋은 고민에 빠졌다. 연일 언론을 통해 “나는 어떤 선물을 해야 할지 심사숙고하고 있다”는 코멘트가 쏟아졌다. 다음 차례는 김태형 두산 베어스 감독. 이번에는 지난해 두산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기념해 특별 제작한 소주가 답례품이었다. 윌리엄스 감독은 두산의 우승기념주에 선물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했다. “우승한 뒤 만든 기념 소주라는 걸 듣고 우리 KIA도 언젠가 그 자리에 올라 그런 술을 만들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했다.
윌리엄스 감독을 정말 깜짝 놀라게 한 선물도 있다. 첫 만남이 기습적으로 이뤄져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던 최원호 한화 감독대행이 다음 3연전에 앞서 초대형 인삼주를 선물했다. 투명한 병에 담긴 커다란 인삼이 한눈에 들어와 대형 전시품을 연상케 했다. 최 감독대행은 “내가 선물을 드려야 하는데 그때 오히려 받기만 해 죄송했다. 이 인삼주는 2013년 우수 제품으로 선정된 인삼으로 담근, 굉장히 좋은 술이다.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다”고 했다. 윌리엄스 감독은 처음 보는 인삼주의 규모와 모양새에 기분 좋은 감탄사를 연발했다. “40파운드(약 18kg) 정도 되는 엄청나게 큰 술이다. 언제 마실 수 있을지 모르겠다. 마시기에는 너무 아까워서 언젠가 파티를 한번 해야 할 것 같다”며 웃어보였다.
다음 주자인 허문회 롯데 자이언츠 감독은 특별한 안줏거리를 선물했다. 다른 감독들이 술을 많이 선물하는 것을 보고 안주로 좋은 어묵세트를 골랐다. 부산에서 유명한 어묵업체가 제작한 세트 상품. 양이 상당했다. 허 감독은 “부산의 명물인데 드셔봐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고 했다. 윌리엄스 감독도 대만족했다. 이번에도 다음날 점심에 선수단과 함께 나눠 먹었다. “엄청나게 맛있었다. 특히 어묵탕이 정말 좋더라”고 찬사를 보냈다.
#와인투어 통해 밝혀진 과거의 인연
화룡점정을 한 인물은 ‘와인투어’의 계기가 된 류중일 LG 감독이었다. 윌리엄스 감독이 술과 먹거리를 이미 충분히 받았다고 생각한 류 감독은 “건강을 잘 챙겨야 한다”는 의미로 LG생활건강이 제작한 홍삼 진액을 선물했다. “술을 너무 많이 드시지 말고, 하루에 하나씩 챙겨 드셔야 한다. 한 달 분량인데 필요하면 또 사드리겠다”고 덕담하며 껄껄 웃었다.
그 과정에서 아주 특별한 추억이 밝혀졌다. 류 감독이 윌리엄스 감독에게 “잠실구장 개장 1호 홈런을 누가 쳤는지 아는가”라고 질문했고, “모른다”는 대답에 “바로 나다”라고 응수해 폭소를 안겼다. 윌리엄스 감독은 센스 있게 “잠실구장에 가면 홈런 타구가 떨어진 곳을 찾아보겠다. 그곳에서 함께 기념사진을 찍으면 좋겠다”고 화답했다.
때마침 일주일 뒤 잠실에서 두 팀이 재대결했다. 류 감독과 윌리엄스 감독은 그라운드에서 다시 만나 당시 홈런공이 떨어진 위치를 찾아냈다. 윌리엄스 감독은 다음날 그 지점에서 만세를 부르며 기념사진도 찍었다. 그렇게 두 감독의 특별한 교류가 계속 이어질 때쯤 류 감독은 지인에게 놀라운 사진 한 장을 받았다. 1985년 서울에서 열린 7월 한·미 대학선수권대회 경기 장면이었다. 2루 도루를 시도하는 ‘대학생 류중일’을 ‘대학생 윌리엄스’가 지켜보는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한양대 재학 중이던 류 감독이 한국 대표팀 주전 유격수로 활약했는데, 이때 윌리엄스 감독도 미국 대표로 참가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두 대학생 선수는 35년 만에 KBO리그에서 다시 만나 사진을 함께 보고 당시 추억을 공유했다. 윌리엄스 감독은 “그 사진에선 지금과 달리 내 머리카락이 많다. 나도 잠실구장에서 홈런을 쳤는데, 정확한 위치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확실한 건 (류중일 감독의 홈런 지점보다) 조금 더 위에 있을 것 같다”고 농담해 폭소를 안겼다.
남다른 인연에 감동한 류 감독은 기념 선물을 하나 더 준비했다. 3주 연속 LG와 KIA가 만나자 3주 연속 윌리엄스 감독을 찾아 돈독한 정을 쌓았다. 세 번째 방문 때 류 감독의 손에는 2014년 삼성의 4년 연속 통합 우승 기념 배트가 들려 있었다. 류 감독이 삼성을 이끌던 시절의 값진 기념품이다.
윌리엄스 감독은 “2001년 애리조나 시절 월드시리즈 우승 유니폼, 스파이크, 가방 등이 내게는 인생에 다시 얻을 수 없는 애장품이다. 류 감독님도 ‘몇 개 없는 귀한 우승 배트’라고 하시더라. 정말 뜻깊은 선물”이라고 했다. 다만 ‘류 감독에게 월드시리즈 우승 기념품을 선물할 수 있느냐’는 말에는 “잘 모르겠다”고 확답을 피하면서 “아마 류 감독님은 배트 하나를 더 갖고 계신 게 아닐까”라고 받아쳐 웃음을 안겼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와인투어 두 번째 주자였지만 역시 미처 답례를 하지 못했던 이동욱 NC 감독도 특별한 기념품을 마련했다. 윌리엄스 감독이 창원 NC파크에서 운동하는 모습이 담긴 기념사진이다. 윌리엄스 감독은 원정 경기 때 각 구장 관중석 계단을 오르내리며 운동을 하는 ‘루틴’이 있다. 이 모습을 고화질 사진에 담아 액자로 만들었다.
이 감독은 “다른 감독님이 웬만한 답례품을 다 준비하셔서 단번에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러다 윌리엄스 감독님이 ‘창원 NC파크가 아름답다’고 말씀하셨던 게 떠올랐다. 창원의 자랑인 NC파크를 평생 추억으로 간직하실 수 있게 사진 액자를 준비했다”고 설명했다. KIA 관계자는 “윌리엄스 감독님이 ‘의미 있는 기념품’이라고 고마워하시면서 곧바로 감독실 벽에 그 액자를 걸어두셨다”고 귀띔했다. 이 감독은 이 액자와 함께 “건강을 잘 챙기시라”며 홍삼 스틱도 건넸다.
마지막 주자는 박경완 SK 감독대행이었다. 일정상 피날레를 장식하게 된 SK는 지난 14일 광주 경기에 앞서 ‘용호삼박’이라는 이름의 패키지를 준비했다. SK 구단과 박 감독대행, 건강 문제로 자리를 비운 염경엽 감독의 선물 세 개를 묶었다. SK 구단은 “용호상박처럼 ‘비룡’과 ‘호랑이’로 나뉘어 승부를 겨루는 양팀이지만, 같은 길을 가는 동업자이기도 하다는 우정의 마음을 담았다”고 했다.
구성도 화려했다. 구단은 창단 20주년 기념으로 출시 예정인 콜라보 와인 세트를 선물했다. 윌리엄스 감독이 이 와인의 첫 고객이 된 셈이다. 염 감독은 건강에 좋은 한방 약품 공진단을 보냈다. 박 대행은 자신의 고향이 KIA의 연고지역인 전주라는 점을 고려해, 전주시 대표 주류인 모주를 건넸다. SK의 기념 와인과 공진단을 복용하는 방법, 모주(어머니의 사랑이 담긴 술)의 의미도 상세히 설명했다.
와인 한 병으로 시작된 여정에 한국 감독들의 더 큰 정성이 더해져 성대하게 막을 내린 대형 이벤트. 윌리엄스 감독은 “외국인인 나를 환영해주신 데 대한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어 시작한 일인데, 내가 준비한 작은 선물에 비해 받는 선물이 너무 커졌다. 이게 한국의 정인가 보다”라며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그가 감독으로 KBO리그에 어떤 업적을 남길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와인투어로 남긴 2020년의 기분 좋은 일화는 꽤 오래 기억될 듯하다.
배영은 중앙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