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 최대어 중 한 명으로 꼽힌 덕수고 나승엽이 최근 미국 메이저리그 진출을 선언했다. 사진=김혜령 제공
나승엽이 미국 진출에 큰 의지를 나타내면서 여론은 찬반양론으로 나뉘었다. 나승엽의 도전을 응원한다는 팬들도 있었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으로 미국 현지 상황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내년 마이너리그가 제대로 열릴 수 있느냐 하는 우려도 만만치 않았다.
일요신문은 고교 졸업 후 곧장 마이너리그에 진출한 박효준(24·뉴욕 양키스), 최현일(20·LA 다저스)과 인터뷰를 통해 고교 졸업하자마자 미국 야구에 도전하는 상황이 어떤 과정과 인내를 필요로 하는지 살펴보고, 나승엽의 미국 행선지로 알려진 미네소타 트윈스 스카우트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박효준 “미국행, 후회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나승엽의 미국 진출을 응원해주고 싶다. 결국에는 자기한테 맞는 걸 찾는 게 중요하다. 주위 도움도 필요하지만 자신이 어떤 마인드로 현실을 받아들이고 이겨내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고 본다.”
2015시즌을 앞두고 뉴욕 양키스와 계약금 116만 달러에 미국으로 향한 박효준은 해마다 한 단계씩 승격을 이뤘고, 2루수, 유격수로 성장을 거듭했다. 2019년 4월 10일 더블A 트렌튼 썬더에 합류한 후 113경기에 출전, 타율 0.272 3홈런 41타점 20도루를 기록하며 시즌을 마쳤다.
박효준은 2019시즌 후 겨우내 한국에서 혹독한 개인 훈련을 소화하며 새로운 기회를 노렸지만 2020시즌은 시작도 하지 못한 채 스프링캠프 중단과 함께 끝나고 말았다. 현재 한국에서 개인 훈련을 이어가고 있다는 그는 마이너리그 생존 비결을 묻자 “잘하든 못하든 자기한테 맞는 방법을 계속 밀고 나가는 바보 같은 멘탈이 중요하다”고 대답했다.
“어린 선수들이 미국 가서 실패하고 돌아오는 이유는 잘 안된다고 해서 자꾸 변화를 주려 하고, 그런 변화가 많아질수록 자기 야구를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이건 내 경험도 포함된 이야기다. 야구는 실력도 중요하지만 멘탈 강한 선수가 살아남는 것 같다. 긴 시즌 동안 좋은 일, 안 좋은 일, 슬럼프가 오기도 하고, 극복해내는 일들이 반복되는 상황에서 자신의 루틴을 믿고 가는 게 정말 중요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바보 같은 멘탈’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박효준은 고교 졸업 후 미국이 아닌 KBO리그에 남았다고 해도 어려운 상황을 맞이하는 건 비슷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내가 한국에 남았다고 해서 그 길이 쉬운 건 아니다. 어떤 길을 가든 난관에 부딪히기 마련이고, 벽을 넘어야 또 다른 기회가 주어지는 건 한국이나 미국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미국만이 도전이 아니라 KBO리그 진출도 도전이기 때문이다. 고교 선수 출신의 미국 진출은 그 자체로 박수받고 응원해줬으면 좋겠다. 그래야 선수는 긍정적인 힘을 바탕으로 용기를 얻을 수 있다.”
2015년 미국으로 건너간 박효준은 나승엽을 향해 응원의 뜻을 전했다. 사진=이영미 기자
#최현일 “나승엽, 용기 있는 도전에 박수”
189cm, 91kg의 체격 조건으로 최고 구속 150km/h 안팎의 빠른 공을 선보였던 서울고 출신의 최현일(20)은 동기생인 정우영(LG) 송승환, 이교훈(이상 두산)이 프로팀에 지명받는 걸 뒤로하고 2019년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LA 다저스와 30만 달러의 계약을 맺고 19세의 나이에 미국 애리조나로 향했던 것.
LA 다저스 산하 루키리그에서 한 시즌을 보낸 최현일은 14경기 중 11경기에 선발 등판 5승 1패 평균자책점 2.63을 기록했다. 미국 스포츠 전문 매체 ‘디 애슬레틱’에서는 최현일을 다저스 유망주 랭킹 15위로 선정했는데 이 순위는 투수 중 여덟 번째다.
최현일도 올 시즌은 마이너리그 시즌 중단으로 한국에서 개인 훈련을 이어가고 있다. 최현일은 나승엽의 미국 진출 관련 소식을 기사로 접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긴가민가했다가 선수의 의지가 확고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용기 있는 도전”이라며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내가 미국에 간다고 했을 때도 여론은 상반됐다. 하지만 나는 고3 올라가면서부터 감독님한테 미리 미국에 가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즉 여론이 어떠하든 내가 생각한 대로 가고 싶었다. 나승엽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계약금이 얼마가 될지는 몰라도 그 금액의 많고 적음보다 더 중요한 건 하고자 하는 의지라고 생각한다. 나승엽도 고민이 많았을 텐데 마지막까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미국 진출을 선언한 건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최현일은 자신이 받은 계약금 30만 달러가 한국에서는 적은 금액으로 소개됐지만 미국 가서 다른 선수들과 비교해 보니 미국 신인 드래프트 5~6라운드 수준이라는 걸 알게 됐다고 말한다.
“물론 많은 금액을 받고 가면 구단의 기대와 대우가 조금 차이가 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계약 규모보다 가서 얼마나 잘 적응하고 야구를 잘 하느냐 여부다. 미국 생활에서 가장 힘든 게 언어와 음식이다. 그리고 빅리그에 도달하기까지 길고 긴 기다림과 인내가 필요하다. KBO리그는 고졸 신인 선수가 1군 무대에 데뷔하려면 2년여의 시간이 필요하지만 미국은 메이저리그까지 빠르면 4~5년 길면 6~7년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 이 오랜 시간을 잘 참고 견뎌내는 자가 목표를 이룰 수 있다.”
최현일은 고교 시절 빠른 공을 뿌리는 ‘파이어볼러’로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막상 미국에 가보니 자신보다 시속 5~6마일(8~9km/h) 이상 더 빠른 공을 던지는 투수들이 수두룩하다는 사실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미국 가기 전까지만 해도 빠른 공을 던지는 데 대한 자부심이 큰 편이었다. 그런데 마이너리그의 어린 투수들 대부분은 엄청난 구속으로 타자를 압도했다. 그들을 보며 나도 더 빠른 구속을 내기 위해 운동 방법을 달리했고,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 훈련하면서 구속을 끌어 올렸다. 만약 한국에 남았다면 비슷한 구속으로 선수 생활을 이어갔겠지만 나보다 더 뛰어난 선수들을 보고 배우며 자극받았던 부분이 실력 향상으로 이어졌다고 생각한다.”
최현일은 첫 시즌에 언어 소통의 어려움으로 선수들 대화에 끼어들지 못해 소외감을 느꼈다고 토로했다. 통역의 도움으로 생활하는 데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지만 선수들과 직접 소통하지 못해 친분을 쌓는 데 시간이 걸렸다는 것. 올 시즌 마이너리그 시즌이 시작도 하지 못하면서 최현일은 남다른 고민을 갖고 있다.
“한국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KBO리그 중계를 자주 보게 되고, 고교 시절 함께 뛰었던 친구들이 활약하는 모습을 보면서 여러 생각이 교차됐다. 서로 야구를 잘하기 위해 선택한 길인데 나는 올 시즌 경기에 나서지 못하고 개인 훈련만 소화하는 것이 혼란스러웠던 것 같다. 백수가 아닌데 백수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물론 내년 시즌을 위해 더 마음을 다잡고 앞만 보고 가야 함에도 코로나19로 인해 어수선한 미국 상황을 떠올리면 마음이 잘 잡히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최현일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미국 도전을 선택한 나승엽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남겼다.
“최근에는 고교 출신 선수가 마이너리그로 직행하는 사례가 흔치 않다. 그런 점에서 나승엽의 도전이 고맙기도 하다. 나승엽의 미국 진출 관련 기사에 달린 댓글을 보면 말도 안 되는 내용들이 많더라. 모르는 사람들이 뱉은 글들에 마음 쓰지 말고, 나승엽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응원하고 있으니까 미국 가서 주눅 들지 말고 잘 이겨내길 바란다.”
#최현일 부친 최승표 “잃는 것보다 얻는 게 더 많다”
‘우리 아이는 야구선수’라는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 최현일의 아버지 최승표 대표는 아들을 KBO리그가 아닌 미국으로 보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KBO리그에서 성공해 포스팅이나 FA(자유계약)를 통해 미국에 갈 수 있는 방법과 곧장 마이너리그부터 시작해 빅리그로 오를 수 있는 과정을 되짚어보면 둘 다 어려운 길이라는 답이 나온다. KBO리그 출신 중 메이저리그에 진출, 성공한 사례를 찾는다면 류현진밖에 없다. 물론 김현수, 강정호, 박병호가 빅리그 문을 두드렸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올 시즌 도전 중인 김광현은 제외로 하고 말이다. 둘 다 어려운 길이라면 아들의 꿈을 살려주고 싶었다. 어렸을 때부터 미국에서 야구 하는 걸 목표로 했던 터라 기회가 된다면 고교 졸업 후 곧장 미국 가는 방법을 모색했다. 가서 도전해 보고 안 되면 KBO리그로 복귀해 한국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갈 수 있기 때문에 유학 보낸다는 마음으로 미국행을 택한 것이다.”
최 대표는 최현일이 루키리그에서 활약하며 야구는 물론 인간적인 성장을 이뤘다고 말한다. 구속 증가와 자기 관리의 중요성을 배웠고, 외로움을 홀로 감내하면서 좀 더 어른스러워졌다는 것.
“메이저리그를 목표로 미국으로 향하지만 모두 그 목표에 도달할 수는 없다는 게 현실이다. 그럼에도 잃는 것보다 얻는 게 훨씬 많은 게 미국 야구라고 생각한다. 나승엽의 도전은 그런 관점에서 이해하고 응원해줘야 한다고 본다.”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