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김여정 조선노동당 제1부부장. 사진=한국공동사진취재단
국회 여야 정보위 간사를 맡은 김병기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하태경 미래통합당 의원은 8월 20일 정보위 브리핑을 통해 북한 정치권력 구도 변화와 관련한 국정원 보고를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국정원은 “김정은 동생 김여정이 국정 전반에 걸쳐 위임통치를 하고 있다”고 정보위에 보고했다.
하태경 의원은 “김정은의 후계자가 결정된 것은 아니다”라면서 “김정은은 여전히 절대 권력이지만 과거보다 권한을 이양하고 있다”고 했다. 김여정이 북한 후계자로 공식 낙점된 것은 아니라고 선을 그은 셈이다. 하 의원이 설명한 북한 위임통치 시스템은 다음과 같다.
“김여정은 대남·대미 정책 등을 보고받는다. 경제 분야는 박봉주, 김덕훈이 권한을 이임 받았고, 군사 분야에선 신설된 군사지도부 최부일 부장과 전략무기를 개발하는 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 이병철에게 권한을 이양했다.”
하 의원은 김정은이 위임통치를 실시하는 배경을 두고 “김정은이 9년 동안 통치하면서 스트레스가 높아져 (스트레스를) 줄이는 차원”이라면서 “정책 실패 시 김정은에게 실패 책임이 날아오면 리스크가 크다는 차원에서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치권에 따르면 이번 국정원 보고서 30페이지 분량 중 30% 이상이 김정은의 위임통치 관련 내용인 것으로 알려졌다.
국회 정보위에선 김정은 위임통치 배경으로 ‘스트레스’와 ‘책임 회피’가 거론됐지만 의문부호는 남아 있다. 동시에 2020년 4월 세계적인 이슈로 부상했던 ‘김정은 건강이상설’이 다시 한 번 주목받는 모습이다. 북한 소식통과 전문가들은 김정은이 스트레스를 주요한 이유로 삼아 위임통치를 결정했다는 것엔 신빙성이 높지 않다고 입을 모았다.
5월 1일 ‘건강이상설’을 일축하며 공식 석상에 나타났던 김정은. 사진=연합뉴스
한 북한 소식통은 “동네 이장을 해도 스트레스를 받기 마련이다. 한 국가 지도자가 스트레스를 이유로 국정 운영 전반에 걸쳐 위임통치를 결정했다는 것은 다소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이라고 짚었다. 이 소식통은 “국정원은 그간 김정은 신변에 이상이 없다고 꾸준히 보고해왔다”면서 “이런 보고의 신빙성을 해칠 수 있는 사안이기에 (신변 이상이 아닌) 스트레스 항목이 들어간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국정 실패 책임 회피 일환으로 위임통치를 결정했다는 것에 대해선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중국 거주 북한 소식통은 “북한 지도부는 국정 전반에 걸쳐 성공적으로 무엇인가를 이뤄낸 것이 없다”면서 “대미·대남 외교현안을 비롯해 코로나19 방역, 경제난, 최근의 홍수까지 사방팔방이 악재로 가득하다”고 했다. 이 소식통은 “이런 과정에서 김정은에게 돌아올 화살을 최대한 분산해서 맞자는 판단이 작용했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2020년 5월 1일 김정은이 재등장하면서 일단락됐던 ‘김정은 건강이상설’에도 다시 한 번 불씨가 지펴졌다. 북한 전문가들 사이에선 “김정은의 건강상태가 분명 좋지 않다”는 확신에 찬 주장들이 돌아다닌 지 오래다.
강철환 북한전략센터 대표는 5월 중순 일요신문과의 통화에서 “김정은이 건강상으로 문제가 있다고 본다”며 “북한 내부에서도 그런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고 했다. 당시 강 대표는 “김정은이 심혈관계 수술을 받은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다만 건강이상설이 와전돼 ‘김정은이 죽은 것 같다’는 사망설로 이어진 것은 과장”이라고 한 바 있다(관련기사 김정은 깜짝쇼 한번 하고 20일째 ‘노쇼’ 신변이상설도 다시 고개).
2020년 3월부터 본격적인 북한 정치적 2인자 입지를 다지기 시작한 김여정. 사진=연합뉴스
김정은의 실제 건강상태가 미궁 속에 빠져 있는 가운데 김여정이 북한 정치권 2인자로 부상하고 있었던 정황은 꾸준히 포착돼왔다. 특히 ‘김여정 표준상’이 공개된 시점을 분수령으로 봤다.
4월 일요신문 취재에 응한 중국 거주 북한 내부 소식통은 “북한이 김여정 표준상을 준비했다”면서 “김정은이 국정운영을 할 수 없다고 판단할 수 있는 근거”라고 했다. 표준상은 특정 정치인의 증명사진을 일컫는 사회주의 국가식 표현이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표준상은 지도자급 정치인으로 부상하기 위한 준비물로 통한다. 김여정 표준상은 2월 말 북한 관영매체를 통해 공개된 바 있다(관련기사 후계작업 신호탄? 사라진 김정은과 ‘김여정 표준상’의 비밀).
표준상이 공개된 뒤 김여정의 행보는 과감해졌다. 3월 담화문 정치를 시작하며 대남 압박 선봉에 섰다. 3월 4일 김여정은 자신의 이름으로 담화문을 발표했다. 김여정의 담화문 정치 데뷔였다. 이날 김여정은 담화문을 통해 북한 미사일 도발에 유감을 표명한 청와대를 비난했다. 김여정은 청와대 유감표명에 대해 “주제넘은 실없는 처사”라면서 “청와대의 저능한 사고방식에 경악을 표한다”고 했다. 그간 대남 온건파로 여겨졌던 김여정의 담화문은 한국 정치권에 적지 않은 파장을 몰고 왔다.
2020년 2월 북한 관영매체가 공개한 김여정 표준상. 사진=제보자 제공
6월 김여정의 담화문 정치에 또 시동이 걸렸다. 김여정은 5월 31일 일부 탈북민 단체가 대북 전단을 살포한 것과 관련해 강력한 대남 압박을 시작했다. 김여정은 강한 어조의 담화문을 연이어 띄웠다. 담화문엔 남북 공동연락사무소 폭파와 본격적인 군사 행동을 시사하는 엄포성 발언이 담겼다. 이른바 ‘말폭탄’이 쏟아졌다.
한국 정부를 강력히 압박하던 김여정은 6월 14일 남북 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하겠다는 엄포를 행동으로 옮겼다. 김여정의 말폭탄이 실제 폭탄으로 터질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사건이었다. 이와 더불어 남북 공동연락사무소 폭파는 김여정의 북한 내 정치적 위상이 어느 정도로 올라갔는지 실감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김정은이 직접 나서 김여정 말폭탄을 회수하기도 했다. 6월 23일 김정은은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예비회의를 개최해 “대남 군사행동계획을 보류하겠다”고 밝혔다. 이날 개최한 북한의 당 중앙군사위원회 예비회의는 북한 유사 이래 전례가 없는 회의였다. 북한 소식통들은 이 회의를 “족보 없는 회의”라고 칭하기도 했다. 갑작스레 열린 예비회의 시간은 짧았다. 짧은 회의에서 나온 결단은 굵직했다. 김정은은 김여정이 꺼낸 ‘군사 행동 위협’ 말폭탄을 회의 하나로 백지화했다(관련기사 김여정 말폭탄 전량 회수한 김정은 ‘예비회의’ 미스터리).
당시 북한 소식통들은 김정은과 김여정 ‘백두혈통 오누이’가 나쁜경찰-착한경찰 전략으로 북한의 위기를 관리해나가고 있다고 분석했다. 또 다른 북한 소식통은 “남북 연락사무소 폭파로 ‘한다면 한다’는 것을 보여준 김여정의 말폭탄을 김정은이 전량 수거하는 그림을 만들었다”면서 “북한이 최악의 대립 상황은 피하는 전략을 취했다”고 했다(관련기사 김여정은 도발 김정은은 유화책, 고도의 작전?).
이와 더불어 북한 관영매체들은 5~6월부터 김여정을 ‘당중앙’이라 호칭하기 시작했다. 김정은과 그의 아버지 김정일이 북한 권력 정점에 오르기 전에 불리던 호칭이었다. 앞서의 북한 소식통은 “북한에서 당중앙은 최고 권력 후계자에게만 붙었던 특별한 호칭”이라고 했다. ‘당중앙’ 칭호가 붙기 시작하면서 김여정의 북한 지도부 2인자 등극은 사실상 완성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분석이 나오기 시작했다(관련기사 김정은은 어디서 뭐하고…낯선 2인자 ‘당중앙 김여정’의 배후).
7월 28일 열린 북한 전국 노병대회. 황색 군복을 입은 이들은 은퇴 군인이다. 은퇴 군인을 제외하면 주석단에 앉은 대부분이 인민복을 입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김여정 위임통치의 징후는 또 있었다. 중국 거주 북한 소식통들의 최근 전언에 따르면 북한은 선군정치에서 선당정치로 권력 패러다임을 전환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과거엔 군이 북한 정치권을 이끌어가는 중심축이었다면, 이제는 노동당이 정치 권력 구조의 중심으로 떠올랐다는 내용이다.
선군정치는 1990년대 말부터 김정일 전 북한 국방위원장이 주장한 정치사상이다. 군대가 국가의 기본이라는 바탕 아래 군대를 경제 및 사회개발·운영 전면에 배치하는 내용이다. 이에 따라 1998년 북한은 헌법을 개정해 국방위원회를 최고 권력기관으로 배치했다. 군부의 정치 참여가 북한 헌법 조항으로 보장된 것도 이때다. 김정일은 김일성 사망과 ‘고난의 행군’이라 불리는 경제 위기로 인한 사회 혼란을 방지하려는 차원으로 선군정치를 국가 통치 기본 이념으로 제시했다.
선군정치는 최근 들어 북한 정치권에서 자취를 감춘 것으로 전해진다. 다른 북한 내부 소식통은 “북한이 선군정치 대신 선당정치 성향을 띠고 있다”면서 “당을 중심으로 최고 지도부가 의사결정을 진행하고 있다는 뜻”이라고 했다. 북한 최고지도자의 직함에서도 그 증거를 찾아볼 수 있다.
김정일 직함이 국방위원장이었던 반면 김정은의 현 직함은 국무위원장이다. ‘군대의 색’이 빠져 있다. 2011년 12월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에 등극한 김정은 직함은 조선노동당 제1비서, 조선노동당 군사위원장, 조선노동당 국무위원장으로 변화해왔다. 당 관련 직함과 군 관련 직함을 지그재그로 오가다 2016년부터는 국무위원장 직함으로 정권을 이끌어온 것이다.
앞서의 북한 내부 소식통은 “김정은 정권 초기와 지금을 비교하면 주변에 군복을 입은 고위급 인사보다 민간인 복장을 입은 고위급 인사가 더 많다”면서 “이런 부분은 선군정치 르네상스였던 김정일 시대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라고 했다. 이 소식통은 “군 관계자들이 북한 정치권 중심이 되면 김여정 같은 여성 정치인 위상이 강화되기 어렵다”면서 당 중심의 권력 구조가 김여정의 입지 강화와도 연관이 있을 것으로 설명했다. 이어지는 그의 말이다.
“군 관계자가 정부 고위직에 많이 앉아있을수록 김여정과 같은 친족 측근 세력들이 입지를 다질 때 반대 여론이 심해질 수 있다. 군은 그만큼 다루기 힘든 조직이다. 특히 북한의 군은 여전히 보수적으로, 여성 정치인에 대해 부정적이다. 당 중심의 권력 구조 개편은 김여정 위임통치 기반 마련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높다. 2014년 김정은은 다리 수술을 한 적이 있다. 그 후 김정은의 선당정치가 북한의 새로운 정치 시스템으로 자리잡았다. 한 차례 건강이상을 겪었던 김정은이 김여정을 2인자로 하는 ‘백두혈통 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권력 지도를 새로 그려야 할 필요성을 느꼈을 수 있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