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심신라면배 최종국에서 박정환 9단이 커제 9단에게 반집 차이로 석패했다. 최종국을 마치고 인터뷰하는 박정환. 사진=사이버오로 제공
제21회 농심신라면배 1차전은 작년 10월에 열렸고, 11월에 2차전이 이어졌다. 중국 선봉 양딩신 9단은 원성진, 야마시타 게이고, 김지석, 이치리키 료, 이동훈, 쉬자위안, 신진서 9단까지 물리치고 7연승했다. 대회 최다연승 타이기록(판팅위 9단, 20회 대회 7연승)이었다. 1, 2차전을 휩쓴 양딩신은 “긴장과 압박감을 넘어 평상심으로 두었다”라고 말했다. 일본 이야마 유타 9단에 막혔지만, 뒤에 남은 중국 선수는 미위팅, 판팅위, 셰얼하오, 커제였다. 모두 세계대회 우승자 출신이다. 양딩신의 연전연승을 보며 커제만 애가 닳았다. 자신이 빛날 무대가 사라진 듯 보였다.
3차전은 연기에 연기를 거듭하다 결국 온라인 개최로 확정했다. 한국 마지막 주장 박정환 9단이 출전했다. 첫판은 8월 18일 시작했다. 열도의 일인자 이야마 유타 9단은 아주 잘 싸웠다. 그러나 초읽기에 들어가자 급격히 무너졌다. 다음날 미위팅 9단에겐 완승했다. 2연승으로 손을 푼 박정환은 다음날 판팅위 9단과 마주 앉았다. 8년 전 응씨배 결승에서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았던 그 판팅위다. 박정환이 압도적인 내용으로 승리를 목전에 둔 순간 사고가 생겼다. 초읽기 여덟과 아홉 사이에 클릭했지만, 마우스가 먹통이었다.
공식대회에서 마지막 초읽기에 만약 기계적 고장으로 시계가 눌러지지 않았다면 어떻게 처리할까. 답은 그냥 시간패다. 프로기사 대부분 이 규정에 순응한다. 다만 이번 대회는 불가피하게 온라인으로 열린 만큼 예외 규정이 있었다. 규정 13항 단서조항에는 ‘인터넷 환경이나 프로그램의 오류 등으로 중지된 바둑 가운데 재개가 어렵다고 판단되는 바둑 중에서 형세 반전이 어렵다고 판단될 만큼 진행된 대국은 각 기원(협회) 판정위원에게 종국 결정에 대한 의견을 구하여 결정한다. 다만 판정위원 3명이 만장일치로 승, 패 결정에 동의할 경우 판정을 내리고, 한 명이라도 동의하지 않을 경우에는 재대국을 한다’라고 적혀있다. 당시 AI가 판정한 형세는 박정환이 90% 이상 유리했다.
마우스를 쥔 박정환 9단의 손. 판팅위와의 대국 도중 ‘마우스 먹통’ 문제가 발생해 재대국을 했다. 사진=사이버오로 제공
사고 화면은 모두 녹화되고 있었다. 박정환이 클릭하던 장면은 확실히 ‘열’이 불리기 이전이었다. 한국기원은 ‘박정환은 시간 내에 유효 착점을 했다’고 주장하며 온라인대국규정에 따라 한중일 판정위원회에 심의를 요청했다. 영상을 공유한 중국 측은 “여러 번 판독했지만, 단순 마우스 클릭 실수다”라고 반박했다. 결국 만장일치는 나오지 않았고, 재대국이 결정되었다. 양국 기원은 다음날 오전 대국 재개를 합의했다.
이런 이유로 8월 12일 박정환은 더블헤더를 뛰었다. 오전엔 판팅위 9단, 오후엔 셰얼하오 9단을 꺾었다. 외부 환경의 장애를 극복하고 최종국까지 대회를 이끌었다. 박정환의 4연승으로 바둑동네는 들끓었다. 상하이 대첩에 이어 역사에 남을 ‘온라인 대첩’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2005년 열린 6회 대회에서 이창호 9단이 홀로 남아 5연승을 거두고 우승해 ‘상하이 대첩’이라 불렸다. 당시 상대가 뤄시허, 장쉬, 왕레이, 왕밍완, 왕시 9단이었다. 대단한 기록이지만, 비교적 약한 일본기사도 섞여 있었고, 마지막 상대 왕시도 절정고수까진 아니었다.
예전 3차전은 항상 중국 상하이에서 열렸다. 타국에서 펼치는 최종라운드는 부담감은 다르다. 연승해도 대국 후 남은 공배 시간을 메우는 게 고역이다. 이번 온라인대국은 달랐다. 혼자 모니터 앞에 앉았지만, 익숙한 한국기원 건물 안이다. 대국을 마치면 바로 복기할 수 있는 국가대표팀이 옆에 대기하고 있다. 집에서 출퇴근하며 홀가분하게 인터넷 대국 한판 두고 가는 마음이었다.
농심신라면배 최종국에서 박정환에 승리한 커제. 사진=중국 시나바둑 제공
마지막 상대는 커제였다. 대학생활을 하며 예능무대까지 나섰던 바쁜 과거와 달리 유행병이 온 후에는 집에서 인터넷 대국에만 골몰했다. 실전은 오랜만이지만 의욕이 넘쳤다. 둘은 명승부를 펼쳤다. 결국 5억 원 상금의 주인은 반집 차이로 결정되었다. 농심신라면배에서 커제는 2년마다 자신의 손으로 중국 우승을 확정 지었다. 2016년 이세돌, 2018년 김지석, 2020년 박정환까지 한국의 마지막 주자들은 모두 커제 손에 커트당했다.
박정환은 간난신고를 무릅쓰고 4연승 스토리를 쓰며 대회 흥행을 이끌었다. 졌지만 잘 싸웠다. 깨끗하고 아름다운 패배도 있다. 최종국을 마치고 언론인터뷰에선 “정말 많은 분이 응원해 주신다는 것을 느꼈다. 덕분에 마지막까지 올 수 있었다. 후반에 제 실력이 모자라서 아쉬운 내용을 보여드렸지만 앞으로도 많은 세계대회가 있으니까 더 열심히 해서 다음에 더 좋은 결과로 찾아뵐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말을 남겼다.
[승부처 돋보기] 흑, 역전의 기회 있었는데… 제21회 농심신라면배 14국 2020.08.22. ●박정환 ○커제 334수 백반집승 농심신라면배 최종국. 5억 원 상금, 동료들의 염원이 어깨를 짓누른다. 둘 다 형세가 유리해질 때마다 행마가 움츠러들었다. 역전에 역전이 이어졌다. 초반 100수까지 박정환이 인공지능처럼 두며 우세를 유지했다. 하지만 우하귀에서 행마가 삐끗하면서 몇 수 차이로 형세는 뒤집혔다. 백도 골인지점이 눈앞에 보이자 안도했다. 50여 수를 더 진행하자 이번에는 커제에게 느슨한 수가 나왔다. 박정환은 다시 끝내기에서 형세를 바짝 따라잡았다. 종반은 반집을 다투는 박빙의 형세였다. 장면도 #장면도 중앙 백대마가 아직 두 눈이 없다. 박정환은 우선 흑1로 위협하고, 흑3으로 턱밑에 칼날을 들이댔다. 단도직입적인 공격은 실패했다. 백은 4, 6 교환을 선수로 하고 8로 이어가는 모양새를 만들었다. 흑3은 우상귀(세모 표시)에 대한 영향력이 약했다. 대신 A로 쭉 뻗어 B와 C 양쪽 공격을 맞봤으면 역전이었다. 참고도1 #참고도1 백이 2로 막아 귀에서 살면 흑3(장면도 B)으로 둬서 대마를 잡으러 간다. 단순히 백8을 두면 이어갈 수가 없다. 우변에선 백10 아니라 어떤 수를 둬도 한 눈을 더 만들기 어려웠다. 참고도2 #참고도2 만약 백의 중앙 대마가 살면 귀쪽으로 흑3(장면도 C)을 둔다. 흑7, 9까지 패를 노린다. 실전에서 흑은 단순한 끝내기밖에 못 했고, 우상귀 백은 알뜰하게 6집이나 내고 살았다. |
박주성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