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최근 옵티머스 투자 사실을 공시한 업체가 무더기로 쏟아졌다. 넥센, LS일렉트릭, JYP엔터테인먼트, 에이스토리, 대동스틸, 한국가구, 경동제약 등 총 7곳이다. 주가에 악영향을 의식한 듯 지난 8월 15일 광복절 연휴를 앞둔 14일에 투자 사실을 알렸다. 상장사들이 반기보고서에서 이 내용을 공개한 만큼 추후 새롭게 공시하는 곳은 나오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최근 일부 상장사들이 반기 보고서를 통해 옵티머스 펀드 투자 사실을 뒤늦게 밝혔다. 사진=옵티머스자산운용 홈페이지 캡처
그동안 옵티머스 펀드에 투자한 기업이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지만 선제적으로 투자 사실을 알린 일부 상장사를 제외한 나머지 기업들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NH투자증권이 집중적으로 옵티머스 펀드를 판매했고, 만기가 6개월과 9개월인 데다가 환매 중단이 확정되지 않은 펀드도 남아 있어 상황을 더 지켜보자는 취지였다.
사태가 불거진 이후 NH투자증권이 발빠르게 대응에 나선 점도 상장사들이 투자 사실 공개를 늦춘 이유로 꼽힌다. 최근 공시를 낸 상장사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이들 대부분은 NH투자증권의 제안을 받고 투자를 결정했다. 일부는 증권사 임원들로부터 권유를 받았다는 곳도 있다. 펀드 환매 중단 직후 NH투자증권 경영진은 직접 사과를 하고 책임을 피하지 않겠다는 공식 입장을 내는 등 적극적으로 움직였는데, 이는 개인투자자들뿐만 아니라 상장사들을 의식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상장사들의 잇따른 공시로 인해 상황이 크게 달라질 전망이다. 단순 투자 사실뿐만 아니라 얼마를 어디에 투자했는지까지 공개한 만큼 상황을 더 지켜보거나 대응을 미룰 이유가 없어졌다. 무엇보다 각 상장사들이 집계한 피해 규모가 상당하다.
투자 사실을 공시한 업체 중 가장 많은 돈을 투자한 곳은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을 제작한 에이스토리다. 에이스토리는 반기보고서에서 올해 상반기 매출 44억 원에 순손실 96억 원을 냈다고 밝혔다. 이 순손실 규모의 대부분이 옵티머스 펀드 투자금이다. 펀드에 90억 원을 넣었고, 이 투자금 전액을 평가손실로 처리했다. 에이스토리는 지난해 7월 코스닥 시장에 입성했다. 당시 상장주관을 NH투자증권이 맡았다.
LS그룹 계열사 LS일렉트릭(옛 LS산전)은 옵티머스 펀드에 50억 원을 투자했다. 구체적으로 LS일렉트릭의 100% 자회사 LS메탈이 NH투자증권을 통해 지난 7월 16일과 21일 각각 만기가 오는 펀드에 20억 원, 30억 원을 넣었지만 돌려받지 못하고 있다. LS메탈은 비상장사로 별도 공시 대상이 아니다. LS일렉트릭 관계자는 “총 50억 원 가운데 15억 원을 공정가치 측정에 따른 금융자산평가 손실로 인식했다”며 “회수 결과를 예측할 수 없고 공정가치 측정에 불확실성이 있지만 전체 금액의 30%만 손실로 인식하는 게 합리적이라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넥센그룹 지주사 (주)넥센은 옵티머스 펀드에 30억 5096만 원이 물려있다. 앞서 넥센은 또 다른 대규모 환매 중단 사태가 불거진 라임 무역금융 펀드에 20억 원을 넣었다가 10억 원을 평가손실로 반영했다. 1년 사이에 두 건의 펀드 투자에서 피해를 입은 만큼 타격이 크다. 라임 펀드는 미레에셋증권, 옵티머스 펀드는 NH투자증권을 통해 투자했다. 넥센은 추후 나머지 투자 금액 전액을 손실 처리할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연예기획사 JYP엔터테인먼트도 옵티머스 펀드에 40억 원을 투자했다. 원금 30%를 평가손실로 처리했다. 그밖에 대동스틸은 20억 원, 한국가구는 10억 원, 경동제약 5억 원 등도 옵티머스 펀드 투자 사실을 반기보고서를 통해 공개했다.
상장사들이 투자 사실을 공개하면서 적극 대응을 지체할 이유가 없어졌다. 판매사가 내놓을 보상안에 따라 소송전 여부가 갈릴 전망이다. 사진=연합뉴스
옵티머스 펀드는 공공기관 매출 채권에 투자하는 펀드라며 투자금을 모았지만 실제로는 부실한 비상장사 사모사채로 돈을 빼돌렸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사실상 ‘사기 펀드’였던 셈이다. 그러나 옵티머스자산운용의 환매 여력은 불투명한 상황이다.
상장사들은 대부분 판매사로부터 안정적인 펀드라는 안내를 받고 투자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판매사의 ‘불완전 판매’라는 취지다. 이 때문에 금융당국과 NH투자증권 등 판매사가 검토 중인 보상안에 자신들도 포함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상장사들은 전문투자자라 불완전 판매가 성립될지 여부는 확실치 않다. 자본시장법상 상장법인은 전문투자자로 분류된다. 원칙적으로 설명의무, 적합성 의무 등 투자자보호 제도가 적용되지 않는다. 개인투자자들과는 달리 불완전 판매라는 상장사들의 주장에 힘이 실리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라임 펀드의 ‘전례’가 그대로 적용될지도 미지수다. 앞서 금융감독원 분쟁조정위원회는 라임 무역금융 펀드에 대해 ‘착오에 의한 계약취소’를 적용해 전액 배상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라임과 달리 옵티머스 펀드는 판매 당시 손실이 확정됐는지가 가려지지 않았다. 사기에 의한 계약취소 법리를 적용할 순 있지만, 이 경우 상장사들이 판매사의 사기 혐의를 입증해내야 한다.
결국 NH투자증권의 결단이 중요한 상황인데, 회사는 보상안을 두고 장고를 거듭 중이다. 지난 7월 23일과 8월 19일 각각 이사회를 열고 펀드 가입고객에 대한 선지원 안건을 논의했지만 아직까지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고객 보호 차원에서 선지급을 해야 한다는 의견과 법적으로 판매사의 잘못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은 상황에서 보상을 할 경우 배임 소지가 있다는 의견이 엇갈리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 과정에서 사외이사 두 명이 잇따라 사임하기도 했다.
상장사들은 당장은 NH투자증권 이사회의 결정을 지켜본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전액, 또는 적어도 70% 이상의 보상이 이뤄지지 않으면 소송전에 돌입할 가능성도 내비치고 있다. NH투자증권이 극적으로 보상안을 만들더라도 상장사들의 기대에 못 미치면 역시 소송전은 피할 수 없다. 넥센과 LS메탈 등 최근 투자 사실을 공시한 일부 회사들의 각 법무팀이 소송 여부 검토에 착수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 때문에 상장사들 가운데 가장 먼저 소송전에 나선 에이치엘비에 관심이 쏠린다. 에이치엘비와 에이치엘비생명과학은 하이투자증권과 NH투자증권을 통해 옵티머스 펀드에 총 400억 원을 투자했는데, 이 증권사들을 상대로 부당이득금 반환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앞서 하이투자증권은 자신들이 판매한 옵티머스 펀드는 공공기관 매출채권에 투자한 펀드가 아니라며 보상 불가 방침을 명확히 했다. 에이치엘비와 하이투자증권 측 주장이 첨예하게 엇갈리는 만큼 소송전도 길어질 전망이다.
금융투자업계 한 관계자는 “대규모 법적 분쟁까지 가면 판매사는 물론 소송을 제기한 상장사들의 타격이 커질 수밖에 없지만 현재로선 다른 방안이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