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4일 광주 518국립묘지를 방문한 김원웅 광복회장. 사진=광복회 홈페이지
김원웅 광복회장은 1980년 12월 민정당 창당준비위원이 됐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지 7달 뒤였다. 1981년 4월 인사에선 민정당 훈련부국장이 됐다. 1981년 6월 민정당은 당원 100만 명을 대상으로 정예화교육을 실시했다. 당시 민정당은 “당원 의식화 운동을 통해 근대적 국민정당으로서의 체제를 확립하고 당의 이미지를 국민 속에 뿌리박도록 하는 데 두고 있다”고 교육 목표를 명시했다. 민정당이 세워놓은 ‘1백만 당원 정예화를 위한 당원교육’ 교과내용은 총 22개였다. 그 가운데 처음으로 명시된 교과목은 ‘새시대와 구시대’였다. 강사는 김원웅 중앙정치연수원 훈련 부국장이었다. 군사정권 집권당 당원 교육 선봉장이었던 셈이다.
1984년 4월 민정당 훈련국 부국장이던 김 회장 직함은 여성국 부국장으로 바뀌었다. 그뒤론 정책국 부국장 직을 맡았다. 1985년 3월 김 회장은 민정당 조직국 부국장으로 임명됐다. 1달 뒤인 1985년 4월 김 회장은 민정당 국책연구소 행정실 부실장으로 임명됐다. 1986년 10월 김 회장은 민정당 청년국장으로 승진했다.
1988년 1월 김 회장은 민정당 사무처 직원 신분으로 13대 총선 공천을 신청했다. 지역구는 당시 신설된 지역구였던 서울 양천갑이었다. 당시 언론 보도에 따르면 김 회장은 민정당 양천갑 지역구 공천이 유력했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공천에서 탈락했다. 김 회장은 이후 전국구(비례대표 전신) 후보 공천 하마평에 올랐지만 그의 이름은 13대 총선 당선자 명단에 없었다.
김원웅 광복회장. 사진=최준필 기자
1988년 5월 김 회장은 민정당 국책연구소 정책연구실 상근연구위원으로 발령됐다. 1988년 7월 29일 김 회장은 민정당 대전동구 지구당 위원장으로 발탁됐다. 김 회장은 1989년 8월 1일 월간 대전저널 창간호를 발간하며 정치 활동에 박차를 가했다.
대전저널을 창간하기 전인 1989년 6월 21일 김 회장은 노태우 정부 핵심 관계자와 만찬을 함께하기도 했다. 1989년 6월 23일 한겨레신문은 “노태우 대통령 핵심 측근인 박철언 청와대 정책보좌관이 민정당 내 ‘무명회’ 회원들을 초청해 저녁식사를 함께했다”고 보도했다. 만찬을 함께한 인사 중엔 김 회장의 이름도 있었다. 한겨레신문 보도에 따르면 박 보좌관은 당시 만찬에서 정계개편 필요성을 제기하면서 “다음 선거에서 민정당이 단독 집권하는 것이 최선책이지만 어렵다면 차선책으로 색깔이 비슷한 정파끼리 모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결과론적으로 보면 13대 총선에서 사상 초유의 ‘여소야대’ 정국이 현실이 된 상황에서 3당 합당의 가능성을 언급한 셈이었다.
5월 14일 광주 518국립묘지를 방문한 김원웅 광복회장. 사진=광복회보 캡쳐
1990년 1월 22일 3당 합당은 현실이 됐다. 민정당과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은 합당에 뜻을 모아 민주자유당(민자당)을 탄생시켰다. 3당 합당 발표 뒤인 4월 3일 당시 민정당 대전동을구 지구당위원장이던 김 회장은 민자당 탈당을 선언했다. 1990년 4월 4일 한겨레신문은 “3당합당 및 지구당 조직책 탈락에 불만을 품고 민정당 지구당 위원장이 탈당한 것은 처음”이라고 보도했다. 이어진 내용에 따르면 김 회장은 “민자당이 개혁보다는 나눠먹기에 바쁜 것 같아 탈당했다”고 밝혔다. 1972년 공화당 사무처 직원으로 채용된 지 18년 만에 당을 떠난 것이다.
이처럼 김 회장은 공화당-민정당-민자당을 거치며 정치 커리어를 쌓았다. 특히 1980년부터 1989년까지 10년의 시간 동안 김 회장은 민정당 주요 당직자로 활약하며 추후 ‘3선 의원’으로 도약할 만한 정치적 기반을 닦았다.
김 회장은 2020년 5월 14일 오전 10시 30분 광주 국립 5·18민주묘지를 참배했다. 광복회가 달마다 발간하는 광복회보 5월호에 따르면 김 회장은 이 자리에서 “광주 민주화 정신은 친일반민족권력에 맞선 투쟁으로 독립운동정신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었다”고 했다. 김 회장이 언급한 친일반민족권력 중심엔 전두환 군사정권 집권여당 민정당이 있었다. 김 회장 발언은 전직 민정당 핵심 당직자들을 정면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핵심 당직자 중엔 김 회장도 있었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