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리오를 미리 보낸 후라 베테랑 슈퍼바이저인 폴과 크리스는 선진 할리우드 기술과 노하우를 우리 제작진에게 선보이며 시나리오상 문자로만 존재했던 재난 현장을 생생하게 재연해 보였다. 20년이 흐른 지금이야 한국의 특수효과 기술도 선진적이다. 그렇지만 당시만 해도 우리 제작진은 세계 최고의 기술에 그저 감탄만 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미국에서 특수효과의 전권을 맡길 폴, 크리스와 계약하고 기분 좋게 한국으로 돌아왔다. 폴과 크리스는 모든 장비와 재료들을 챙겨 촬영 전에 한국으로 입국, 본격적인 촬영에 돌입했다. 그러나 촬영이 진행되면서 조금씩 불협화음이 생겨났다.
감독과 한국의 스턴트맨들은 본능적으로(?) 조금이라도 더 좋은 그림, 한 번도 보지 못한 생생한 재난현장, 가장 위험해 보이는 액션 등을 원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폴과 크리스는 번번이 제동을 걸었다.
원동연 리얼라이즈픽쳐스 대표
“이 정도면 우리가 볼 때 충분히 안전한데 폴과 크리스는 왜 이리 겁이 많은 거냐”, “우리는 다른 한국 영화 현장에서 이것보다 훨씬 더 화재 현장에 가깝게 접근해서 연기를 해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차라리 폴과 크리스를 미국으로 돌려보내고 우리 특수효과 팀이랑 작업하자” 등 한국제작진의 원성(?)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만큼 비등해졌다.
나는 프로듀서로서 한국 제작진은 제작진대로 달래고 폴과 크리스를 만나서 그들의 고충과 의견을 조율해가면서 하루하루 고통의 나날을 보냈다. 드디어 가장 중요한 차량 사고 신을 찍는 날이었다. 도로에서 차량 사고가 났고 119대원이 사고를 수습하는 사이 가스통을 실을 트럭이 사고현장을 덮쳐서 가스통이 폭발하고 차량들은 불이 붙어 재난이 벌어지는 상황을 찍는 날이 다가온 것이다.
이날 촬영을 위해 동원한 차량이 30여 대 스턴트맨이 50여 명 보조출연자 200여 명, 영화에서 가장 스케일이 큰 장면을 찍으려 동원된 카메라만 5대에다가 각종 특수촬영장비들을 다 불러 모은 가장 예산이 많이 소요되는 장면이었다. 영화에서 가장 비용이 많이 드는 장면, 이른바 ‘머니샷’ 촬영이었다.
아침부터 초비상이었다. 이날 촬영에 소요되는 예산은 수억 원을 상회했다. 예정대로 촬영을 끝내지 못하면 예산초과는 불을 보듯 뻔했으며 그 책임은 고스란히 제작사가 안는 상황이라 긴장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었다. 초반 촬영은 순조로웠다. 모든 제작진은 최선을 다해 촬영에 임했고 폴과 크리스도 자신들의 역량을 십분 발휘해서 멋진 장면들을 만들어나갔다.
드디어 가스차량이 사고현장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대로 돌진하는 촬영이 남았다. 이때 폴과 크리스가 촬영을 중단시켰다. 가스트럭이 사고현장을 덮치기 위해서 디딤판을 설치했는데 그 디딤판이 완전하지 못하다며 촬영을 중단시킨 것이었다. 나는 예산과 진행을 책임지는 사람으로서 폴과 크리스에게 그냥 촬영을 강행하겠다고 통보하려고 그들을 만났다. 이 정도 디딤판이면 문제없다, 한국에서는 다 이렇게 해왔다고 하면서 오늘 촬영을 못 끝내면 나는 수억 원의 비용을 감당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폴과 크리스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 촬영을 강행하면 사람이 다칠 수도 있고 심각히 말해서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 난 30여 년간 영화 일을 하면서 내가 제작에 참여한 영화가 흥행한 것이 자랑스러운 게 아니라 내가 책임을 맡은 영화에서 한 사람도 다치지 않은 것이 영광이다. 결국 그날 촬영을 중단하고 디딤판을 안전하게 만든 후 그 다음 날 촬영에 임할 수밖에 없었다.
코로나가 다시 확산세를 보이고 있다. 정책을 결정하고 나라를 이끌어가는 사람들의 고민과 하루하루 힘든 시간을 살아가는 국민들의 고충을 왜 모르겠느냐만 우리는 전문가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대한민국은 정치인들의 레토릭이 아닌 정은경 본부장의 의견을 경청해야만 한다. 정은경 본부장을 위시한 감염전문가들은 내 촬영현장의 폴과 크리스 같은 분이다.
“흥행이 자랑이 아니라 안전이 내 영광이다.”
원동연 영화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