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화학과 SK이노베이션 간 ‘배터리 전쟁’이 장기화 조짐이다. 양측은 ITC의 영업비밀 침해 소송 최종 판결을 목전에 두고 합의점을 찾지 못한 모양새다. LG화학 본사가 위치한 서울 영의도 LG트윈타워 전경. 사진=박은숙 기자
#배터리 분쟁 관련 첫 판결의 승자도 LG화학
업계의 주목을 받은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 간 부제소 합의 위반 소송에서 LG화학이 승리했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지난 8월 27일 SK이노베이션이 LG화학을 상대로 제기한 소 취하 및 손해배상 소송에 대해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이번 판결이 중요한 이유는 양사의 배터리 분쟁과 관련해 국내 법원의 첫 판결이기도 하지만, 넓게 보면 양사가 ITC에서 서로를 제소한 특허 침해 소송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양사의 배터리 분쟁은 지난해 4월 LG화학이 ‘영업비밀 침해’ 혐의로 SK이노베이션을 ITC와 미 연방법원에 제소하며 시작됐다. SK이노베이션은 지난해 9월 3일 두 건의 전기차 배터리 특허를 침해한 혐의로 LG화학과 LG전자를 ITC와 미 연방법원에 각각 제소했다. 이에 LG화학도 지난해 9월 26일 5건의 2차전지 핵심소재 관련 특허 침해 혐의로 ITC와 미 연방법원에 SK이노베이션을 맞제소했다. 이어 LG화학은 4일 “SK이노베이션이 남의 기술을 가져가서는 특허로 등록하고 역으로 특허침해 소송까지 제기했다”며는 내용의 ITC 소송전 입장자료를 내놓기도 했다. 영업비밀 침해 제소로 시작된 배터리 분쟁이 특허소송으로 2라운드를 맞이한 셈이다.
SK이노베이션 측은 LG화학이 ITC에 제소한 5건의 특허 가운데 분리막 특허 ‘미국특허 7662517’과 ‘한국특허 KR 310’이 동일한 특허라며 지난해 10월 LG화학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해당 분리막 특허에 대해 2014년 양사가 국내‧외에서 10년간 쟁송을 하지 않겠다는 합의를 맺었으나 LG화학 측이 ITC 소송을 제기하며 합의를 깼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재판부는 “2014년 합의 내용에 미국 특허 부제소 의무가 포함된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 SK이노베이션 측 소 취하 청구를 각하하고 손해배상 청구는 기각했다.
판결에 대해 SK이노베이션은 항소 의지를 밝히면서도 합의 가능성을 언급했고, LG화학은 환영의 뜻을 밝혔다. 관련 업계에서는 입지가 좁아진 SK이노베이션이 적극적으로 합의를 원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서울 종로구 SK서린빌딩 전경. 사진=일요신문DB
#‘배상액은 일단 네가 먼저 불러라’
본격적인 합의에 앞서 양측의 기싸움이 치열하다. 부제소 합의 위반 소송 1심 판결 직후 양사의 협상 테이블에서 파열음이 났다는 보도가 나왔다. LG화학은 내심 수조 원대의 배상액을 기대하고 있으나, SK이노베이션은 수백억 원대를 제시하면서 합의 협상이 사실상 중단됐다는 것. 하지만 양사는 일단 이 사실 자체를 부인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상대방이 먼저 배상액을 제시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LG화학은 법리 다툼에서 유리한 위치를 선점한 만큼 서둘러 합의할 이유가 없다는 분위기다. ITC 조기패소 판결로 영업비밀 침해가 사실상 인정되고 수입금지 조치가 유력해진 SK이노베이션이 직접 해결책을 제안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LG화학 관계자는 “일각에서 SK이노베이션이 수천억 원대까지 배상할 용의를 타진했던 것으로 알려졌지만 LG화학은 그런 얘기를 들어본 적도, (금액을) 제시받은 적도 없다”고 말했다.
SK이노베이션도 애초에 자신들이 배상액 규모를 먼저 제시한 적 없다는 입장이다. LG화학 측이 ITC의 배상금 산정 기준에 따라 영업비밀이 침해된 부분에 대한 근거를 제출하고 그에 따른 배상금을 제시해야 한다는 것. SK이노베이션 관계자는 “ITC가 지난 4월 조기패소 전면 재검토를 발표하며 LG화학 측에 피해 금액을 산출해 제시하라고 요구했으나 LG화학 측이 아직까지 밝히지 못하고 있다”며 “(피해 금액 산출 없이) 무작정 합의를 하게 되면 배임이 된다”고 전했다.
#ITC 예비판결 두고도 도돌이표 진실게임
결국 양측은 앞서 각자가 밝혔던 입장을 되풀이하는 데 머물고 있다. SK이노베이션은 영업비밀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침해해 실제 사업에 적용했는지 증거가 밝혀지지 않았으므로 혐의를 제기한 LG화학이 관련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LG화학은 ITC가 이미 관련 자료를 확보해 조기패소 판결을 내렸다고 반박했다.
LG화학 관계자는 “조기패소 판결문에 (영업비밀 침해) 사례들이 나와 있고, 리스트(자료)는 비밀보호명령으로 묶여있어 ITC와 대리인만 확인할 수 있다”고 전했다. 이어 “ITC는 어떤 영업비밀을 어떻게 사용해 소재와 부품, 셀, 모듈 등을 만들었는지 구체적인 리스트를 갖고 있고, 이를 인정했기 때문에 조기패소 결정을 내린 것”이라고 강조했다.
SK이노베이션 관계자는 “ITC 예비판결의 핵심은 증거인멸”이라며 “(SK이노베이션) 해외 건설팀에서 문서를 삭제한 점과 전산시스템상 자동 삭제에 의해 증거를 보존하지 못했다는 점이 인정된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ITC가 지난 4월 예비판결에 대한 재검토 요청을 수용했고, (ITC 판결에 대해) 미 행정부의 비토권을 기대하고 있다는 일각의 시각은 사실이 아니”라며 “소송과 합의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 간 배터리 분쟁은 장기화될 전망이다. 그러나 재계에서는 여전히 양사가 오는 10월 ITC 판결을 전후로 합의를 도출해낼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양사 모두 세계 배터리 시장의 입지나 기업 이미지 등을 고려해 합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총수 간 회동이 아니더라도 그룹 차원의 극적 합의로 마무리 될 가능성이 있다”고 전했다.
여다정 기자 yrosad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