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1일 삼성그룹 주가는 일제히 상승세를 기록했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이날 삼성전자는 전일 대비 0.37% 오른 5만 4200원으로 거래를 마쳤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0.39% 상승했고 삼성물산은 2.31% 오른 뒤 장을 마감했다. 삼성생명, 삼성화재, 삼성SDI, 삼성카드, 삼성증권, 삼성중공업, 삼성SDS 등 다른 삼성 계열사 주가 역시 올랐다.
이날은 서울중앙지검 경제범죄수사부(부장검사 이복현)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전현직 경영진 등 11명을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행위 및 시세조종, 업무상 배임 등의 혐의로 불구속 기소한 날이다. 그룹 총수인 이 부회장의 사법리스크가 본격화됐다는 내용과 동시에 ‘삼성 경영 위기설’이 쏟아져 나왔지만 시장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삼성전자 비롯한 다른 계열사 주가는 다음 날인 9월 2일에도 올랐다.
이재용 부회장에 대한 검찰의 기소 결정은 이미 수개월간 시장 예상 범위 안에 들어있었다. 주가가 큰 폭의 변화를 보이지 않은 근거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증권가에선 다른 분석을 내놓고 있다. 이 부회장의 ‘사법 리스크’가 지금은 물론, 앞으로도 삼성 관련 주가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평가한다. 이 부회장이 재판을 받는 일이 삼성의 실적 등 경영 환경을 위협하지 않는다는 분석이다.
이재용 부회장이 지난 6월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구속 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는 모습. 사진=임준선 기자
실제 과거 삼성전자 실적은 총수의 사법리스크에 영향을 받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이재용 부회장은 2017년 2월 17일부터 2018년 2월 5일까지 1년간 뇌물공여 사건으로 구속됐다. 불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는 것보다 공백이 컸지만 이 기간 삼성전자 영업이익은 53조 6000억 원으로, 이 부회장이 정상적으로 경영활동을 했던 2016년(29조 2000억 원)보다 2배 가까이 늘었다.
이 부회장 석방 이후인 2018년엔 58조 8000억 원으로 더 늘었으나, 2019년엔 다시 22조 7000억 원으로 줄었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삼성전자 실적은 이 부회장의 사법리스크 여부와 관계 없이 세계 반도체 업황에 따라 달라졌다”며 “같은 기간 주가 역시 같은 모습을 보였다”고 말했다.
삼성전자는 올해 2분기 어닝서프라이즈를 기록했다. 이 기간 매출은 52조 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7%가량 줄었지만 영업이익이 8조 1000억 원으로 1년 전과 비교해 22.7%, 전 분기보다는 25.58% 증가했다. 이 기간 이재용 부회장은 현장 경영 등을 중심으로 광폭 경영 행보를 보였지만, 증권가에선 이번 실적 역시 ‘총수 효과’보다는 코로나19 사태로 재택근무, 온라인 강의 등이 늘면서 반도체 부문의 수요가 개선돼 나온 실적이라고 분석한다. 일부 증권사들은 이 부회장 기소 이후에도 3분기 어닝서프라이즈를 관측하는 등 하반기 삼성전자 실적에 장밋빛 전망을 내놓고 있다.
오히려 삼성전자 주가를 움직이는 건 다른 이슈가 될 것으로 보인다는 전망이 나온다. 일명 ‘삼성생명법’으로 불리는 보험업법 개정안 도입이다. 19대 국회에서 처음 등장한 이 법안은 번번이 통과되지 못하다가 이번 21대 국회 들어 통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관측된다. 보험업법이 통과하면 삼성생명과 삼성화재는 보유하고 있는 삼성전자 지분 중 20조 원어치 이상을 팔아야 한다. 다른 증권사 연구원은 “이 법안이 통과될 경우 대량의 삼성 주식이 시장에 쏟아질 수 있는 만큼 주가가 큰 폭의 변화를 보일 수 있다”고 말했다.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전경. 사진=일요신문DB
일각에선 총수 사법리스크가 불거지면 중장기적인 비전을 세우고 대규모 투자를 단행하기 힘들다는 주장도 나온다. 대형 투자와 인사 등 전략적 의사 결정이 총수의 최종 승인에 따라 확정된다는 것이 ‘정설’인데, 재판을 받기 위해 법정을 오가면 이 부회장의 운신의 폭이 줄어들 수밖에 없고 이 때문에 추후 무죄가 나오더라도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국내 최대 인수합병 금액을 기록한 2017년 삼성의 하만 인수(9조 원) 이후 지금까지 대규모 투자가 없었다는 점이 이 주장에 힘을 싣는다.
그러나 삼성은 국내 대기업집단 중에서도 전문경영인 체제를 가장 잘 갖춘 곳으로 꼽힌다. 이미 이건희 회장 와병 이후 오너 부재 상황을 대비해 이사회 체제를 촘촘히 다듬고 있다. 그동안 삼성이 경영체제와 관련해 공식화한 내용을 종합하면, 현재 삼성 계열사들의 최고 의사결정 기구는 각 회사의 이사회다. 대표이사와 이사회 의장을 분리해 경영 독립성을 강화했다.
삼성전자의 경우 등기임원인 3명의 대표이사와 2명의 사내이사, 5명의 사외이사가 최종 의사결정을 한다. 올해는 이들의 경영 활동을 감시하고 견제하기 위해 외부 감시기관인 준법감시위원회를 새로 구성했다. 다른 삼성 계열사도 같은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모두 이사회를 중심으로 중요한 의사 결정을 내린다. 이 때문에 삼성은 최근 수년 동안 단 한 차례도 스스로 ‘그룹’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있다.
이재용 부회장의 직함은 부회장이지만 미등기 임원이다. 법적으로 이사회 참여가 불가능하다. 지분을 통해 지배력을 행사하면서 경영총괄을 맡고 있지만 삼성전자는 물론 다른 계열사에도 법적 책임을 지는 의사 결정을 할 수 없다. 과거 삼성의 컨트롤타워인 미래전략실의 후신 격인 사업지원TF를 중심으로 일부 계열사의 TF들이 의견 조율을 맡고 있지만 이 부회장과 마찬가지로 의사 결정과 관련해 법적 책임을 지는 조직은 아니다.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사옥 앞 깃발. 사진=일요신문DB
이재용 부회장의 사법 리스크 탓에 대규모 투자가 중단되지도 않았다. 삼성 관계자에 따르면, 이 부회장은 2016년 11월 이후 2020년 9월 현재까지 열 차례 검찰에 소환되고, 세 번 구속영장실질심사를 받았으며 70회 이상 재판에 출석했다. 삼성바이오 부정회계 의혹 등과 관련한 검찰 수사 기간에는 압수수색 50여 차례, 임직원 소환조사 건수만 430차례가 넘는다.
그러나 이 기간에 포함된 시기인 2018년 8월, 삼성전자는 사상 최대 규모의 투자·고용 계획을 발표했다. 이 시점을 기준으로 3년간 총 180조 원을 투자하고, 이 가운데 130조 원은 국내에 투자한다고 했다. 발표 2년 뒤인 올해 8월 13일 삼성은 투자가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며 성과를 외부에 공유했다. 당시 모든 투자가 예상치를 뛰어넘었고, 특히 국내 투자 목표치인 130조 원은 약 7조 원을 초과 달성할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번 투자 계획 수립 및 집행 시기는 국정농단 재판과 검찰의 ‘삼성 불법 경영승계 및 부정회계 의혹’ 수사가 한창 이뤄지고 있던 시점과 일치한다. 앞서의 투자 성과가 이재용 부회장이 주도적으로 추진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본다면, 이번 불구속 기소 과정에서도 충분히 비슷한 수준의 경영 활동을 할 수 있다는 설명에도 힘이 실릴 수 있다.
이재용 부회장은 지난 5월 대국민 입장발표를 통해 4세 경영 포기를 선언했다. 재계 일각에선 이번 사법리스크를 계기로 삼성이 소유와 경영 분리를 심도 있게 추진할 가능성도 제기하고 있다. 재계 한 관계자는 “지금까지의 대규모 투자는 신성장동력에 대한 투자보다는 전반적으로 잘하고 있는 사업에 집중됐다. 전문경영인 체제가 잘 구축돼 있고, 총수의 역할을 일부 내려놨다고 해도 하루아침에 큰 변화가 생기는 건 아닌 만큼 지금부터 그 중간 지점을 찾아가는 작업이 시작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