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꼭 주일 예배를 고집할까. 평소 신앙이 같은 사람들끼리 만나 함께 예배나 예불을 드리고, 또 함께 밥을 먹으며 삶을 나누는 모습은 아름답다. 그런데 일상이 아닌 비상이 아닌가. ‘나’도 모른 채 누군가의 건강과 목숨에 치명타를 입힐 수도 있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
기독교뿐 아니다. 아브라함은 유대교에서도, 이슬람교에서도 믿음의 조상이고 신앙의 아버지다. 그런데 ‘창세기’를 읽어보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 대해 실망스러운 흔적이 있다. 그는 자기가 살기 위해 아내 사라를 여동생으로 속이고, 파라오에게 건넨 소인배이기도 했다.
아브라함의 가정사도 녹록지 않았다. 아내 사라가 자기가 낳은 아들 이삭을 지키겠다고, 하녀 하갈이 낳은, 아브라함의 장자 이스마엘을 쫓아내라고 다그치는 일이 있었다. 그때 아브라함은 사라 뒤에 숨어 큰아들 이스마엘과, 이스마엘의 어머니 하갈을 지켜주지 못하고 광야로 내모는 비겁한 남자이기도 했다. 이런 기록들을 보면 아브라함을 신앙의 아버지라고 하는 이유는 그가 평생 모범이 될 만한 인격적인 삶을 살았기 때문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해진다.
그렇다면 어떻게 아브라함이 신앙의 아버지일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바로 아브라함이 중심의 힘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창세기의 짧은 문장이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어느 날 참 많이 울었던 문장이기도 하다. 왜 나는 아브라함처럼 ‘내가 여기 있나이다’를 하지 못했을까. 아브라함의 태도는 아담하고 비교해보면 분명해진다. 하나님이 에덴의 아담을 불렀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아담은 하나님 앞에 나서지를 못하고, 마침내 하나님이 그를 찾아냈을 때 이렇게 변명한다.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자기 삶 앞에서 정직해질 수 없었던 아담은 중심의 힘 하나님을 마주하지 못하고 변명을 일삼는다. 죄책감 때문에, 두려움 때문에 핑계를 만들어 책임전가까지 한다. 하나님이 주셔서 함께한 여자 때문에 선악과를 먹었다고.
세파에 시달리고 흔들려도 중심을 잡을 수만 있다면 평화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이다. 반면 지금 여기에,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존재할 수 없는 사람은 에덴에 살아도 에덴에 사는 것이 아니다. 아담이 에덴에서 쫓겨난 것은 자업자득이라는 생각까지 든다. 두려움도 없이, 불안도 없이, 핑계도 없이, 기대도 없이, 들뜸도 없이, 망각도 없이 지금 여기, 있는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긍정할 수 있는 시간, ‘내가 여기 있나이다’를 하는 시간이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할 수 있는 힘, 거추장스러운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자기의 신 앞에 홀로 서는 중심의 힘이다. 예배는 바로 그 중심의 힘을 키우는 일이다. 궁극에서는 혼자 하는 일이다.
광화문 네거리 교보빌딩에서 이런 시가 걸려있는 것을 보았다. “씨앗처럼 정지하라, 꽃은 멈춤의 힘으로 피어난다.” 어쩌면 지금은 사람들이 모이는 대면예배를 그만두고, 각자 자기 있는 자리에서 이 멈춤의 시간을 경험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모든 말을 삼키고, 모든 소통을 삼키고, 고독 속에 잠기는 이 시간을 겪고 다시 태어나야 말도 살아있는 말이 되고, 소통도 진짜 소통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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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향 수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