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경의 국내 복귀는 경기장 안팎으로 큰 화제를 낳았다. 사진=박정훈 기자
#뚜껑 연 KOVO컵…“완전히 가지고 노네요”
“그래도 우승팀인데, 완전히 가지고 노네요.”
지난 8월 30일 충북 제천체육관에서 열린 2020 제천·MG새마을금고컵 프로배구대회 여자부 첫 경기 현대건설과 흥국생명의 맞대결을 지켜본 GS칼텍스 차상현 감독이 남긴 말이다. 흥국생명은 지난 시즌 V리그 정규리그 1위팀 현대건설을 3-0으로 ‘셧아웃’시켰다. 2세트는 10점차 이상 차이를 내며 25-13으로 흥국생명이 가져갔다. 경기가 끝나기까지 불과 1시간 13분이 소요됐다.
흥국생명은 이번 시즌을 앞두고 FA(자유계약) 시장에서 ‘최대어’로 꼽히던 세터 이다영을 데려왔다. 내부 FA인 레프트 이재영까지 붙잡으며 쌍둥이 자매가 한 팀에서 활약하게 됐다. 여기에 김연경도 가세했다. 2009년 일본으로 진출한 이후 11년 만에 친정팀으로 돌아왔다. 국가대표 핵심 전력 선수들을 보유하며 흥국생명은 단숨에 우승권 전력으로 올라섰다.
뚜껑을 연 KOVO컵에서에서 흥국생명은 예상대로 막강한 전력을 자랑했다. 조별리그 3경기에서 셧아웃 행진으로 준결승에 선착했다. 3경기 동안 단 1세트도 내주지 않았다. 주장 김미연이 부상으로 빠진 가운데서도 낸 성과다. 이어질 준결승, 결승에서도 흥국생명의 우승 여부가 아닌 과연 이들이 한 세트라도 내줄지 세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무실세트 우승이 이뤄진다면 2006년 컵대회 창설 이후 최초 기록이다.
김연경의 복귀로 흥국생명은 ‘어벤져스급’ 선수단이 결성됐다. 이들은 KOVO컵 첫 3경기에서 무실세트 3연승을 달렸다. 사진=연합뉴스
#‘어벤저스급’ 선수단 모은 흥국생명
흥국생명은 지난 시즌 플레이오프 진출권인 3위에 올랐다. 2018-2019시즌에는 정규리그와 플레이오프 통합 우승을 차지한 바 있다. 원래 상위권에 있던 팀이다.
이번 시즌 연봉 6억 원에 흥국생명과 재계약을 체결한 이재영은 2019년 팀의 우승과 함께 정규리그와 챔피언결정전 MVP를 휩쓸며 V리그 최고 선수 반열에 올라섰다. 센터 김세영 역시 V리그 수위급 자원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이주아는 신인 드래프트 1라운드 1순위 출신으로 고교 시절부터 국가대표로 선발된 유망주다. 흥국생명의 이러한 선수 라인업에 대해 다수의 영웅이 힘을 합쳐 임무를 수행하는 영화 ‘어벤져스’에 빗대 ‘흥벤져스’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흥국생명은 블로킹 높이도 최강으로 평가받는다. 김연경, 김세영, 외국인선수 루시아는 모두 190cm가 넘는 장신이다. 세터 이다영도 V리그 여자부 세터를 통틀어 2번째로 큰 선수다. 높이의 중요성이 점점 더 강조되는 현대 배구에서 흥국생명의 높이는 큰 장점이 된다.
베테랑 김해란이 은퇴를 선언해 유일한 빈틈으로 지목되던 리베로 자리에도 5년차 도수빈이 기대 이상의 활약을 보이고 있다. 도수빈의 선전에는 국내 최고 수비력을 자랑하는 김연경과 이재영의 존재가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뒤따랐다.
#‘착한 양보?’ 페이컷 바라보는 시선
김연경은 11년 만의 복귀 과정에서 연봉을 놓고도 화제를 낳았다. 그는 터키, 중국 등 해외리그에서 세계 최고 선수로 인정받으며 많은 연봉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정확한 액수가 밝혀진 바 없지만 ‘배구선수 전체 1위’ 등 수식어가 붙었고 20억 원 내외의 금액을 받는 것으로 추정됐다. 김연경은 자신이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식빵 언니’에서 17억 원 연봉 수령을 언급한 온라인상의 글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것밖에 안 될까”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김연경이 흥국생명의 유니폼을 입으며 합의한 금액은 3억 5000만 원이다. 기존 연봉의 절반에도 훨씬 못 미치는 금액이다. 김연경은 “후배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기 위해서”라며 자신의 연봉 삭감을 설명했다. 1년 뒤로 연기된 올림픽에 최상의 몸상태로 임하기 위해 안정적인 경기 출장과 몸관리를 원했던 김연경은 큰 폭의 연봉 삭감을 받아들였다.
배구여제의 통 큰 결단에 찬사가 쏟아졌다. 김연경은 해외에서 생활하는 동안에도 꾸준히 국가대표팀에 합류해왔다. 누구보다 대표팀에 자부심을 느끼고 최선을 다하는 선수였다. 언제나 올림픽에 대한 열망을 드러내며 메달 획득을 다짐했다. 김연경의 복귀는 V리그로서도 흥행 호재로 작용할 수 있기에 반기는 목소리가 많았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김연경의 연봉 축소를 곱게 보지 않았다. 3억 5000만 원이라는 연봉 수령은 일종의 ‘페이컷(의도적 연봉 축소)’이라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다.
V리그는 한국프로농구(KBL), 한국여자프로농구(WKBL)와 함께 샐러리캡 제도가 운영되는 리그다. 메이저리그(MLB), 미국프로농구(NBA) 등에서도 적용되는 제도다. 리그의 균형을 위해 구단들이 비슷한 수준의 연봉을 지급하기를 바라는 차원에서 만들어진 제도다. 특히 국내 리그는 ‘하드캡’을 적용해 예외 없이 선수들에게 지급되는 연봉의 상한선을 지켜야만 한다. 팀 내 한 선수가 많은 연봉을 받는다면 나머지 선수들의 연봉이 필연적으로 줄어들 수밖에 없다.
#샐러리캡 관련 과거 발언까지 ‘소환’
김연경은 자신의 입단으로 줄어들 다른 선수들의 몫을 걱정했다. V리그에서 선수 한 명이 받을 수 있는 최대 금액은 7억 원이지만 김연경은 그 절반을 택했다. 이에 흥국생명도 다른 선수들에게 적정한 연봉을 배분할 수 있었다. FA 계약을 체결한 이재영, 이다영에게만 10억 원의 연봉이 돌아갔다.
김연경이 연봉을 스스로 깎아 ‘슈퍼팀’을 결성했다는 비난이 나올 만한 상황이다. 규정을 위반하는 행위는 아니지만 규정의 빈틈을 노리는 행위로 지탄받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NBA 스타 르브론 제임스는 이 같은 페이컷으로 끊임없이 비난을 받고 있다. 제임스는 2010년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에서 마이애미 히트로 이적할 당시 연봉을 깎으며 드웨인 웨이드, 크리스 보쉬 등 정상급 선수들이 한 팀에서 뭉칠 수 있었다. 이들 외에도 레이 앨런, 크리스 앤더슨 등 수준급 선수들이 뒤를 받쳤다. 제임스가 정확히 측정된 고연봉을 수령하고 구단 샐러리캡이 모자라는 부분은 저연봉 선수들로 대체해야 한다는 비판이 뒤따랐다.
더욱이 김연경의 선택은 그의 지난 발언과 행동들에 비춰 상반된 것이어서 논란을 키우고 있다. 그는 2018년 3월 V리그 여자부의 샐러리캡 상한선이 동결되자 “점점 뒤처지고 있다. 이런 제도라면 나는 한국에서 못 뛰고 해외에서 은퇴해야 할 것 같다”는 말을 한 바 있다. 샐러리캡 상한선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던 과거와 달리 현재 샐러리캡에 맞추는 편법을 사용했다는 비난이 나왔다. 현실적으로 20억 원에 달하는 기존 연봉을 유지할 수는 없지만 최대 연봉(7억 원)을 수령해 샐러리캡 제도의 취지에 맞는 선택을 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김연경의 11년 만의 국내 복귀는 여러 모로 파장을 낳고 있다. 배구계 최고 스타의 국내 복귀에 V리그 정규시즌이 아닌 컵대회임에도 여자부 경기 TV 중계 시청률이 2%를 넘겼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무실세트 우승이라는 신기록 달성 여부도 관심사다. 향후 김연경과 흥국생명의 행보에 눈길이 가는 이유다.
김상래 기자 scourg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