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연 프리랜서 |
오른쪽 좌석에 운전대가 달려있는 영국에서 박지성은 2년 전 왼쪽 좌석에 운전대가 있는 포르셰 카이엔을 구입한 뒤 지금도 그 차를 몰고 다닌다. 그러다보니 주차장 티켓을 뽑으려면 건너편 좌석으로 몸을 옮기거나 아예 차 밖으로 나와야 하고, 도로 주행을 할 때도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지성이 왼쪽 운전대를 고집한 데에는 남다른 사연이 있었다. 아버지 박성종 씨가 아들의 차량 구입을 결사반대했기 때문이다. 결국 아버지와 오랜 협상 끝에 ‘한국에서도 이 차를 몰고 다니겠다’는 약속을 걸었고 영국에서 구입한 지 3년이 지나면 관세가 붙지 않는다는 말까지 덧붙여 어렵게 승낙을 받아냈다. 엄청난 몸값을 자랑하는 박지성이지만 생애 최초로 자신 명의의 차량을 구입하는 데 아버지의 허락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부분과 한 번 구입한 차는 최소한 10년 이상은 타고 다니겠다고 생각하는 점들이 박지성의 남다른 면면을 느끼게 해준다.
인터뷰를 시작하면서, 지난주 볼턴 이청용이 박지성에게 간접적으로 물었던 질문을 던졌다.
―이청용 선수한테, 만약 자신이 기자라면 박지성 선수에게 어떤 질문을 하고 싶으냐고 물었더니 ‘형은 한국에서 지하철 타 봤는지 궁금하다’고 말하더라.
▲(실소를 금치 못하면서) 자긴 타봤대요? 참 나, 전 많이 탔어요. 중학교 시절, 경기하러 갈 때 학교 버스가 없다보니 대중교통을 이용했거든요. 버스 타고 전철 갈아타고…. 요금이요? 교통카드를 이용하는 건 알겠는데 타본 지가 하도 오래돼서 잘 기억이 안 나요.
―최근 열린 첼시, 블랙번전에서 명백한 페널티킥 상황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주심이 파울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 경기를 마치고 나면 후유증이 꽤 오래 남을 것 같다.
▲이미 게임은 끝이 났고 되돌릴 수 없는 결과이기 때문에 심각하게 생각하진 않아요. 단 리그 우승을 앞둔 중요한 상황에서 그런 판정이 내려진다면 굉장히 속상한 일이긴 하죠.
―지난 챔피언스리그 8강, 바이에른 뮌헨과의 2차전에 선발명단에조차 포함되지 않았다. 2년 전 챔피언리그 결승전 때도 교체 멤버로조차 뛰질 못했는데, 그렇게 관심을 모으는 경기에 출전하지 못할 경우, 어떤 생각이 드나.
▲감독님의 전술적인 선택이라 제가 뭐라 할 수 있는 부분이 없어요. 그때(바이에른 뮌헨 2차전)도 감독님께서 직접 명단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말씀해 주셔서 경기 전에 알고 있었지만 기분이 좋진 않았죠. 2년 전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때도 많이 아쉽기는 했어요. 경기 시작 전까지 제가 명단에 포함되지 못한 부분에 대해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경기가 시작되면 그런 사실을 잊게 돼요. 경기에 집중하다보니까 다른 생각이 들지 않더라고요.
―현재 맨유의 정규리그 우승이 어려워 보이는 상황이다. 첼시와 치열한 선두다툼을 벌이다 막판에 승운이 따르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 캐리커처=장영석 기자 zzang@ilyo.co.kr |
―올 시즌 자신이 거둔 성적표에 대해 냉정한 평가를 내린다면?
▲지난 시즌은 맨유에 와서 최고의 성적을 올렸던 한 해였죠. 그래서 올 시즌 더 잘하고 싶었는데 시즌 초 부상으로 경기에 결장하면서 제 역할을 하지 못했어요. 아쉬운 것도 많고,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었고…, 다행히 시즌 중반부터 살아나면서 이전 모습을 되찾기 시작했죠. 아쉬움이 많이 남는 시즌으로 기억될 것 같아요.
―맨유와의 재계약이 끝난 이후 과연 박지성 선수는 어떤 선택을 할지 궁금해진다.
▲내년까진 뛰어야 한다는 건 정확한 사실이고요(웃음), 그 이후는, 글쎄요. 맨유에서 절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저도 살 길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맨유가 프리미어리그 최고의 클럽이었다면, 그래서 더 이상 올라갈 데가 없으면, 이제 내려가야 되겠죠. 어느 팀으로 갈지 잘 모르지만 가능하다면 유럽에서 오랫동안 뛰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에요.
―이전 인터뷰에서 선수 생활의 마지막을 일본 교토 퍼플상가에서 마치는 것도 흥미로운 일일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 말은 즉, 은퇴를 일본에서 하겠다는 소리로 들렸는데.
▲당시 일본을 떠날 때는 제가 프로에 처음 몸담았던 곳에서 마지막을 장식하는 모습을 상상한 적이 있었죠. 그러나 지금은 일본에서 뛰고 싶지 않아요. 한국 K리그도 제가 갈 곳은 아닌 것 같고요. 나중에 생각이 바뀔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유럽에서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고 싶어요. 아시아로 돌아가는 것보단 제가 머물렀던 유럽에서 축구 인생을 마무리하고 제가 하고 싶은 일을 새롭게 시작했으면 좋겠어요.
―언제까지 박지성하면 ‘산소탱크’ ‘두 개의 심장을 달린 사나이’로 불리며 체력적으로 어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나.
▲‘언제까지’라는 생각은 안 해요. 지금도 조금씩 계속해서 체력적인 부담을 느끼고 있으니까요. 사실 그런 부담보다는 과연 내가 언제까지 유럽에서 통할까,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더 많이 하죠. 체력적인 부분은 숱한 경험을 통해 쌓인 노하우로 대신할 수 있다고 봐요. 가장 중요한 건 언제까지 유럽에서 생존해 있을 수 있을까 하는 부분이에요.
―언제까지 유럽에서 뛸 수 있을까요?
▲(웃으면서) 앞으로 3~4년은 더 있지 않겠어요?
―이건 좀 재미있는 질문이 될 것 같은데, 만약이라는 가정 하에 레알 마드리드랑 바르셀로나에서 동시에 오퍼가 들어온다면 어느 팀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올 것 같나.
▲하하. 퍽 어려운 선택이네요. 두 팀 모두 강팀이라서 말이죠. 만약 그렇다면 전 현실적인 조건을 따질 것 같아요. 연봉이 어느 정도인지, 그 팀의 감독이 절 얼마나 필요로 하는지 하는 부분이죠. 두 팀 중 어느 팀을 선호하진 않아요. 제가 그리 스페인리그를 좋아하진 않거든요. 단 유럽에서 뛰는 걸 선호했던 거죠.
▲ 캐링턴 훈련장에서 오랜만에 해후한 박지성은 이전보다 훨씬 여유 있어 보였고 웃음도 많아졌다. |
▲아쉬움은 갖지 않아요. 물론 좋은 환경에서 축구를 배운 선수들이 대부분이고, 그들 또한 엄청난 경쟁을 통해 이곳에 있는 거겠죠. 그러나 맨땅에서 축구를 배운 전, 여기 선수들이 배우지 못한 강한 정신력이나 남다른 마인드를 가질 수 있었어요. 이곳의 축구환경은 선수로 성장하는 데 도움은 됐겠지만 제가 이 자리까지 올 수 있는 모든 것이 될 수는 없을 거예요.
―지금의 대표팀에서 호흡이 잘 맞는 공격수들을 꼽는다면 누군인가.
▲글쎄요, 아무래도 오랫동안 호흡을 맞춘 선수들이 아닐까요? (박)주영이와 (이)동국이 형 등이 조금은 더 편하겠죠. 특히 동국이 형은 지난 두 차례의 월드컵에서 운이 닿질 않았잖아요. 그러나 결코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해 온 모습은 분명 후배들한테 많은 느낌을 갖게 했을 거예요. 좌절 속에서도 계속 자신의 꿈을 향해 앞으로 나아갔고 그랬기 때문에 세 차례의 도전 끝에 월드컵에 참가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2010남아공월드컵’을 떠올리면 무슨 생각이 드나.
▲대표팀과 첫 게임을 치르는 그리스! 그리스전의 결과 여부에 따라 16강 진출의 성패가 달려있으니까요. 이번엔 2006년 독일월드컵 때처럼 첫 경기에서 이기고 16강 진출에 실패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겁니다. 대표팀 전력이 그때에 비해 훨씬 더 좋아졌다고 생각하니까요. 어린 나이에 유럽에서 축구를 경험한 선수들도 많고 지난 월드컵 경험자들도 있는 탓에 어느 월드컵 대표팀보다 선수들 실력은 훨씬 더 좋아졌다고 생각해요.
―정말 이번 월드컵이 박지성 선수한테 마지막 월드컵이 되는 건가?
▲그 생각엔 변함이 없어요. 한국 축구는 점점 더 발전하고, 더 좋은 선수들이 많이 나오는 상황에서 그들의 기량이 맘껏 분출될 수 있어야 한다고 봐요. 체력적인 한계를 노출하는 선배들보다는 앞으로 발전해 나갈 수 있는 선수들한테 더 많은 기회가 주어져야 하는 거죠. 월드컵 이후 전, 체력적인 문제를 포함해서 지금보다 더 잘할 수 있는 확신이 안 서요. 그래서 대표팀에서 은퇴할 계획을 세운 거고, 아마 그렇게 되지 않을까 싶네요.
박지성의 은퇴 후 꿈은 ‘스포츠 외교관’이다. 오래 전부터 지도자의 길은 들어서지 않겠다고 결심했고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유럽에서 축구 생활을 하며 쌓은 경험과 인맥을 통해 한국 축구를 세계에 알리는 ‘메신저’ 역할을 하고 싶어 하는 게 그의 소망이다. ‘박지성’이란 이름에 더 많은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서른 살의 박지성은 또 다른 숙제를 안고 있었다.
맨체스터=이영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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