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성 세계최초로 8000미터급 14좌 완등에 성공한 오은선 대장이 27일 안나푸르나 정상에서 태극기를 펼쳐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
오 대장이 정상에 오르는 순간은 TV 화면을 통해 온 국민에게 생생하게 전달됐고, 이를 지켜본 모두가 그에게 환호에 찬 박수를 보냈다. 14좌 완등의 마지막 고비였던 ‘안나푸르나’ 등반 과정은 그야말로 험난했다. 수시로 발생하는 눈사태, 빙하의 균열 탓에 오 대장은 두 차례나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초속 14~20m로 부는 칼날 같은 바람과 영하 30도의 강추위는 그의 손발을 꽁꽁 얼려버렸다. 그래서일까. 13시간의 사투 끝에 밟은 정상은 그 어느 때보다 더욱 달콤했다. 히말라야 14개 봉우리에 남겨진 오 대장의 산악 인생을 따라가 봤다.
히말라야. 그곳엔 14개의 하얀 설산이 구름을 뚫고 우뚝 솟아있다. 히말라야에는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8848m)를 비롯해 해발 8000m가 넘는 산봉우리들만 14개가 있다. 오은선 대장은 여성으로서는 세계 최초, 남녀 산악인을 통틀어선 20번째로 위 14개의 모든 산봉우리 정상에 오른 기념비적인 인물이 됐다.
열두 살 때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간 도봉산에서 그는 처음으로 산과 호흡하는 법을 배웠다. 어린 시절 산과 나눈 이 첫 대화는 그를 대한민국 대표 산악인으로 성장시키는 초석이 됐다. 1985년 수원대 산악회에 들어간 시점부터 그는 산과 본격적인 연애를 시작했다. 대학 2학년 때 인수봉 정상에 오른 시점부터 산에 오를 생각만 하면 기대감과 설렘으로 심장이 쿵쾅거렸다. 사실 대학 입학 시 그의 장래희망은 컴퓨터 프로그래머였다. 전산학과를 지원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그러나 산을 향한 오 대장의 마음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대학 졸업 후 서울시교육청 공무원(8급)으로 일하던 오 대장은 1993년 에베레스트 여성원정대 모집 공고를 보고 장기 휴가를 요청했다. 휴가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는 미련 없이 사표를 던졌다. 이후 오 대장은 고 지현옥 대장을 중심으로 한 원정대원의 일원으로 히말라야에 첫발을 내딛었다. 당시 지 대장은 한국 여성 최초로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랐지만 그는 캠프3(7300m) 지점에서 되돌아와야만 했다. 아쉽지만 강렬했던 첫 경험이었다. 오 대장은 이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히말라야 원정에 눈을 돌렸다.
그로부터 4년 뒤 오 대장은 가셔브룸Ⅱ(8035m)에 오르며 히말라야 14좌 완등의 첫 발을 내딛었다. 2002년에 유럽 최고봉 엘브루스(5642m), 2003년에 북미 최고봉 매킨리(6194m) 정상을 밟은 오 대장은 2004년에만 무려 5개 대륙(아시아, 아프리카, 호주, 남미, 남극)의 정상에 올라 7대륙 최고봉 등정에 성공하기도 했다.
오 대장이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것은 2004년 5월 아시아 여성 최초로 에베레스트 단독 등정에 성공했을 때부터다. 당시 그는 정상에 오른 뒤 하산하던 도중 마지막 캠프(8300m)를 앞두고 탈진해 죽음의 문턱을 경험하기도 했다. 그는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데 편안한 기분이 들면서 ‘이렇게 죽는구나’ 싶었어요. 그런데 산에서 죽기는 싫었어요”라며 당시의 긴박한 상황을 전한 바 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을 혼자 힘으로 오른 이때부터 그는 단독 등정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다고 한다.
▲ 지난 4월 8일 출국하기에 앞서 파이팅을 외치는 오은선 대장. 사진제공=오은선 공식 사이트 |
실제로 오 대장은 14좌 중 에베레스트와 K2를 제외한 12개봉을 무산소로 등정해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안겨줬다. 2008년엔 마칼루(8463m), 로체(8516m), 브로드피크(8047m), 마나슬루(8163m) 등 한 해에만 무려 4개의 봉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게다가 4개 봉우리 역시 무산소로 등정해 뭇 남성 산악인들을 놀라게 했다. 마칼루봉의 경우 두 번의 실패 끝에 성공한 값진 등정이었고, 로체는 무산소에 셰르파의 도움도 없이 단독으로 정상에 올랐다. 2009년에는 칸첸중가(8586m), 다울라기리(8167m), 낭가파르밧(8126m), 가셔브룸(8068m) 등 4개봉 점령에 성공했다. 그리고 2010년 4월 27일 마침내 안나푸르나 정상에 우뚝 서면서 14좌 완등에 성공한 세계 최초 여성 산악인으로 우뚝섰다.
154㎝, 48㎏의 작은 체구를 가진 오 대장이 ‘철녀’로 불리는 이유는 그의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 덕분이었다. 그는 작은 체구에 날랜 움직임으로 ‘속공(베이스캠프를 출발해 중간캠프를 줄여가며 3~4일 만에 정상을 밟는 등정법)’을 펼쳐 ‘날다람쥐’란 별명을 얻었다. 지난 2009년 9월 체육과학연구원이 오 대장의 신체능력을 측정한 결과는 매우 놀라웠다. 심폐지구력과 직결되는 그의 최대산소섭취량(단위 시간 내에 얼마나 많은 산소를 섭취할 수 있는지를 나타내는 수치)은 정상급 남자 철인 3종 선수들과 비슷한 수준으로 측정됐다. 히말라야 12개 봉우리를 무산소로 등정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오 대장의 뛰어난 심폐기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또한 오 대장의 젖산 회복률(피로 회복 속도)은 71.85%로, 일반인 평균 50%를 크게 뛰어 넘는 수치로 기록돼있다.
오 대장은 스키를 타다가 다리가 부러져 체력이 미처 회복되기도 전에 마라톤에 참가해 끝까지 완주하는 저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의 이러한 ‘독한 성격’은 강한 정신력과 연결되어 14좌 완등의 버팀목이 됐다.
힘든 일도 많았다. 14좌 완등 여정에서 수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기 때문이다. 2006년 시샤팡마 등정 길에 얼음 덩어리에 맞아 갈비뼈가 부러지는 일도 있었다. 갑작스런 눈사태에 수없이 구르며 몸 이곳저곳을 다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 안나프루나 원정 모습. |
지난해 5월에는 칸첸중가 등정 의혹에 시달린 오 대장은 사람들의 부담스런 시선을 피해 시골에 머문 일도 있었다. 당시 오 대장과 세계 여성 최초 14좌 등정을 경쟁하던 스페인 여성 산악인 에두르네 파사반이 오 대장이 찍은 정상사진이 불명확하다며 의문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파사반은 “오 대장의 정상 등정 사진을 보면 녹색 로프가 보이는데, 내가 정상에 올랐을 땐 녹색 로프는 정상으로부터 200m 아래에 있었다. 또한 칸첸중가 정상에는 오 대장의 사진에서 보이는 바위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오 대장은 2009년 12월 “다른 나라 산악팀이 나의 등반 모습을 모두 지켜봤다. 나는 칸첸중가만 네 번 등정했다. 우리는 확실히 정상에 올랐다”며 눈물의 기자회견을 한 바 있다.
칸첸중가 등정 의혹은 오 대장이 14좌 등정에 성공한 4월 27일 이후에도 계속됐다. 파사반이 칸첸중가 등정 의혹을 다시금 제기한 데다 아직 오 대장이 정식 인증 절차를 밟지 못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오 대장이 정식 절차를 밟기 전에 파사반이 먼저 14좌 완등에 성공해 인증을 받게 된다면 등반 역사가 다시 쓰여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형국이다. 오 대장은 5월 초 엘리자베스 홀리(86)와 인터뷰를 가질 예정이다. 홀리의 인터뷰 결과는 사실상 ‘세계 공식 인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로이터통신 주재기자로 1960년부터 네팔에서 활동한 홀리는 50년간 히말라야를 등정한 등반대의 모든 기록을 정리한 ‘히말라야의 산증인’으로 통한다. 따라서 오 대장은 홀리와의 인터뷰를 통해 모든 의혹이 해소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산을 사랑해 산과 연애하느라 마흔 살을 넘길 때까지 독신으로 지낸 오 대장. ‘최초’의 역사를 쓰고 산을 내려온 그도 평범한 여자이고 싶을 때가 있다고 한다. 산을 향한 그녀의 끝없는 도전을 곁에서 응원해 주면서 산보다 더 그녀를 매료시킬 짝이 어서 나타나길 조심스레 기대해 본다.
오은선은 •생년월일 : 1966년 3월 5일 전북 남원 출생 •가족사항 : 미혼. 오수만 씨와 최순내 씨의 1남 2녀 중 장녀 •출신학교 : 수원대 전자 계산학과 졸업 •소속 : 블랙야크 •직위 : 한국산악회, 등산지원센터, 한국대학산악연맹 이사 •산악회 가입 : 1985년 수원대학교 산악부 입회 •해외원정 시작 : 1993년 에베레스트 (해발 8848M)
14좌 완등 숨은 주역들
촬영 감독 ‘감동 전달’ 셰르파 ‘목숨 구조’
오은선 대장과 함께 히말라야 14좌 마지막 봉우리를 오른 든든한 후원자들이 있었다. 먼저 오 대장의 ‘도전 일기’를 시청자들에게 생생하게 전달한 정하영 KBS 촬영감독이 첫 번째 숨은 공신이다.
그는 전문 산악인이 아님에도 6㎜ HD 소형 카메라를 들고 오 대장과 함께 안나푸르나의 정상에 올랐다. 8000m가 넘는 설산의 혹한 속에서 오 대장의 발자취를 카메라에 묵묵히 담아낸 그의 노고에 시청자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정 감독은 원래 등산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1999년 엄홍길 대장의 캉첸중가 중계팀에 합류하면서 히말라야와 첫 인연을 맺었고, 지난 11년간 9회 이상 히말라야에 오르며 촬영을 위해 꾸준히 체력 운동을 해왔다. 그의 책임감과 수고 덕분에 시청자들은 벅찬 감동 속에서 오 대장과 히말라야 정상에 함께 오를 수 있었다.
오 대장과 안나푸르나 등반을 함께한 셰르파 옹추 다와(39)와 체칭(29) 역시 오 대장의 든든한 길잡이가 되어줬다. 티베트계 네팔인 부족 명칭인 셰르파는 초기 원정대의 짐을 나르는 이들을 가리켰으나 최근엔 ‘전문 산악 가이드’로 바뀌어 불리고 있다. 셰르파는 척박한 땅에서 생활해 온 만큼 생존의 한계를 뛰어넘는 신체적 특성을 타고났다. 이들은 등정 루트를 조언하는 것은 물론 산을 오르는 데 필요한 물과 식량을 제공해준다. 단지 돈을 벌기 위해 산을 탄다는 이유로 산악인 대접을 받지 못했지만, 독자적인 등반을 추구하는 전문 셰르파가 늘고 있어 이들에 대한 인식도 많이 달라지고 있다.
실제로 에베레스트 산에서 탈진해 쓰러졌던 오 대장의 생명을 구한 장본인도 바로 셰르파였다. 이들은 오 대장의 든든한 동료로, 또한 길잡이로서 안나푸르나 정상에 오른 또 다른 주인공이었다.
홀리 여사 인터뷰는 무엇?
‘세계 공인’ 마지막 관문 남았다
히말라야 등정에 대한 국제적 공인절차는 따로 없다. 네팔 관광청이 산악인들의 히말라야 등정에 연락관을 동행시키지만, 연락관은 베이스캠프까지만 동행하고 나머진 등반대의 보고를 바탕으로 보고서를 작성하기 때문에 세계 산악계의 ‘공식 인증’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대신 엘리자베스 홀리 여사(87)와의 인터뷰가 관례상 공식 인증 절차로 인정된다. 홀리 여사는 히말라야 설산에 단 한 번도 올라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인증의 중요한 직책을 맡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미국 미시간대에서 역사학 석사 학위를 받고 10여 년간 언론인의 길을 걷던 그는 1962년부터 로이터통신 특파원으로 일하면서 히말라야에 도전하는 등반대를 인터뷰했다. 이렇게 쌓인 50여 년간의 기록과 수만 명의 산악인을 만난 경험은 누구도 무시못할 귀중한 자산이 됐다.
홀리는 히말라야를 오른 등반대에게 날카로운 질문을 던져 등정의 진위를 가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상에서 찍은 사진 역시 중요한 증거자료가 된다.
홀리와의 인터뷰 결과는 사실상 ‘세계공식 인증’으로 인정받고 있다. 또한 홀리가 세계적으로 이 분야의 최고 권위자로 인정받고 있는 만큼 오 대장은 그에게 칸첸중가 등정 사실을 확인 받아야 한다.
과연 세계 여성 산악인 최초로 히말라야 14좌 완등에 성공한 오 대장이 ‘홀리 여사 인증’ 고비를 무사히 넘길 수 있을까. 전 세계 산악인들의 시선이 홀리의 ‘입’에 집중되고 있다.
정유진 기자 kkyy1225@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