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명숙 전 총리가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주기 추모 전시회가 열린 행사장을 찾았다. 유장훈 기자 doculove@ilyo.co.kr |
하지만 한 후보의 선거운동 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오세훈 한나라당 후보가 현역 프리미엄에다 안정적 지지율로 여유 있게 앞서갔던 반면, 그는 검찰 수사 후유증으로 제대로 힘 한 번 쓸 수 없었다. 선거가 시작되기도 전에 양발이 묶이는 불행이 찾아왔지만 단일화를 기점으로 이제 추격의 발판을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옆 동네’ 유시민 국민참여당 후보의 분전도 한 후보의 발걸음을 가볍게 하고 있다.
한명숙 후보는 노무현 정권 때 총리를 지낸 현장감 있는 관료 출신이다. 여기에 오랫동안 시민운동을 해온 이상향적인 철학도 가지고 있다.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으로 어우러진 한명숙 후보를 서면인터뷰를 통해 ‘검증’해봤다.
한명숙 후보 공보팀은 최근까지만 해도 쇄도하는 언론사 인터뷰를 거절하느라 진땀을 흘려야 했다. 검찰 수사의 영향 때문에 본격적인 인터뷰를 하기 부담스러운 상황이 계속됐기 때문이다. 언론사를 찾아다니며 자신을 알려도 시간이 부족한 판에 검찰 수사는 한 후보의 선거운동 시간을 상당부분 잠식한 결과가 됐다. 결국 본격적인 선거운동이 시작되면서 그동안 미뤄둔 인터뷰는 대부분 ‘서면’으로 대체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한 후보는 기자들 사이에서 성실하게 인터뷰를 해주는 대표적인 정치인으로 평판이 좋다. 비록 서면인터뷰이긴 하지만 그는 시간을 쪼개 꼼꼼하게 자신의 대답을 체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사실 한명숙 전 총리와 노무현 전 대통령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그가 이번 지방선거에 다시 뛰어든 것도 노 전 대통령이 그를 최초의 여성 총리로까지 기용하며 아꼈던 것에 대한 일종의 ‘부채의식’ 때문이기도 하다(물론 야권에서는 그가 차기 대권 경쟁에서 박근혜 전 대표를 견제할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졌다라고 평가하지만). 이런 점에서 ‘노무현 정신의 계승’은 그가 왜 이번 지방선거에 출마했는지를 말해주는 가장 확실한 대답일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적 자산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노무현 정신’이 한 후보의 선거 전략과 서울시정 철학에 어떻게 구현되고 있나.
▲‘노무현 정신’은 권위주의보다는 민주주의를, 불통보다는 소통을, 대통령 한 사람의 정부보다는 참여정부를 추구했다. 그것이 바로 ‘사람 사는 세상’이다. (내가 내건) ‘사람특별시’는 정책의 중심을 사람에 두고 있다. ‘사람특별시’의 핵심은 교육과 복지, 좋은 일자리, 주거 안정이다. 교육과 복지에 투자하면 일자리가 생긴다. 낭비성 예산, 개발 사업을 줄여 교육과 복지에 쓰이는 ‘사람예산’을 50% 이상 확보해 사람에게 투자할 것이다. 서울시정에서 중요한 것은 ‘시장이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고, 얼마나 강한 의지를 지녔느냐’라고 생각한다. 지난 8년 동안 관행적으로 집행해 온 개발지상주의적 시정을 개혁해 서울시민들이 ‘사람중심도시가 이런 것이구나’, ‘내가 사람특별시에 살고 있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하겠다.
―일각에서는 좀처럼 지지율이 오르지 않는 한 후보가 ‘노풍’을 통해 반전을 모색하려고 한다고 지적하는데.
▲지난 8일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 콘서트에 다녀왔다. 가슴이 절절해지는 것을 다시 느꼈다. 정치검찰로부터 같은 상황을 당했기에 대통령을 지켜드리지 못한 것이 다시 한 번 죄송스러웠다. 그러나 추모는 추모이고, 선거는 선거다. ‘노풍’을 말하는 사람들이 더 정치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노 전 대통령이 살아있다면 이번 지방선거에서 한 후보에게 어떤 정치적 조언을 해 줬을 것이라고 생각하나.
▲아마도 ‘이명박 정부의 오만한 국정 운영에 실망한 국민들이 변화를 바라고 있다. 거꾸로 가는 이 정부에 국민의 경고를 보여주라’고 하셨을 것이다. 평소처럼 국민을 믿고 가라고 하셨을 것 같다.
한 후보는 ‘노풍’의 정치적 이용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선을 긋고 있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이 늘 강조해온 ‘사람 사는 세상’이 그의 서울시정 공약의 핵심 요소임을 부인하지는 않았다. 만약 그가 이번 선거에서 승리한다면 지난 5년 동안 우리 사회를 관통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가치와 정치철학’이 비로소 선거를 통해서 인정을 받는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5월 14일 현재 한 후보의 지지율은 여전히 오세훈 후보에 비해 10%포인트 이상 뒤처져 있다.
―오세훈 후보와의 지지율 차이를 극복하기 위한 핵심전략을 밝힌다면.
▲민주개혁세력의 단결된 힘을 묶어내겠다. 나는 지난 14일 범야권 단일 후보로 추대됐다. 또 하나는 ‘개발’ 대 ‘사람’의 선명한 대립구도다. ‘진실이 승리한다’는 신념으로 이명박 정부의 실정, 이명박-오세훈 8년 서울시정의 겉치레를 시민들에게 알려나가겠다.
그런데 한 후보가 뚜렷한 시정철학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검찰 수사를 거치면서 그의 정책에 대한 본질이 외면 받는 경향이 나타나면서, ‘무죄’로 결론 난 검찰 수사와 ‘도덕성’ 논란이 발목을 잡을 가능성도 있다. 그는 과연 선거전이 치열해져 여당이 ‘도덕성 공격’을 할 경우 어떻게 방어할까.
▲ 지난 14일 수도권 야권 단일후보 공동기자회견에서 송영길, 한명숙, 유시민 후보(왼쪽부터)가 투표를 독려하고 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한 후보는 도덕성 공격이 결국 여당에게 부메랑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자신한다. 하지만 오세훈 한나라당 후보는 <일요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라면서 한 후보의 도덕성이 서울시정에 영향을 줄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또한 오 후보는 ‘한 후보가 서울시 정책에 대해 아직 공부가 덜 된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갑자기’ 선거에 뛰어든 한 후보가 서울시 정책과 현안을 완전히 숙지하지 못했다는 지적은 그에게는 뼈아프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그 점을 인정하면서도 자신의 다양한 공직자 경험이 그것을 ‘커버’해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긴 시간 정치공작에 시달렸고, 지금도 ‘별건 수사’라는 명목으로 (검찰이) 발목을 잡으려 한다. 선거 준비가 조금 빡빡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핵심 공약인 보육 교육 일자리 주거 등은 오세훈 후보보다 앞선 비전을 갖고 있다. 나는 재선 국회의원, 여성부 장관, 환경부 장관을 지냈고, 국무총리를 하며 대한민국 국정을 운영해봤다. 서울시민들이 바라는 일을 나보다 잘해낼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만약 당선될 경우 꼭 이루고 싶은 정책 한 가지가 있다면.
▲‘친환경 무상급식’ 실현이다. 친환경 무상급식은 의무교육에 뒤따르는 정부와 지자체의 막중한 책임이다. 오세훈 후보가 말하는 ‘선별적 무상급식’은 아이들이 부모의 가난을 입증해야 한다. 밥 한 그릇과 자존심을 놓고 고통스럽게 선택해야 한다. 아이들의 올바른 심성을 북돋우기 위해서라도 친환경 무상급식을 반드시 해야 한다.
―일각에선 무상급식 공약을 포퓰리즘이라고도 비판한다. 무상급식 문제가 선거 쟁점으로 될 것으로 보나. 그리고 전면 무상급식에 대한 예산 확보 방안은.
▲학교 무상급식은 헌법이 보장하는, 누구나 교육받을 권리의 일환으로 시민들의 요구에 의해 전국 1만 1228개교 중 2657개교(23.7%)에서 이미 실시하고 있는 제도다. 서울의 경우 초등학생·중학생을 합쳐 95만여 명이고, 그 수는 점점 감소하는 추세다. 이럴 경우 (무상급식에 들어가는) 연간 소요액은 3500억 원가량이다. 중앙정부 및 교육청과 재정적으로 협력하고, 서울시가 반을 부담해 연간 1750억 원을 들이면 전면 무상급식을 시행할 수 있다. 또 자치구가 협력해주면 ‘친환경’ 무상급식도 가능하다. 포퓰리즘이 아니다. 이번 선거의 프레임에서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모든 후보가 복지와 교육, 일자리를 앞세웠다는 점이다. 심지어 뉴타운 등 선거 때마다 개발 공약을 앞세웠던 한나라당 후보도 교육과 복지를 내세우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오세훈 후보가 전면적인 친환경 무상급식 대신 그나마 ‘선별 무상급식’을 주장하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사람특별시’는 교육과 복지에 투자하는 ‘사람예산’의 확충과 추가투자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현재 6조 5000억 원에 불과한 예산을 2014년에는 10조 원 이상으로 늘릴 것이다. 예산은 △전시행정, 헛돈예산 전면 재검토 △계약심사, 공개경쟁 강화 등 예산의 효율적 집행 △대규모 건설사업 재검토 등을 통해 조성된 것으로 추가 투자분을 조달할 계획이다.
한편 한명숙 후보는 오세훈 후보와의 첫 토론회(7일 관훈토론회)에서 비교적 차분하게 자신의 정책을 설명했지만, 오 후보의 잘못된 정책판단에 대해서는 상당히 공격적으로 임했다. 그는 특히 “오 후보가 정책의 내실보다는 홍보강화 등 ‘전시행정’에만 골몰해왔다”라고 비판한 적이 있다.
▲겉치레 행정에만 몰두하며 방향을 잘못 잡았다. 오 후보는 사실상 재선을 바라보고 전시성 사업에 몰두했기에 많은 문제점을 낳은 것이다. 대표 정책인 뉴타운은 너무 많은 헛바람을 불어넣었다. 세입자뿐 아니라 가구주까지 쫓겨나고, 원주민 정착률이 15%밖에 안 된다.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되묻게 된다. 대표 사업이라는 광화문광장을 보면서 시민들은 여기에 왜 그렇게 많은 돈을 퍼붓는지 의아해한다. 서울시 시정의 중심에서 사람이 소외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전시행정’을 비판했는데 예를 들어 어떤 경우가 있는지 구체적으로 밝혀 달라.
▲오세훈 후보는 지난 4년간 전임 시장들보다 5배가량 늘어난 1600억 원의 홍보비를 썼다. 가든파이브는 SH공사가 1조 3000억 원을 투자해 건물을 지었지만 입주율은 저조했다. 그러자 360억 원의 홍보비를 들여 억지로 입주율을 높이고 있다. 사업타당성이 의심됨에도 수천억 원이나 쏟아 부어 한강 뱃길을 만들겠다는 한강주운계획, 원주민 재정착률이 15%밖에 안 되는 뉴타운, 부자들의 시프트(장기전세주택), 해마다 수십억 원의 시민혈세가 유지관리비도 들어가는 청계천, 477억 원이나 들었지만 나무 한 그루 없는 광화문 광장, 간판 바꾸기일 뿐인 ‘디자인 서울’ 등이 모두 홍보로 치장된 전시행정이다.
이밖에 한 후보는 서울시정 공약 외의 질문에 대해서는 사안의 민감성 때문인지 대답을 간단하게 하는 선에서 그쳤다.
―향후 여권이 개헌을 추진할 가능성이 크다. 이에 대한 입장은.
▲개헌은 국민들의 공감을 바탕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현 시점에서 개헌 논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본다.
―이명박 대통령의 지지율이 50%를 넘어섰다고 청와대가 최근 발표했다. 숫자에 불과하지만 이것이 곧 현 야권의 침체를 상대적으로 더 부각시키는 것 같다. 야권이 국민의 지지를 받기 위해선 어떤 전략들이 필요할 것이라고 보나.
▲민주개혁세력이 하나가 되고 있다. 수도권 광역단체장(후보)도 모두 야권 단일 후보가 됐다. 야권이 불리한 상황만은 아니라고 본다. 4대강 사업 저지, 친환경 무상급식 실현, 안정적인 일자리 창출, 전면 무상 보육 실시 등과 같은 정책으로 국민들의 지지를 높여나갈 것이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이명박 정권의 독주와 실정을 심판하고, 승리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본다.
한명숙이 걸어온 길
1944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남. 이화여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여성학 석사 학위를 받음. 남편 박성준이 결혼 6개월 만인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15년형을 받고 수감되면서 13년간 옥바라지를 함. 그 뒤 1974년부터 한국 크리스찬아카데미 간사로 일하면서 민주화 운동과 여성운동의 길을 걸음. 1979년 크리스찬아카데미 사건으로 복역한 후 1981년 석방됨. 이후 한국여성민우회 회장 등으로 활동하면서 여성운동의 토대를 닦은 ‘여성운동 1세대’의 대표적 인물로 꼽힘. 1999년 정계에 입문, 16~17대 국회의원, 2001년 초대 여성부 장관, 2003년 환경부 장관에 이어 2006년 헌정 사상 첫 여성 국무총리에 오름. 2009년 5월 노무현 전 대통령 국민장 공동장의위원장을 맡아 영결식 조사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을 남김. 민주당 상임고문으로 활동하다 야권의 서울시장 단일 후보로 지금에 이름.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