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합뉴스 |
사실 경남지사 선거는 ‘이명박 vs 노무현’의 대리전으로 일찌감치 주목받아왔다. 이명박 대통령의 측근으로 행정안전부 장관을 지낸 이달곤 후보와 참여정부에서 행정자치부 장관을 지내며 ‘리틀 노무현’으로 불리던 김두관 후보의 맞대결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더구나 선거가 임박해오면서 양 후보의 박빙 구도가 뚜렷해지며 선거 결과에 대한 관심은 최고조에 달했었다. 결과는 김두관 후보의 ‘완승’. 김두관 후보가 득표율 53.5%로 이달곤 후보(46.5%)를 예상보다 큰 표 차로 누른 것.
누구보다 떨리는 가슴으로 개표 결과를 지켜봤을 주인공인 김두관 당선자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김 당선자는 당선이 확정된 순간의 느낌을 묻는 기자에게 아직 채 흥분이 가라앉지 않는 듯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기뻤다”고 전했다.
참여정부 6개월여의 행자부 장관 시절을 제외하고는 경남 지역에서 꾸준히 정치인생을 걸어온 그는 ‘마을 이장’ 출신이라는 독특한 경력을 갖고 있기도 하다. 이장과 군수, 장관을 거쳐 도지사의 자리에 오르게 된 김두관 경남도지사 당선자와 지난 4일 전화인터뷰를 나누었다. 치열한 선거운동 탓에 그의 목소리는 약간 쉬어 있었지만 야심찬 각오가 묻어났다.
2002년, 2006년에 이은 세 번째 경남지사 도전. ‘2전 3기’ 끝의 성공은 그 기쁨만큼 막중한 책임감도 가져다준 것 같았다. 김두관 당선자는 당선 소감을 묻는 기자에게 “기쁜 순간은 잠시였고 선거 때 약속드린 공약을 앞으로 잘 이행해 나가야겠다는 책임감과 중압감이 바로 뒤따라왔다”고 대답했다.
―이달곤 후보와 박빙 구도를 이어갔는데 실제 이길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나.
▲현장에 있으니까 많은 사람들을 만났는데 공식적으로 선거 운동에 들어가기 시작하면서 거의 이길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사람들하고 인사하고 악수를 해보면 한마디씩 하시는 말씀 속에 무언가 들어 있다. 내가 (경남지사 선거에서) 두 번 낙선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많으셨고 이번엔 꼭 되라는 분들도 많았다. 또 경남을 잘 알고 도민과 정서적 공감대가 있는 사람이 당선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많이 하셨다. 지고 이기는 결과는 6월 3일 날 새벽에야 결정되겠지만 이번에는 도민들이 변화를 바라고 있다는 느낌이 확실하게 다가왔기 때문에 해볼 만한 승부가 될 것이라 예상했다.
김두관 당선자의 당선 비결 중 하나로 ‘무소속 전략’을 높게 평가할 수 있다. 그동안 국민참여당과 민주당은 그에게 줄기차게 입당 제의를 해왔지만 김 당선자는 끝까지 처음의 결심대로 무소속 출마를 고수했다. 선거일 며칠 전 김 당선자는 기자에게 “꼭 국민참여당과 같이 가는 것보다는 한나라당 후보와의 대결에서 이기는 것이 ‘노무현 정서’를 살리는 길이 아닌가 판단했다. 반드시 야권후보단일화를 이뤄내겠다”는 각오를 밝힌 바 있었다. 그의 측근들도 “김 전 장관은 이번 경남지사 선거에 나가겠다고 마음먹었을 때부터 무소속 출마를 결심했다. 이 결심은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고 전했다.
자신을 “‘색깔 있는’ 무소속”이라고 표현했던 김 당선자는 당시의 각오대로 야권 단일후보로 나서 한나라당 후보와의 대결에서 값진 승리를 일궈냈다. ‘무소속 전략’을 고수한 그의 ‘선견지명’에 새삼 눈길이 간다. 김 당선자는 “여러 번의 선거를 치러오며 현장에서 익힌 감각이 이번 지방선거에서 발휘된 것 같다. 경남도민의 정서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잘 안다. 그게 바로 내 장점”이라며 웃음을 보였다.
―무소속 전략이 유리하다고 판단한 근거는 무엇인가.
▲한나라당에 충성도가 낮은 당원들을 흡수해오겠다는 전략이었다. 한나라당의 정책, 이념에 동의해서 지지하는 이들은 충성도가 높은 이들이지만 시장, 군수, 국회의원과의 사적인 인연으로 지지하거나 경남의 일반적 정서가 친 한나라당이기 때문에 그냥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이런 분들은 우리 쪽으로 넘어올 수 있다고 판단했다. 선거는 35%의 고정 지지층으로는 이길 수가 없다. 이런 분들이 넘어와야 51%를 만들 수 있는 거다. 이런 분들은 한나라당을 이번에 혼을 좀 내야겠다 싶어도, 그럴 수 있는 후보가 민주당이나 참여당에 있으면 한나라당에서 못 넘어온다. 내가 중립지대에 있어야 이들의 지지가 가능하다. 야권단일후보를 만들었던 3당의 지지자들도 그렇게 생각했고 시민사회단체에서도 그러한 공동인식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지방선거를 앞두고 특정 당으로 갈 이유가 전혀 없었다. 또 이미 2년 8개월 전부터 당적이 없는 상태였다. 선거공학적 측면에서만 보면 무소속 전략이 아주 주효했던 거다.
김두관 당선자의 승리로 ‘노풍이 다시 불어올 것’이라고 예견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서울시장 한명숙 후보와 경기지사 유시민 후보는 석패했지만, 충남지사에 당선된 민주당 안희정 최고위원과 강원지사에 당선된 이광재 의원 등 이번 지방선거에서 친노 후보들의 활약이 돋보였다. 김두관 당선자는 선거 다음날인 지난 3일 경남 김해 봉하마을의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을 찾기도 했다. 그때 그의 마음속에는 어떤 말들이 스쳐 지나갔을까.
―선거 다음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묘역을 다녀왔는데 묘역 앞에 선 심경이 어떠했나.
▲평소엔 항상 노무현 전 대통령이 곁에 계신다고 느껴진다. 묘역에 직접 가보면 ‘작년에 돌아가셨구나’ 하는 현실이 그때서야 다가온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생전에 힘쓰셨던 ‘국가 균형발전’과 ‘지역주의 타파’를 위해 애쓰겠다는 말을 마음속으로 건네 드렸다. 노 (전) 대통령께서는 지역주의 타파를 위해 여덟 번 나무를 찍어 놓았고 나는 거기에 한두 번 도끼로 찍어 지역주의 벽이란 나무를 쓰러뜨린 것이다.
―‘노풍’이 당선에 영향을 미쳤다고 보나.
▲그렇지 않았겠나.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주기를 맞이해 지지자들 사이에선 노 전 대통령에 대한 향수가 되살아났을 것이다. 또 사람들은 누구나 대통령이든 도지사든 과거의 인물과 비교하게 된다. 이명박 대통령의 3년째 국정운영을 보면서 노 전 대통령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재평가했을 것이다. 그런 이들이 나를 밀어주었을 것이라고 본다.
―서울시장 한명숙 후보와 경기지사 유시민 후보는 선전했지만 결국 당선되지 못했는데.
▲서울 강남권은 오세훈 시장에게 몰표를 보냈더라. 오세훈 시장이 거의 ‘강남시장’처럼 되어버렸다. (한명숙 전 총리, 유시민 전 장관과) 함께 당선되었다면 이명박 정부에 대한 더욱 확실한 심판이 되었을 텐데 두 분에 대해서는 너무 아쉽다. 수도권 두 지역을 얻은 것을 근거로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의 반성이 없을까봐 걱정이긴 하다. 한나라당이 세종시와 4대강 문제에 대해 이번 지방선거의 민심을 반영하겠다고 밝힌 것이 그나마 다행스럽다.
―4대강 사업을 저지하겠다는 각오를 밝혔는데 구체적인 계획이 있는가.
김두관 당선자의 당선에 대해 ‘이변’으로 평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가 걸어온 인생을 잘 알고 있는 주변사람들은 이번 결과에 대해 ‘언젠가는 다가올 승리’였다고 말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는 ‘마을 이장님’ 출신이다. 1988년에 고향마을인 남해군 고현면 이어리 마을 이장에 출마해 당선됐고 이장으로 일하던 2년 동안 그는 ‘풀뿌리 정치’의 근본부터 배워나갔다. 1995년 전국 최연소(36세) 기초단체장의 기록을 세우며 당선된 남해군수 선거 때도 내세울 경력이 별로 없었던 그는 포스터에 ‘이어마을 이장’이라고 쓰고 고교 시절 당시 차인태 아나운서가 진행하던 ‘MBC 장학퀴즈’에 우연히 나가 차석을 했던 경력을 더하기도 했다.
김 당선자는 지금도 “나는 이장 출신 군수, 이장 출신 장관이라는 말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한다. 김 전 장관에게 당시 ‘이장에 출마했던 이유’를 물어보자 “그때 나는 분명한 목표의식이 있었다. 이장은 행정과 주민을 연결하는 심부름꾼으로, 주민의 어려움과 그 어려움을 해결하는 길을 가로막는 현실의 벽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자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5남 1녀 중 다섯째로 태어난 김두관 당선자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58년 남해에서 태어나 남해중·남해종고를 졸업한 그는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대학 진학을 포기하려고 했다고 한다. 고교 시절부터 친구들에게 장래희망을 ‘정치인’이라고 말했던 그는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기르기 위해선 배워야 한다고 생각해 고교를 졸업한 지 2년 후 뒤늦게 경북전문대 행정학과에 입학한 뒤 24세에 동아대 정치외교학과에 편입해 졸업하게 된다.
김 당선자가 정치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군 제대 이후. 그는 “가장 비민주적인 조직인 군대에서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절실하게 깨달았고 군대에 다녀온 뒤 정치운동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키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졌다”고 털어놨다. 그가 정치인의 삶을 걷게 된 것은 당시 ‘민족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에서 마련한 민족학교에 입학하게 된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민통련 사회부장으로 일하며 민주화운동 집회를 주도했던 그는 직선제 개헌투쟁 청주집회를 주도한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다. 1년 만에 특별 복권돼 감옥에서 나온 그는 고향 남해로 내려가 지역운동을 계속했고, 남해농민회를 조직해 활동한 것은 그가 훗날 남해군수에 도전해 당선되는 밑거름으로 이어졌다.
남해군수로 일하던 7년 동안 그는 ‘민원공개법정 도입’ ‘장묘문화 혁신운동’, 덴마크 축구대표팀 캠프 유치 등 ‘스포츠마케팅 성공’을 이뤄내며 남해를 ‘지방자치 1번지’로 평가받도록 만들었다. 특히 장묘문화 혁신운동은 소신 있는 개혁행정의 대표적 사례로 거론된다. 그는 자서전 <빗자루를 든 이장>(깊은샘)에서 “심각한 묘지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남해를 살릴 길이 없었다. 당분간 표는 포기하기로 했다. …끈질긴 설득과 노력으로 ‘묘지전쟁’이 벌어진 1년간 사망자 801명 중 불법묘지는 단 2건에 불과했다. 남해군민들은 장묘문화는 세월이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라 자치단체가 노력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벚꽃 축제 관광 수익을 올리기 위한 이벤트를 고민하던 중 그는 ‘남해대교’에서 자신이 직접 번지점프를 하는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실제로 그는 직접 번지점프를 뛰었고 남해에서 ‘김두관 군수 번지점프 사건’은 두고두고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김 전 장관은 당시 일화에 대해 “내 담력도 시험해볼 겸 도전했었다”며 웃음을 보였다.
남해에서 나고 자라고 살아온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발탁으로 참여정부 초대 행자부 장관을 역임한다. 세 번의 총선(13대, 17대, 18대)에 출마했지만 고배를 마셨던 그는 지난 2007년에는 ‘무모한 도전’이라는 주변의 평가에도 과감히 대선에 출마하기도 했다. 당시의 대선 출마에 대해 김 당선자는 “철없이 도전했던 것”이라며 웃음을 보였다. 2007년 대선캠프에서 그를 가까이서 지켜봤던 김한창 전 부대변인 겸 정책국장은 김 당선자에 대해 “기존 정치인들처럼 쇼맨십에 능하지 않지만 자신이 믿고 있는 신념을 지켜나가는 뚝심은 누구 못지않다”고 평했다. 김 전 부대변인은 또 “돈과는 거리가 먼 분”이라는 말과 함께 한 가지 일화를 전했다.
지난 2007년 대선을 치르기 위해 서울 마포에 전세아파트를 얻었는데 그때 부인 채정자 여사는 대출을 받아서라도 그 집을 사기를 원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김 당선자는 ‘나는 촌놈이다. 시골 가서 살자’며 만류했다는 것. 이후 이 아파트 값이 올라 채 여사가 다소 아쉬워하자 그냥 ‘허허’ 웃고 말았다고 한다.
이장과 군수, 장관을 거쳐 도지사의 꿈을 이룬 김 당선자. 훗날 그의 다음 도전은 자연스레 대권으로 이어지게 될까. 김 당선자는 ‘큰 꿈’을 묻는 질문에 “많은 분들이 도지사를 대선으로 가는 발판으로 생각하실까 걱정이다. 우선 도정을 열심히 하는 것에만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답했다.
자서전 속 ‘촌놈’ 김두관
‘전세아파트 신고식’
지난 2003년 2월 노무현 당시 대통령으로부터 행자부 장관에 임명받은 그는 ‘혹독한’ 서울 입성 신고식을 치러야 했다고 한다. 그는 자서전 <빗자루를 든 이장>(깊은 샘>에서 “‘촌놈’은 서울에 집 구하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지방 출신들에게 서울은 난공불락의 성처럼 보였다. 나는 돈이 없어서 집을 마련하지 못하고 몇 달을 후배가 세 들어 사는 아파트에서 더부살이를 했다. 그러다가 은행 대출을 받아 전세 1억 7000만 원짜리 아파트를 얻었다. 서울 전세금은 정말 해도 너무했다. 남해에 같은 평수 아파트 세 채를 살 돈으로 전세밖에 마련하지 못한 것이다. 서울은 전세금으로 ‘촌놈’ 기를 팍 죽여 놓았다”고 털어놓았다.
‘국회 신고식’
행자부 장관이 된 그가 처음 국회 행자위에 출석하니까 말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장 하다 장관 되니 기분 좋지”부터 시작해서 “명함을 만들어 인사를 다녀라”는 둥 갖가지 비하성 발언이 쏟아졌다고. 심지어 일부러 “어이, 김 군수”라고 부르는 의원도 있었다는 것. 김 전 장관은 이런 발언의 배경은 권력이 모두 서울에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지방과 현장을 버리고 중앙에서 ‘권력 싸우기’만 하니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지방을 무시하고 농촌을 폄하하는 사고를 갖게 된 것이라는 것. 그는 “막상 선거 때는 ‘이장 촌놈’을 한 사람이라도 더 지지자로 만들려고 낮은 자세를 보이다가도 당선만 되면 깡그리 잊어버리는 이유가 이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장 위장취업?’
당시 어떤 한나라당 국회의원들은 TV 토론회에 나가 김두관 장관이 정치를 하기 위해 이장에 ‘위장취업’을 했다는 이상한 주장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김 당선자는 “세상에 이장도 위장취업을 하느냐”며 “정략과 술수로만 정치를 하다 보니까 세상의 모든 일이 정략이고 술수로 재단하는 버릇이 들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급기야 훗날 장관 해임 정국 와중에선 야당 지도부가 골프를 치면서 그를 보고 ‘이장촌놈 주제에…’ 하는 발언까지 나왔고 결국 전국의 이장들이 발끈해서 항의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고 한다.
조성아 기자 lilychic@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