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을 끝내고 법정을 나선 장 아무개 형사는 9월 7일 일요신문과 통화에서 윤성여 씨에게 사과한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장 형사에겐 이 재판이 ‘다 정해둔 재판’이었던 셈이다.
‘진범 논란’을 빚은 이춘재 연쇄살인 8차 사건의 재심 공판이 9월 8일 수원지방법원(형사12부)에서 열렸다. 8차 사건 당시 화성경찰서 형사계 소속으로 윤 씨를 취조했던 장 형사와 이 아무개 형사가 이날 증인으로 법정에 섰다. 두 형사는 윤 씨를 검거한 공을 인정받아 당시 1계급 특진했다.
윤성여 씨가 2019년 11월 13일 수원지방법원에서 이춘재 연쇄살인 8차 사건 재심 청구를 하고 있다. 사진=최준필 기자
장 형사가 먼저 증언할 동안 이 형사는 법정 밖에서 대기하는 방식으로 증언은 차례로 이어졌다. 두 형사의 증언은 판박이였다. 이 형사는 오늘 오는 동안 장 형사와 차를 함께 타고 오면서 서로의 기억을 맞춰봤다는 취지로 증언했다. 두 형사를 잘 알고 현재도 긴밀하게 연락을 주고받는 당시 수사 관계자에 따르면 두 형사는 이춘재의 자백 이후 한 달에 한 두 번꼴로 만나왔다고 전해진다.
두 형사는 윤 씨에게 사과했지만 ‘범인을 만들었다’는 의혹엔 강하게 부인했다. 자신들은 조사 과정에서 윤 씨를 구타하거나 소아마비로 왼 다리가 불편한 윤 씨에게 쪼그려 뛰기를 시킨 사실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 형사는 “쪼그려 뛰기 시킨 적 없다. 본 적도 없다”면서도 “최 형사가 따로 데리고 나가서 자백 받을 당시 쪼그려 뛰기를 시켰다는 걸 들었다. 심 형사인지 최 형사인지 누구한테 들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답했다. 당시 구타와 가혹행위로 윤 씨의 자백을 받아냈다는 최 아무개 형사는 지병으로 사망해 현재 고인이다.
두 형사는 또 범행 현장 검증 당시 윤 씨가 128cm 높이의 담을 넘는 걸 봤다고 증언했다. 반면 앞선 재판에 증인으로 나왔던 심 아무개 형사는 당시 윤 씨가 현장 검증할 때 담을 넘지 않았다고 실토했다. 심 형사는 장 형사, 이 형사, 최 형사와 함께 윤 씨 취조를 담당해 특진한 5명 가운데 한 명이다.
앞선 재판에서 심 형사는 윤 씨가 담을 넘지 않은 것은 물론 당시 윤 씨가 일하던 농기구 수리 센터에서 피해자 집까지 왕복으로 걷지도 않았다고 증언했다. 거동이 불편한 윤 씨가 장거리를 걸을 수 없었다는 점을 인정한 셈이다. 심 형사는 자백 내용을 자신을 불러줬고 윤 씨가 받아 적게 했다며 허위 조서를 꾸몄다는 취지로 말하기도 했다.
윤 씨의 변호를 맡은 박준영 변호사와 김칠준 변호사가 “위증이 될 수 있다”며 설득에 가까운 추궁을 하자 장 씨는 증언 말미에 “윤 씨가 담벼락에 손을 짚는 것을 본 기억만 있다. 넘었던 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을 바꾸기도 했다. 반면 이 형사는 “윤 씨가 담을 넘을 수 있을까 반신반의했는데, 팔심이 좋아서 훌쩍 뛰어넘어서 나도 놀랐다”는 주장을 끝까지 굽히지 않았다.
윤성여 씨는 장 형사와 이 형사의 사과에 “사과를 받았지만 형식적인 사과에 그쳤다. 기분이 좋진 않다”고 답했다. 사진은 2019년 11월 3일 일요신문과 인터뷰 당시 모습. 사진=최준필 기자
그러면서도 두 형사는 윤 씨에게 사과했다. 장 형사는 “참담했다. 법정에 나오기까지 힘들었다. 윤 씨에게 미안하다. 그리고 당시의 국과수가 정말로 원망스럽다”고 말했다. 이 형사는 “당시에는 고생을 많이 했고 사건을 해결했다는 자부심을 가졌는데 지금은 너무나 창피하다. 무고한 사람의 인생을 망쳤다. 정말로 죄송하다”고 했다.
이날 현장 검증 전체를 영상으로 남겼단 사실도 밝혀졌다. 오전에 증인으로 나선 이 아무개 형사는 자신이 현장 검증 당시 촬영을 맡았다고 증언했다. 이 형사는 당시 화성경찰서 수사계 감식반 소속으로 감식 업무 등을 담당했다. 이 형사는 당시 영상이 담긴 테이프를 수사본부에 인계했다고 증언했다. 윤 씨 변호인단은 해당 테이프 존재를 확인할 계획이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보관하고 있던 8차 사건 현장 체모 2점의 DNA 분석 결과는 판독 불가로 나왔다. 박정제 부장판사는 “(체모 2점을 고정하던 있던) 테이프로 인한 오염과 30년 이상 보관된 시간으로 인해 DNA가 손상 및 소실 됐고, 모발이 미량이어서 DNA가 부족해 판단 불능 판정이 나오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객관적인 증거가 나오지 않은 이상 이춘재를 증인으로 채택해야 한다고 판단된다”며 “다른 증인들에 대한 신문을 모두 마친 뒤에 재심 재판 마지막 증인으로 이춘재를 소환해 신문하겠다”고 덧붙였다. 이춘재가 증인으로 법정에 나설 시점은 11월쯤으로 예상된다.
윤 씨는 두 형사의 사과를 받았는데 기분이 어떠냐는 물음에 “사과를 받았지만 형식적인 사과에 그쳤다. 기분이 좋진 않다”고 답했다.
장 형사는 끝으로 아쉽다고 말했다. “우리나라 기술이 그것밖에 안 됐나. 화성 사건 취재한 형사로서 진짜 범인이 어떤 놈인가 명확히 알고 싶었어요. 안 나와서 안 나왔다고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너무 아쉽죠. 이춘재도 진술밖에 없는 거 아녜요?”
박현광 기자 mua123@ilyo.co.kr